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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한정림 옮김 / 정은문고 / 2024년 10월
평점 :
계엄
저자는?
이 책은 소설이다, 저자는 일본인이다.
일본인인 저자는 1979년 1년 동안 서울의 건국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외국인 교사로 체류했다.
그런 체류때 경험한 것을 소설의 형식으로 발표한 것이다.
일본인이기에, 외국인의 시점에서 본 우리나라의 모습이 이 책에 들어있다.
우리는 늘상 그러려니 하고 지나친 것들도 외국인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 것이니. 이 책의 내용 중 우리를 깨우쳐 주는 것들이 많다.
연구실 벽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초상 사진이 걸려 있었다. 분명 공적 장소에는 의무적으로 걸게 되어 있나보다. 나는 일본에서 전전 (戰前)시대 국민학교에 내걸렸다는 천황 초상화를 떠올렸다. 일본 메이지 유신을 모방해 '정신 유신' 같은 말을 고안하고 국민에게 강요하는 독재자인만큼 당연히 여기도 모방의 힘이 작동하리라 (41쪽)
이런 것을 보면, 당시에 이미 일본에서는 국가원수의 초상 사진 같은 것을 걸지 않았던가 보다. 우리나라만 메이지 유신을 따라 하느라 철지난 짓을 따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일은 전두환 때까지도 그랬었다.
식수는 박대통령이 제창한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기회가 생길 때마다 행해졌다. (94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자주 보는 기관장이나 유명인사들이 어떤 것 혹은 일을 기념하여 식수를 하는 장면의 기원이 바로 새마을운동에서라는 것.
당시 우리나라는 외국인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까?
저자는 우리나라로 오게 되면서 여러 가지 사전 정보를 듣는다. 그런 사전 정보들을 갖고 온 저자, 이런 것들을 뇌리에 주입하게 된다.
군사 독재 정권 하에 있으며 얼마나 부조리하고 공포로 가득 찬 곳인지 알게 되었다, (26쪽)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도 연행되어 시체로 발견되었다. (27쪽)
그곳 한국에서는 적어도 일본에서와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으로 주의에 만전을 다하지 않으면 뜻밖에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쓸 가능성이 있다. (28쪽)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던 저자, 그가 중앙정보부에서 데리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을까 충분히 짐작이 된다.
일하는 학교로 찾아온 중년 남성에게 이끌려 그는 중앙정보부로 가게 된다.
그런 일을 당하자 목적지에 도착하기 까지 오만 생각을 다하게 된다.
무슨 잘 못이 있는 것일까? 말을 잘 못한 것이 있는지, 아니면 누군가 연루된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등등
심지어 학과 공동연구실에 있던 책, 김석범의 <까마귀의 죽음>도 떠올린다.
김석범은 한때 조총련 측에 섰던 소설가로, 이 소설은 1948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주제로 한 것이다. (161쪽)
그러나 막상 도착한 곳에서는 뜻밖의 일을 제안한다.
일본어에 능숙한 직원을 뽑는데 면접관이 되어 달라는 것, 물론 1회만 해달라는 것이다.
기록해두고 새겨볼 말들, 사건들
당시 그때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어떻게 나라는 사회는 돌아갔을까?
일본인이 보고 들은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아무래도 외국인의 시선으로 보았는지라 다르다. 특별히 일본이라는 나라는 더 특별한 외국이기에 더더욱 특별한 이야기가 기대되었다.
일본에서 온 잡지와 책을 받으려면 더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했다. 어느 날 갑자기 국제우체국에서 출두하라는 요청이 인쇄된 엽서가 도착한다. 그러면 버스를 갈아타고 신촌 앞 철도 밑을 지나 연세대학교 맞은편에 있는 우체국에 가야 한다. 오전 중으로 시간대가 지정돼 아무래도 출퇴근 러시아워에 맞닥뜨린다. 비틀거리며 버스에서 튕겨 나와 우체국 바깥 계단을 올라가 2층 창구에서 서류를 보여주고 외국에서 온 소포 수령을 신고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수령 절차가 끝날 리 없다. 담당자가 커터 칼로 소포 포장을 거칠게 뜯으면 안에서 나온 책과 잡지에 대해 한 권 한 권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산주의와 반정부 관련 문서가 없는지 검사하려는 목적이다. (114쪽)
박정희 유고 사태가 일어난 다음의 일이다.
저자는 일본 대사관 홍보실에 가서 신문을 열람한다. 물론 일본 신문을 보러 간 것이다.
열람실에 놓인 일본 신문은 무참할 정도로 검열을 받았다. 제목과 하단 광고를 남겨두고 1면 모든 기사가 잘려져 있었다. 그만큼 심각한 사태가 최근 한국에서 일어났음을 말해주었다. (265쪽)
이런 기록도 만난다.
박정희 유고 사태가 일어난 다음의 일이다.
텔레비전에서는 그리그의 <오제의 죽음>을 배경음악으로 깔고 대통령 공적을 칭송하며 61세로 끝난 그의 생애를 이야기했다. (........) 라디오 역시 클래식 음악 일색이었다. (271쪽)
이런 기록을 읽으니 저자가 클래식 음악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서 다시 읽으니 음악 관련 이야기가 많이 들어있다.
바흐의 파르티타 (32쪽)
비틀스부터 드뷔시까지 조잡한 흑백 재킷으로 감싼 해적판 레코드가 팔려나간다. (63쪽)
내가 에릭 사티를 듣지 못하는 게 아쉽다고 하자 부인은 안쪽에서 레코드를 꺼내 내게 빌려주었다. (242쪽)
텅빈 전시장에는 모차르트의 <레퀴엠>만 흘러나왔다. (264쪽)
이런 기록 가치 있다.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문화와 관련된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과 만난 기록들이 의미가 있다.
저자가 만난 사람들이다.
최인호, 하길종 영화 감독의 부인 전채린, 하길종 감독의 동생 영화배우 하명중.
다시, 이 책은?
이 책은 비록 소설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저자가 우리나라에 체류하면서 경험한 시간 - 하필이면 비상계엄의 엄중한 시간- 에 관한 기록이다. 해서 역사다.
이 책을 손에 잡은 날짜가 2024년 12월 5일이다.
『계엄』이라는 책 제목 그대로 ‘계엄’이 이 나라에 울려퍼진 날이 2024년 12월 3일, 그로부터 이틀 뒤다. 그러니 이 책이 가져다주는 의미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역사 속에 한번 분명하게 정리된 단어, 그 단어가 박제된 개념으로만 존재할 줄 알았는데, 책을 뚫고 역사를 비집고 현실로 나타났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책을 펼치면서, 그래서 2024년 12월 3일 나타난 비상계엄에 관한 이야기가 나중 나중에 이런 책으로 엮어져 나올 것을 기대하면서, 과거의 계엄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역사책을 읽어가는 심정으로 읽었다.
이 책, 역사이기 때문에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가치있는데, 특히 외국인의 눈으로 본 것들이라 더더욱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