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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유토피아 - 에덴의 기억이나 예감이 없다면 숨을 쉬는 것도 형벌이다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챕터하우스 / 2022년 9월
평점 :
역사와 유토피아
역자의 말이 맨 앞에 놓여있다. 그러니 그럴 읽어보고, 책을 시작하게 된다.
그중 기억에 남는 말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시오랑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냉혹하다.
모든 인간의 활동은 유토피아와 반대의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시오랑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렇게 인본주의적이다. (6-7쪽)
이 책에는 저자의 글 6개가 실려있다.
<두 유형의 사회에 대하여>
<러시아와 자유의 바이러스>
<폭군의 학교에서>
<원한의 오디세이아>
<유토피아의 메커니즘>
<황금기>
그렇게 읽어간 글, 첫 번째 글부터 막힌다. 이제 뭐지? 무슨 글이야? 편지글인가?
편지글인 것은 맞다. 글 앞머리에 이런 글이 써있으니까.
‘멀리 있는 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그렇게 첫 번째 글을 두 번, 아니 세 번을 읽어도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내용도 그렇거니와 글쓴 이의 상황을 모르니 무슨 영문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별수 없이 책을 덮고 탐험을 시작했다. 이 책의 저자는 누구며, 이 책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볼 심산으로 인터넷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가 다음과 같은 글을 만났다. 바로 예스 24의 이 책 소개문이다.
<예스 24 책 소개글>
나치 독일의 멸망으로 루마니아가 소련의 위성국으로 사회주의국가가 되어버리자, 파리에서 무국적자로 머물러야 했던 에밀 시오랑은 루마니아어와 이별하고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로 결정한다. 《역사와 유토피아》는 1960년에 출간된 그의 네 번째 프랑스어 작품으로 상까지 수상하며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첫 에세이 「두 유형의 사회에 대하여』는 루마니아 철학자 콘스탄틴 노이카(Constantin Noica)에게 보낸 편지로,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를 비교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권력과 역사의 흐름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시오랑에 따르면 역사는 정해진 어떤 방향이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저 그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무리 중 가장 강한 자가 권력을 잡는다는 것.
「러시아와 자유의 바이러스』에서 그는 러시아, 러시아의 역사, 발전, 그리고 그가 “자유의 미덕”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시선을 보여준다.
「폭군의 학교에서』는 스탈린과 히틀러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그는 보기 드문 명쾌함과 설득력 있는 논리로 폭군과 폭정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원한의 오디세이아』에서는 ‘이웃을 미워하는’, 즉각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복수를 하려는 우리 모두의 뿌리 깊은 꿈을 조사한다.
마지막 「황금기』에서는 수많은 시인과 사상가의 유토피아인 성경의 에덴동산인 “황금기”의 개념을 분석한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글들이지만 그럼에도 아이러니와 독설과 풍부한 지식과 ‘무해’한 사상을 구사한 그의 문명 비평을 독자들에게 권한다.
어찌된 일인지 여기에서도 다섯 번째 글인 <유토피아의 메커니즘>에 관한 소개는 빠졌다.
어쨌든 아쉬운 점은 이거다. 이런 글을 왜 책에서는 읽지 못하고 다른 수고를 해서 찾아내 읽어야 하는지? 예스 24의 책 소개에 나오는 정도니까 충분히 책에 집어넣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아쉬움과는 별개로, 그런 소개글을 읽고 이 책을 읽으니 조금씩 안개가 걷히는 듯,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시오랑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냉혹하다.
시오랑의 글은 통렬하다. 냉혹하다.
어쩌면 저런 글들을 서슴치 않고 쓸 수 있을까, 하는 감탄이 나올 정도다.
이런 글들 읽어보자.
인간은 움직였다 하면 나쁜 짓을 한다. (94쪽)
야망이란 몸을 내맡긴 사람을 미치광이로 만드는 마약이다. (77쪽)
사람을 알게 되면 사랑이 사라진다. 우리 자신의 비밀을 파고 들수록 다른 사람들을 싫어하게 된다. 우리를 닮았기 때문이다. (115쪽)
우리는 죽은 사람의 우월성은 별수 없이 인정하지만, 산 사람의 우월성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비난이고 질책이다. (125쪽)
창작이란 괴로움을 전달하는 것이다. (135쪽)
모두다 금쪽같은 아포리즘이다. 인간의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는, 촌철살인의 문장들이 이 책에 넘치고 넘쳐난다. 해서 어떤 생각의 뭉치를 전하는 단락도 좋지만, 그 생각을 전달하는 문장 하나하나 마다 모두다 새겨볼 만하다.
인간들의 모습, 관계를 냉철하게 분석해 놓았다.
