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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에 귀 기울일 때 ㅣ 푸르른 숲 43
안드리 바친스키 지음, 이계순 옮김 / 씨드북(주) / 2023년 8월
평점 :
적막에 귀 기울일 때
주인공 세르히는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날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아버지는 클라리넷 연주자, 어머니는 바이올린 교사였다. 거기에 여동생까지 있는 아주 단란한 가정에서 자라나, 피아노 연주로 이제 폴란드에서 열리는 콩쿠르를 앞두고 있었다.
폴란드에서 열리는 콩쿠르라면 당연히 쇼팽 피아노 콩쿠르일 텐데, 거기 나갈 정도면 그야말로 장래가 촉망되는 인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고가 나서, 세르히를 제외한 모든 식구가 죽었다. 그리고 세르히의 청력도 죽었다. 사고로 목소리와 청력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세상은 갑자기 적막한 세상이 된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적막에 귀 기울일 때』이다.
그런 사고를 당하여 사고무친이 된 데다가 청력까지 읽게 된 세르히는 특수 학교에 보내져서 생활하게 된다. 거기에서 만난 선생님이 미콜라 선생님이다. 연구 책임자이자 청각 전문가이다. 그 선생님은 세르히를 잘 보살펴준다.
불안해하지마. 시간이 지나면 적막의 세계도 소리의 세계 못지않게 매력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거야. (23쪽)
그러나 그런 희망적인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고, 어려운 일이 계속 일어나는데, 그래서 『올리버 트위스트』가 연상되는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 주인공을 괴롭히게 된다.
이 소설에서 극적인 장치를 작가가 배치해 놓는데, 어느날 그 학교에 야린카라는 아이가 들어온다. 그 아이 역시 청력과 말에 문제가 있는데 아버지가 폭력을 쓰는 문제 가정에서 지내다가 결국 그 학교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야린카는 다른 아이들과 전혀 소통하지 못하고 혼자 지내는데, 어느날 세르히와 접점이 생기게 된다. 바로 피아노다.
피아노와 세르히의 다시 만남
세르히는 강당 한 구석에 방치되다 시피 놓여있는 피아노를 발견하고, 그 피아노를 쳐본다. 비록 청력은 잃었을지라도 예전의 손놀림은 계속해서 몸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 눈을 감고 연주를 시작했다. 피아노 선율이 퍼지면서 텅 빈 강당을 가득 채웠다. 세르히는 폴란드 콩쿠르를 위해 연습했던 쇼팽의 왈츠를 연주했다. (48쪽)
그러자 뜻밖에도 야린카가 피아노 소리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피아노를 등지고 무심히 앉아있던 야린카가 갑자기 긴장했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 천천히 피아노 쪽으로 걸어가더니 피아노 몸체에 귀를 바짝 붙였다. 잠시 후에는 아예 두 팔을 벌려 피아노를 온몸으로 감쌌다. 야린카의 두 눈이 낯선 빛으로 반짝였고, 입술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49쪽)
기적이 일어나려는 걸까?
소설은 그렇게 무언가 적막이란 공간에 피아노 선율이 기적을 일으킬 것이라는 기대를 만들어놓는다.
세르히와 야린카는 피아노로 우정을 쌓게 되고, 서서히 피아노와 춤으로 연결이 되어 세상을 소통하게 된다.
피아노와 야린카와의 만남
야린카의 뇌는 세르히가 연주하는 피아노 음악만 인식할 수 있는 것 같았다. (54쪽)
야린카와 세르히에겐 공통의 언어가 있었고, 말이 필요 없었다. (55쪽)
세르히가 연주한 곡들
쇼팽의 왈츠 (48쪽)
쇼팽은 모두 19개의 왈츠를 작곡했는데, 왈츠 리듬이 경쾌하게 적막한 그곳에서 어둠을 뚫고 울려나왔을 것을 생각하면 저자가 왈츠 곡을 선정한 게 의미가 있다 하겠다.
에드바르 그리그의 <노르웨이 무곡> (64쪽)
그리그의 무곡, 즉 춤곡은 모두 4개가 있는데. 이 역시 왈츠처럼 춤곡이라 세르히의 이런 경우에 알맞은 곡이다. 게다가 야린카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고 있으니 더더욱 알맞은 선곡이다.
그 둘은 한 학기의 끝날에 학부모를 초청하는 자리에서 피아노와 춤을 선보이기로 하고, 연습에 열중하는데. 문제가 생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르히는 죽을 힘을 다하는데, 과연 그 둘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다시, 이 책은?
이 작품의 배경은 우크라이나이다.
해서 등장인물들의 동선에 우리 귀에 익숙한 지명이 등장한다. 이건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가 언제 우크라이나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던가? 다 푸틴이 일으킨 전쟁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도시 이름들이 낯설지 않게 된 것이다.
예컨대. 키이우(52, 54쪽), 르비우(71쪽), 프란키우스크 (71쪽)
이 작품에서 키이우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르비우는 우크라이나 서부에 있는 최대도시라고 소개되고 있다. 지금은 전쟁의 참화로 얼마나 망가지고 있을까?
그렇게 우크라이나를 무대로 하는 이 소설은 찰스 디킨슨의 『올리버 트위스트』가 연상된다.
어린아이들을 욕망의 도구로 사용하는 소매치기 일당의 모습들을 보면서 특히 더 그랬다.
이 책은 그런 『올리버 트위스트』의 우크라이나 판인데 거기에 음악이 더해졌다고나 할까.
어서 빨리 전쟁이 끝이 나고 세르히 같은 아이, 야린카 같은 아이가 음악으로 앞날을 행복하게 만들어가는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란다.
음악으로 치자면,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같이 고통을 이겨내려는 세르히의 모습이 잘 그려진, 한편의 서사시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적막을 뚫고 피아노의 선율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처럼 독자들은 이 책에서 베토벤과 쇼팽, 그리고 그리그의 선율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아름다운, 그리고 힘찬 선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