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드리 노니다가 - 라종일의 탐미야담, 1983년 어느 가을밤, 젊은 정치학자 마음에 깃든 옛이야기
라종일 지음, 김철 옮김 / 헤르츠나인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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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드리 노니다가

 

이 책은 향가와 설화 등 고전시가를 바탕으로, 저자의 새로운 눈길을 더하여 새롭게 쓰여진 글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노래들은 헌화가’, ‘구지가’, ‘처용가’,‘여우 설화’, ‘유리 설화’, ‘동명왕 설화’, ‘지귀 설화등이다.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헌화가와 구지가

 

헌화가를 서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용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니, 그 노래들이 새롭게 보인다.

그리고 그 용이 나중에는 거북이로 변하는 과정도 흥미롭다.

 

우리도 용 때문에 죽고 사는 문제가 생기면 당연히 용과 맞서 싸웠다. 단지 서양과는 달리 우리 나름의 방식이 있었다. 아주 평화로우면서도 굳센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집단으로, 세속의 부귀 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위해 싸웠다. 한 아름다운 여인을 위해서 싸운 것이다..

 

서양 이야기에서는 흔히 용과 싸워 이기면 공주와 결혼하고 한 나라를 이어받지만, 우리 노래는 그렇지 않다.

 

그렇게 해서 헌화가가 불려지고, 그 다음에는 구지가가 흘러나온다,

용은 이제 용이 아니라 미천한 거북이가 되었고 무시무시한 협박까지 당하는 형편이 되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처용가

 

저자는 처용의 상황을 먼저 이렇게 진단한다.

 

분명하게도 처용은 아내에 대한 사랑과 또다른 감정인 질투와 의심으로, 결국은 그런 갈등으로 완전히 탈진했을 것이다.

 

그럴 때 그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어떤 서양 놀이판에 등장하는 못난 무사처럼 그 아내의 목을 맨손으로 졸라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56)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처용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처용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바로 인간사를 짓누르고 있는 비참한 거짓과 무지를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58)

 

그런 깨달음이 후세에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을 저자는 아쉬워한다.

처용의 노래가 대중의 세속적인 소원과 맞물려 일개 신화로 타락한 점을 안타까워한다.

 

새롭게 알게 된다.

 

여우 설화, 동물의 마성에 관한 순수한 슬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여우 이야기, 그 이야기를 저자처럼 새롭게 해석한 것은 처음이다.

처음 듣는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호랑이와 곰의 경우처럼 사람이 되고 싶은 동물들의 이야기는 많이 전해져 오는데, 저자는 그 중 여우를 예로 들어 이야기를 끌어간다.

 

여우 이야기에서 저자의 마지막 문장은 우리들의 정곡을 찌르는 말로 끝난다.

 

이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겉으로는 완벽하게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얼마나 많은 우리가 실은 여우거나, 늑대거나 뱀이거나, 물고기 또는 지네인지, 우리는 아마 그걸 모르는 게 아닐까요? (81)

 

말의 진정성을 전하기 위해 저자의 말을 그대로 옮겼다. 저자의 진정성이 그대로 전해질 수 있기를......

 

지귀 설화. 단 한번 눈길에 부서진 영혼

 

지귀 이야기, 지금까지 흘러넘겼다. 그 이야기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하고, 또 찾으려 하지 않았었다. 누가 그런 시시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것인가?

 

그런데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던 그 사나이에게 저자는 눈길을 주었다.

마치 선덕 여왕이 절에 행차했다가 나오는 길에, 잠들어 있던 사내에게 눈길을 주었던 것처럼,

 

그래서 선덕여왕의 눈길에 의해 산화되었던 지귀, 그는 저자의 눈길로 인해 우리 앞에 새롭게 살아났다. 지귀의 모습은 저자의 따뜻하고 차분한 손길로 우리 앞에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다시, 이 책은?

 

어릴 적, 학창 시절에 <고문(古文)> 교과서에 한번 보고, 그 뒤로는 잊혀졌던 노래들이다.

그 뒤로는 한번도 생각하지도 읽지도 않았던 노래들을 다시 접하니 그런 감회조차 새로운데, 그 때 들었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오니, 더욱 새롭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그래도 쌓였던 세상살이에 대한 통찰에 이런 이야기가 덧붙여지니, 각각의 이야기마다, 그 이야기를 풀어가는 저자의 문장마다 밑줄 긋고 새겨보게 된다.

우리 옛날 이야기도 이렇게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구나, 하는 경탄도 저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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