저항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노예가 아닙니다. 지배자에서 노예로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 과거 지배자 역할을 잘했던 헝가리 사람들은 현재 유럽 어느 나라보다 속박을 견디지 못합니다. (22쪽)
거기에 저자의 넋두리가 얹혀진다.
지배자가 될 기회가 없었던 우리는 저항할 기회도 없습니다. (23쪽)
사람들은 가까운 데 있는 적보다 먼 데 있는 적을 더 좋아한다. (50쪽)
러시아가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는 슬라브 주의자들의 주장은 완곡어법이다. 지배하지 않고 구원할 수는 없다. (61쪽)
종교 지도자들은 권력욕을 강하게 느낄수록 다른 사람들의 권력욕을 억제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94쪽)
맥베스와 히틀러, 스탈린의 공통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내가 권력을 잡는다며 첫째 할 일은 내 동지를 없애는 일이다. (86쪽)
여기에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어른거린다.
이에 대하여는 별도의 글로 남긴다.
http://blog.yes24.com/document/17054465
역사의 속내를 파악한다.
이슬람 군주 마호메트 2세가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을 때 일이다.
당시 기독교 세계는 분열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로마 교황은 도움의 손길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콘스탄티노플을 방어하기 위한 파병을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너무 늦게 군대를 파병했다. 같은 기독교지만 ‘동방 정교 분리주의자’를 위해 서두를 필요가 있었겠는가? (50쪽)
러시아는 동방정교를 선택하면서 서유럽과 결별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그것이 처음부터 정체성을 확립하는 방법이었다. ( ......) 기독교가 분열한 것은 교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을 내세우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52쪽)
특별히 유토피아에 관련된 부분 :
이 책에서 가장 눈여겨 봐야할 대목은 유토피아와 관련된 부분이다.
먼저 역자가 <옮긴 이의 말>에서 언급한 유토피아 관련 글 읽어보자.
유토피아는 가능할까? 아니다.
유토피아는 경직과 침체를 피할 수 있는 개념으로 유용하지만 결코 실현될 수도 없고, 실현되어서도 안 되는 이상향이다. 악의 어둠이 사라지고 빛만 존재하는 일원성의 세계, 갈등과 다양성이 진정된 세계, 영원한 현재가 지배하는 정체된 세계, 그 유토피아애서 인간은 살 수 없다. 그 획일성과 단조로움에서 인간은 질식한다. (6-7쪽)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저자의 글이 확실하게 해준다.
원칙적으로, 기본 방향으로 나쁜 일이란 일어나지 않는 유토피아에서는 (.........) 어둠이 금지되어 있고, 빛만 허용되는 곳이 유토피아다. 이중성을 찾아볼 수 없는, 본질적으로 반 이원론적인 세계다. 비정상, 기형, 불규칙을 배격하고 획일성, 전형, 반복, 정통만을 고집한다. 그러나 생명이란 단절이고 이단이며, 물질적 기준에서 벗어난 예외다. 인간은 이단의 하위범주다. 개인성과 일시적 기분이 승리하는 비논리적 출현이다. (157쪽)
여기까지만 읽어도 우리가 정말 이상향으로 생각하던 유토피아가 얼마나 허술한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인간이 인간인 이상, 유토피아는 흐트러진 한 사람만 있어도 허물어지는 것이다.
기독교가 정신적 만족을 주는 한 유토피아는 매력이 없다. 기독교에 실망하게 되면 유토피아가 다시 나타나 정신세계를 사로잡기 시작한다. 르네상스 시대 이미 유토피아의 개념이 작동했었지만, 본격적으로 성공한 것은 두 세기가 지난 ‘계몽주의’ 미신의 시대였다. 확실한 행복, 계획된 천국, 미래는 그렇게 탄생했다. (162쪽)
특히 이 부분, 밑줄 긋고 새겨가며 가슴에 품어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도 저기도 아니고 우리 안에 있다고 예수가 말했을 때 이미 유토피아를 금지한 것이다. 유토피아주의자들의 “나라‘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밖에 있다. 우리의 내면이나 개인적 구원과는 무관하다. 그 영향을 받은 우리는 우리의 밖에서, 사물이나 집단이 지향하는 곳에서 우리의 구원을 찾는다. (165쪽)
다시, 이 책은?
맨 처음 읽을 때에는 마치 안개속을 헤매는 것 같았는데, 에밀 시오랑의 말투에 익숙해지고 나니. 그의 말이 모두 다 꿀같이 달게 느껴진다. 우리의 진짜 모습을 밝혀 보여주는 그의 혜안이 놀랍고, 역사와 유토피아의 관계가 어떤지를 짚어주는 명쾌한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역사에 대하여는 이 말, 기억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역자의 말이다.
역사의 본질은 정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생성변화이다.
변화의 동력은 다양성이며, 단절이고 돌발이다. (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