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시대 1
이문열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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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시대 1


비극이다. 너무나도 비극적인 비극, 그것도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비극이라니!

그런 비극의 시대를 읽는다. 이문열의 『영웅시대』

『영웅시대』에 존재하는 시대는 영웅시대가 아니다. ‘영웅시대’라 쓰고 ‘비극의 시대’라 읽어야 한다.


 거기 등장하는 인물중 누구를 영웅이라 할 것인가? 그들은 영웅이 아니라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래서 영웅의 시대가 아니라 비극의 시대인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비극을 연출하는 그 누구의 ‘손’에 놀아나는 연기자에 불과할 뿐이다. 해서 그들은 모두다 비극의 현장을 처절하게 장식하는 조연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러나 그 비극의 시간이 다 지나간 다음에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혹시라도 한때 자칭타칭 영웅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은 실제 단지 비극의 주인공이었을 뿐이라고.


우리의 불행한 가족사우리 민족의 불행한 역사.


작가 이문열은 이 작품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은 일생을 통해 꼭 하고 싶은 얘기가, 그러기에 평소에는 오히려 더 가슴 깊이 묻어두게 되는 하나의 얘기가 있게 마련이다. 어쩌면 누가 어떤 직업을 택하는 것도 바로 ‘그 얘기’를 나름대로 펼쳐보이기 위해서가 아닌지 모르겠다.> (4쪽)


<내게 있어서 ‘그 얘기’는 바로「영웅시대」, 아니 6·25를 전후한 우리의 불행한 가족사였다. 지금으로부터 십칠팔 년쯤 전에 어렴풋하게나마 내가 작가로 끝장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문득 나를 사로잡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소설거리가 그것이었기 때문이다.>(5쪽)


‘우리의 불행한 가족사’라 함은 작가 이문열의 가족사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이를 단순히 어느 개인의 가족사로 읽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쓰는 ‘그 얘기’를 거꾸로 읽어 북한에 있지만 남한 쪽에 서있는 사람의 얘기로 읽어보면, 그게 단순히 어느 개인의 얘기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얘기’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주인공들은 우리 민족이 겪어야했던 비극을 오롯이 보여주는 명배우들이다.

이동영, 그의 어머니, 그의 부인 정인, 그리고 그의 아들딸들.

또한 그의 주변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역시 비극을 보여주기 부족함없는 인물들이다.


어떤 비극인가?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이런 상황이다.

그래서 그런 비극적인 상황에 분노하는 동영의 가슴에 공감이 되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지난번 후퇴 때애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국군과 유엔군을 맞은 사람들일 거라는 아무런 근거없는 단정이었다. 지난 6월 28일 인공기를 들고 남진해오는 북쪽 군대를 환영하는 그들을 처음 볼 때만 해도 얼마나 감격스러웠던가. 동영의 분노가 평범한 시대였으면 역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그들을 그토록 교활하게 만든 상황에 대한 것이었다. 서글픔은 지난날의 신선한 감격을 잃어버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403쪽)


분노와 서글픔. 그게 이 영웅시대를 읽고 그게 실상은 비극의 시대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 느끼는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소리치는 발언들은 오히려 지금 이시대에 적합한 것이 아닐까?


특히 동영이 만난 박영규라는 인물(466-483쪽)의 발언.


“나를 이대로 버려두게. 적으로든 동지로든 나를 다시 너희들에게로 끌어들이지 말아줘. 이대로 있다가 ? 때가 올 때까지 살아남으면 소리 높이 인간의 노래를 부르게 해주게. 독한 이념의 발톱에 할퀴우고 찢긴 그들을 어루어 줄 순수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483쪽)


이런 상황은 동영이 만난 통장이란 사람에게도 적용이 된다. (415- 425쪽)


그는 전날 밤 예상한 대로 몇 번씩이나 거듭 뒤바뀌는 세상에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허둥대는 그 수많은 인민들 가운데 하나일뿐이었다. (425쪽)


그러니 이런 동영의 질문은 얼마나 철모르는 소리인지 모른다.


왜 남이든가 북 어느 한쪽을 택헤 그리로 피난을 가시지 않고 한군데 붙박혀 이쪽 저쪽 모두에게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420쪽)


그 질문이 얼마나 철모르는 그저 책상물림의 좁은 생각에서 나온 것인지? 여기 인용된 존 볼의 유명한 연구(連句)를 잠깐 뒤집어보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아담이 밭 갈고 이브가 길쌈할 때

도대체 누가 지주였단 말인가? (480쪽)


굳이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상황을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없을 것이다.


다시 이 책은?


혹시라도 그래도 영웅이라는 것에 목을 맨다면?

이런 것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 영웅이 등장한다. 그 소설의 서술자는 이런 기록을 남긴다.

서술자가 생각하는 영웅이란 지극히 평범하고, 시청 일만 아니라 자신의 비밀스런 글쓰기에 꾸준히 몰두하면서도 보건대의 자질구레한 업무들 통계, 카드 정리 등에 묵묵히 자신의 몫을 해내는 그랑이다.

여기서 영웅으로 평가받는 그랑은, 조제프 그랑, 즉 시청의 말단 서기로 일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소설 『페스트』에서 영웅으로 평가받는다니?


그렇다. 사람들이 실제로도 소위 영웅이라 하는 본보기와 선례를 마음 속에 품고 싶어 한다면, 그리고 이 이야기 속에 그런 영웅들 하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서술자는 다름 아닌 바로 이 평범하고 앞에 잘 나서지도 않는 영웅, 가진 것이라고는 마음 속에 약간의 선량함과 겉보기에 그저 우스꽝스럽기만 한 이상밖에 없는 이 영웅을 추천한다.


페스트가 만연한 도시 오랑에서 전혀 흔들리지 않고 본인의 직무에 충실하면서, 가외로 봉사활동을, 그리고 또한 자신을 위하여 꾸준하게 글쓰기를 하는 그가 바로 영웅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 영웅이 별 게 아니다. 자리를 지키고 살아남는다는 것, 그런 사람이 바로 영웅인 것이다. 

그래서 『영웅시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영웅 시대’에 굳이 ‘영웅’을 찾아낸다면?

그런 비극의 시대를 견디고 살아남은 모든 사람이 바로 영웅인 것이다.

해서 우리 민족 모두가 영웅이다. 그런 비극의 시대를 겪고도 살아남는 자들, 그리고 앞으로는 그런 비극을 더하지 말아야 한다고 깨닫는 사람들이 영웅이다.

그래서 이 책 『영웅시대』에서 저자가 말하는 ‘우리의 불행한 가족사’라 함은 작가 이문열의 가족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의 역사인 것이다. 이제는 그렇게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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