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왈츠
이 책 제목이 『마지막 왈츠』인데, 그 내용은 어떤 것일까?
아마 그 뒤에 있는 부제를 읽지 않았다면, 왈츠곡에 얽힌 이야기를 다룬 책이겠거니 생각했을 것이다.
해서 부제를 읽어야 한다. <세대를 초월한 두 친구, 문학의 숲에서 인생을 만나다>
세월을 초월한 두 친구는 누구일까?
황광수와 정여울.
황광수와 정여울이다. 44년생 완도 남자와 76년생 서울 여인, 그런 두 사람이 절친이 되었다.
만나자 마자 절친이 되었다는 두 사람, 이 책에서 문학을 이야기한다.
안타깝게도 황광수는 이 책 출간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그런 안타까운 사연이 이 책의 가치를 더하게 한다.
이책에는 두 사람이 나눈 대담과 편지들, 그리고 황광수의 글들이 담겨있다.
먼저 정여울의 시작글에서 몇 문장 인용하자면,
우리 사이엔 삼심이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만나자마자 절친이 되었다. 만나지 한 달도 안 되어서 별의별 비밀을 다 털어놓는 친구가 되었다. (9쪽)
이런 글을 시작으로 하여, 정여울에게 황광수 선생이 왜 필요한지 말하는 부분도 읽어보자.
인간에게는 가족의 사랑만으로는 갈무리되지 않는 결핍이 있습니다. (....) 가족이 아닌 또 다른 타인의 사랑과 우정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친구가 필요하고, 스승이 필요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제나 제 곁에서 ‘제 안의 또 다른 목소리’가 되어 저를 응원해주는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99쪽)
다행하게도 두 사람, 책을 읽어 아는 사람이다.
황광수의 책 『셰익스피어』를 읽었고, 정여울은 『헤세로 가는 길』, 『공부할 권리』, 『빈센트 나의 빈센트』를 읽었다.
두 사람은 같이 유럽여행을 했다. 사진작가인 이승원과 함께.
선생님과 나, 이승원 사진작가, 이렇게 우리 세 사람이 함께 두 달 동안 유럽여행을 하던 나날이었어요. 선생님은 셰익스피어에 관련된 책을 준비하고 계셨고, 저는 헤르만 헤세에 관련된 에세이 집을 준비하며 취재차 여행을 하고 있었지요. (73쪽)
이 이야기는 사진작가 이승원의 <황광수 선생님을 추억하며>라는 글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거론이 된다. (266쪽)
그렇게 셰익스피어에 관한 책을 황광수가, 헤르만 헤세에 관한 책을 정여울이 쓰게 되었는데, 마침 운이 좋게 나는 그 두 사람의 책을 읽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두 사람의 교분이 더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을 읽고 그동안 해오던 공부, 더 심층적으로 할 수 있었다. 그리스 고전에 대하여 : 셰익스피어에 대하여 : 문학 비평에 대하여 : |
철학과 픽션이 갈라섰다.
나에게는 철학과 픽션이 갈라선 것이 세상에서 가장 애석한 일로 보인다. (228쪽)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이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데, 그것을 갈무리해본다.
“나는 픽션과 철학이 갈라진 것이 세상에서 가장 애석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황광수 선생님은 D.H.로렌스의 문장을 들려주시며, 바로 그 지점이야말로 우리가 고대철학에서 발견해야 할 진정한 매력임을 일깨워주신다. 문학과 철학이 분리되어버린 것은 문학에게도 철학에게도 불행한 일이었다. 로렌스는 ‘문학적인 텍스트’와 ‘철학적인 텍스트’가 서로 엄격히 분리되어 버린 것이 근대 철학의 불행임을 일찍이 깨달았던 것이다. 과연 고대철학에서 니체까지는 철학적인 글쓰기 속에 문학적인 이야기와 문체가 들어있기도 하고, 문학적인 글쓰기 속에 철학과 문제의식이 담겨있는 경우도 많았다. (24쪽)
내가 밑줄 그은 '문체'는, 그 뒤의 문학적인 글쓰기에서 ‘문제의식’이란 말이 나온 것을 감안한다면, ‘문체’가 아니라 ‘문제’가 아닐까?
계속 읽어보자.
하지만 모든 학문을 이미 그 안에 품고 있던 철학 속에서 수많은 분과 학문이 갈라져 나오면서 철학은 ‘철학과’나 ‘철학자’의 담론으로 갇혀버리게 되었다. 그런 철학은 철학과나 철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며 누구나 철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권리와 자유야말로 철학을 더욱 풍요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아닐까. 철학적 글쓰기조차 문학적인 감수성과 상상력을 지닐 때 다 많은 사람에게 더 깊고 오랜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향연』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흥미로운 텍스트다. (24-25쪽)
그렇게 해서 플라톤의 저작인 『향연』이 그 가치를 드러낸다.
셰익스피어와 황광수
이 책에서 황광수와 셰익스피어의 인연이 소개되고 있다.
그것에 대한 글들을 여기 모아보았다.
선생님은 이번 여행애서 다른 곳은 몰라도 꼭 덴마크의 ‘크론보로(Kronborg) 성’은 꼭 가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크론보르 성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의 배경이 된 성으로 코펜하겐의 북쪽에 위치한 헬싱외르에 있다. 선생님은 자신의 아픈 개인사를 햄릿과 겹쳐 읽으신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고, 그래서 그곳에 꼭 가보고 싶다고 말한 것이었다. (267쪽)
(사진작가 이승원의 글)
이승원이 말한, 햄릿과 겹쳐 읽었다는 황광수 선생님이 아픈 개인사는 어떤 것일까? 그것에 대한 글은 따로 갈무리해놓았다.
[『햄릿』은 남의 일이 아닌, 우리들 이야기야.]
http://blog.yes24.com/document/15442802
황광수의 문학비평론
나는 외국 이론을 도입해서 작품을 해석하는 것보다는 ‘작품 자체를 살리는 비평’을 하고 싶었어. 오히려 지식이 작품을 제대로 읽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거든. 자신의 지식 체계에 문학작품을 적용하려고 하면 작품의 고유성을 살릴 수가 없으니까. (138쪽)
이건 비단 문학비평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인생관에까지 넓혀 적용할 수 있겠다.
자기의 생각체계를 남의 것으로 빌려서 세우면, 남의 이론에 자기 인생을 맞춰가는 일이 생긴다.
나는 이론이 아니라, 작품과 역사적 현실을 연관 지어서 텍스트를 읽는 데 집중하고 싶었어. (.........) 역사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새겨지는 어떤 것이겠지. 그 역사와의 연관성을 서술하는 것이 비평이어야 하지 않을까. (138쪽)
다시, 이 책은?
인문학은 저를 한없이 모자란 사람으로 만듭니다. 어떤 책을 읽을 때마다, 예전에 내가 안다고 믿었던 지식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와르르 무너짐이 싫지 않습니다. (6-7쪽)
위의 글은 내가 정여울의 책 『공부할 권리』를 읽고 쓴 리뷰 중 일부이다.
http://blog.yes24.com/document/8521228
그래서 나는 어떤 책이든지, 읽을 때마다 그렇게 내가 가진 지식이 와르르르 무너지는 게 좋다. 내가 살고 는 조그마한 새장에서 벗어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도 역시 그런 기쁨 누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