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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깊고 아름다운데 - 동화 여주 잔혹사
조이스 박 지음 / 제이포럼 / 2024년 4월
평점 :
숲은 깊고 아름다운데 : 동화 여주 잔혹사 - 이야기는 힘이 있다.
지금 21세기의 우리에게, 동화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동화를 읽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질문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볼 일이다.
먼저 이 책의 구성을 살펴보자.
각 장의 타이틀을 살펴보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1장 쌍년이 되는 건 해법이 아니다
2장 소년이 걸어야 하는 자기 몫의 황무지
3장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세상을 바꾸는 여자
4장 용은 왜 공주만 잡아갈까?
5장 탑에서 나와 광야를 걷는 여자
6장 자식은 죽여도 아버지는 못 죽인다
7장 백설공주 계모 왕비의 거울 뒤, 그놈 목소리
8장 이제는 인간으로 변신할 시간
9장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10장 뜨개질하는 여자를 두려워하라
타이틀만 읽고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일단 생각해 본 다음에 본문을 읽어본다면, 이 책의 진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글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것, 알게 된다.
모티프(motif)라는 개념으로 이야기의 줄기를 잡아간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 작품에 거듭해서 등장하는 이야기의 줄기를 모티프(motif)라고 한다.
예컨대, ‘곤경에 처한 아가씨’ 모티프가 그런 것이다. (76쪽)
이 책에 등장하는 모티프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셋 중에 하나 고르기 모티프 (78쪽)
용에게 잡혀가는 공부 모티프 (109쪽)
탑에 갇힌 공주 모티프 (109쪽)
닫힌 정원 모티프 (120쪽)
살부(殺父) 모티프 (145쪽)
메타 픽션:
책 속의 주인공이 자신이 이야기 속의 존재임을 알고 이야기 밖으로 나가기도 하는 기법을 메타 픽션이라 한다. (98쪽)
캠벨의 말에 이의 있다고 한 여성, 모린 머독
저자는 조지프 캠벨과 모린 머독의 대화를 소개한다.
모린 머독은 젊은 시절에 캠벨에게 물었다한다.
“여성은 삶에서 어떤 여정(journey)을 떠나야 하나요?”
조지프 캠벨이 영웅의 조건으로 영웅의 여정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캠벨은 말하길, 여자는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즉, 남자들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모험을 거치며 영웅으로 성장하는 동안, 여성들은 남자를 기다리는 고정된 좌표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40쪽)
사실 그렇다. 지금까지 읽었던 영웅담의 여성들은 모두 그랬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20년 동안 그의 아내 페넬로페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밖에도 무수한 남성 영웅들의 애인, 또는 아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정 없는 삶을 살아가는 여성은 그러면 영웅이 될 수 없다는 말인가?
모린 머독의 의문은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의문의 결과 머독은 『여성 영웅의 탄생 (내 안의 여신을 찾아서)』를 썼다.
이런 내용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제시한다.
여성은 영웅이 되는 여정을 걷지 않는다니. 소유하고 싸우고 쟁취하며 트로피를 얻는 여정만이 여성의 여정이라면, 캠벨이 말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의미의 여정도 있다. 바로 치유와 회복의 길이다. 여성들은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의 숲으로 여정을 떠난다. 치유는 단순히 고통이 사라지는 거라면, 회복은 지위와 자존감을 공고히 하는 행위다. 여성들은 회복의 서사를 자아내는 영웅의 여정을 걸으면 된다. 부디 천 개의 바람을 쐬며 천 개의 얼굴을 모두 풀어내는 충만한 삶을 살기를 소망한다. (41쪽)
그리스 신화의 해석 포인트
그리스 로마 신화를 나름 열심히 읽어왔다. 그 중에 신들 간의 전쟁, 그리고 신의 결혼 등 인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치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 생길법한 사건들이 있는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이 책에서 그 해석의 포인트를 얻게 된다.
제우스가 메티스를 잡아먹어서 아테나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가부장 신을 모시는 지배 부족에 지혜의 여신을 모시는 부족이 흡수, 통합되면서 그 신의 딸로 새롭게 자리매김했다는 의미다. 그리스 사회가 가부장적인 사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하기도 하다. 가부장 신화로 흡수된 여신은 딸인 신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복종과 피지배의 모습을 철저히 드러내야 한다. 제우스의 아들 중 하나인 젊은 남자를 보내 메두사를 죽이고 안드로메다를 구하는 이야기는 바가 바로 이런 뜻이다. (89~90쪽)
디오니소스와 마이나데스 (107쪽) :
디오니소스를 쫓아다니던 광녀 마이나데스는 여성에 잠재된 힘, 억눌려 있다가 술의 힘을 빌려 비로소 전면에 부상하는 광폭한 힘에 대한 것이다. 이들은 사람이 모여사는 사회에서는 드러낼 수 없는 얼굴이라 아웃 사이더가 되어 광야로 쫓겨난 존재다.
이런 그림 살펴보자.
에드워드 번존스
자신이 갇힐 청동탑이 지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다나에를 그렸다. (118쪽)
청동탑을 바라보고 있는 다나에.

그렇게 다나에를 청동탑에 가둬두었지만, 제우스는 황금비로 변신하여 틈입하고, 그녀와 관계를 맺는다.
이런 신화의 이야기는 신화로 그치는 게 아니라, 다시 동화의 이야기로 변주된다.
바로 라푼젤 이야기.
밑줄 긋고 새겨볼 말들
두려움이 그 사람을 정의한다. (199쪽)
이 책에서 가장 감명깊게 새긴 글은 바로 이것이다.
두려움이 그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 혹은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알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이는 두려움만이 아니라 증오 혹은 미움에도 해당된다.
이야기는 힘이 있다.
이야기는 힘이 있다. 저자는 그 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머니에게서 어머니로, 입에서 입으로만 비밀을 전할 수 있던 시대가 가고, 여자들도 글을 쓸 수 있는 시대가 왔다. 그리고 이 시대에 다시 쓰인 이야기는 왜 여자들이 글을 써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216쪽)
이 말을 다시 이런 말과 연결해서 읽어보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여성들은 여러 얼굴 중 극히 일부만 내보일 수 있고 나머지는 억압해야 했기에, 여성성은 왜곡되고 분열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여성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렇게 풀어낸다.
이야기가 압제의 수단이 되었기에 그 매듭 역시 이야기로 풀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남성들이 말과 글을 전유했던 시대를 지난 지금, 이 이야기들을 소환해서 다시 써야 한다. (107쪽)
이 책은 그러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야기는 다시 써져야 하며, 이제 다른 시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읽어왔던 이야기들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확실하게 알게 해주고 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던 시절에 이야기의 힘은 더욱 강력했다. 사람은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빚어가고, 동시에 다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드러낸다. 이야기밖에 못 한다며 무력하게 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가장 오래가고 근본적인 변화의 힘이 아닐까 (9쪽)
그런데 이야기가 그저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이야기, 적어도 여기 소개되고 있는 이야기들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이야기의 힘있음을 독자들은 새롭게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