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속절없이 흘러간 시간을
위하여
- 『밥하는 시간』
이런 글
읽어보자.
이런 글 읽어보자.
이 책에 반한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다.
<압력밥솥 뚜껑을 열고 김이 막 오르는 밥을 나무주걱으로
살살 젓는다.
먹빛이 도는 자그마한 자기 그릇에
소복이 담는다.
현미잡곡밥에
들깨미역국,
두부구이,
김치,
식탁에 단정히 앉아 손을 모아
감사드린다.
한 입씩 먹는다.
현미밥은 오래 씹을수록 단맛이
난다.
밥이 다 넘어가면 국을
뜬다.
미역의 미끌한 느낌과 들깨의
고소한 향이 입 안을 가득 채운다.
현미유에 구은 따뜻한 두부의
말랑하면서도 쫄깃한 맛,
약간 신 김치의 톡 쏘는 알싸한
맛을 느끼면서 천천히 먹는다.>
(178쪽)
나는 이 글을 프린트해서 어딘가 붙여놓고
싶다.
특히 밥먹을 때 잘 보이는
곳에다가.
그래서 한 입 먹고,
이 글 한 번
읽고,
한 입 먹고 다시
읽고.
물론 이 글을 한 번 읽으면서 한 입 들어간 음식물을 천천히 씹는
거다.
프린트는 나중에 하기로 했기에,
식탁에 차려진
음식,
그 중에 밥을 한 입씩 넣고
씹어가면서 이 글을 떠올리며 먹어 보았다.
국물도 한 입
떠먹고,
반찬도 입에 넣고
음미하면서,
어느 반찬에서 어떤 느낌이
나며,
어떤 향으로 입안을
채우는지,
느껴보면서
먹어본다.
씹지 않고 허겁지겁 먹는 것은 저자가 말한
대로,
‘아마도 자동차에 연료를 넣는
의미 이상은 못될 것’이다.
그렇게 먹고 사는 삶은 자동차나
기계가 되는 것이니까.
(178쪽)
모든
글이,
모든 페이지가
아포리즘이다.
저자가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써놓은
기록들,
글자 한
자가,
한 단어가,
한 문장이 모두
아포리즘이다.
새기고
음미하고,
향기 맡으며 지니고 싶은
글들이다.
어떤 글은 맥락에 상관없이 새겨놓고 싶을
정도다.
헛살았다는 것은 알겠으나 제대로 사는 게 뭔지는 모호하기만
....(22쪽)
나는 삶의 의미를 ‘나 밖의’
것에서 찾는데
익숙했다.
자기 존재감이 없으니 타자를 통해
그것을 얻으려고 했다.(80쪽)
‘드러내는’
사람들의 공통적 특징이
있다.
자기 안의 샘물은
솟아나,
흘러야 한다.
그런데 샘물이 미처 차오르기도
전에 또는 샘물의 양보다 과도하게 자기를 드러낸다.
샘물의 바닥을 긁다가 안 되면
없는 샘물까지 상상으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런 욕망이 있는
것이다.
(80쪽)
많은 경우,
깨달음은
허망하다.
그 깨달음의 내용이 지극히 당연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151쪽)
늘 ‘저 너머’를 바라보다가 지금 여기,
‘이 세상’으로 온 거다.
비로소 세상 속에서 터져나오는
기쁨이 보인다.
하찮게 여겨,
보이지도 않던 것들이
보인다.
작고 여린,
세세한 생명들이
보이고,
그것들이 작지 않은 생명임이
보인다.
봄의 터져나오는 기쁨에 온몸을
담글 수 있다.
나 또한 그 숱한 생명의 하나로
이 지상에 함께 존재한다는 연대감에 깊이 안도할 수 있는 것이다.
(249쪽)
걷기에 대하여
큰돈을 들여 몇 박 며칠 히말라야 트래킹의 '심오한' 경험을 하고 와서도 여전히 일상을
걸을 수 없다면,
그것은 그저
소비다.
(127쪽)
페미니즘,
이런 발언 어디서나
듣는단다.
처음 마을에 드나들 때 사람들이 물었다.
“뭐 하세요?”, “
남편은,
애들은요?”
(
……)
처음 만나면 사람들이 내게 제일 먼저 묻는 말이
“뭐 하냐?”와 “남편은?”이었다.
(67쪽)
이 글 어디선가 읽었던 듯 기시감이 든다.
바로 며칠전에 읽었던 책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서다.
<몇년 전 버지나아 울프에 대해서 강연한 적이
있다.
강연 후 질문이
이어졌고,
청중 가운데 많은 사람은 울프가
아이를 낳아야 했을까 하는 질문을 가장 흥미롭게 여기는 듯 했다.>
(14쪽)
그렇게 여자가 혼자 있다 싶으면 사람들은 그 이유가 궁금해지는
모양이다.
다시 이
책은?
이 책의 제목은 『밥하는 시간』이다.
밥하는 시간이 갖는 의미,
그 시간이 주는 의미를 천착하는
저자의 의도는 충분히 전달이 된다.
그런데 독자들이 제목만 보고 이
책을 ‘밥’에 한정해서 생각할까봐 조바심이
난다.
그러면
안되는데...
이 책은 밥을 넘어선 일상의 모든 순간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우리가 그냥 시간이 아깝다고 얼른 해버리고 지나가는
일들, 얼른 해치워버리고 다른 더 귀중한 일에 매진한다는
의미에서 하찮게 생각하는 일조차,
삶의 한
부분,
아니 그렇게 말하면 안
되겠다.
그런 일조차 삶의 한 부분이 아닌
삶 자체인 것이다.
청소기를 돌리면, 청소기는 일을 하고,
나는 그 청소기를 사용함으로 남는
시간을 더 좋은데 사용할 수 있다,
는 차원에서 집안에 청소기를
들여놓고 쓰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청소기를 사용한다면,
청소는 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청소기 대신 빗자루를 들고 방을 쓸고
닦는다면?
어떤 일이 생기게
될까?
저자는 그런 시간을 이렇게 말한다.
<비로 쓸면 천천히 내 속도대로 일을 하게
된다.
내 몸을
느끼고,
방바닥을
느낀다.
청소와 청소하는 내 몸이 분리되지
않는다.
청소를 하면서 나 자신이 맑고
단단해진다.
단정해진 방에서 나 또한
단정해진다.>(132쪽)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살아오는 모습이
보인다.
다시 허물고 지어야 할 내 삶의 모습이
보인다.
인생 자체가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순간의 모습이 마치
남의 인생을 사는 것처럼,
그래서 나와는 별상관 없는 것처럼
그냥 스쳐 지나간 시간이 얼마나 될까?
그것도 나의 삶인 줄도 모른
채. 나의 소중한
삶 자체인 것을 모르고 남의 일처럼 무심히 넘겨버린 것이다.
더 들어보자.
<일상의 여러 가지 일들,
이를테면 차를 마시거나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할 때,
청소를 하거나 마당의 풀을 뽑을
때 내 몸과 함께 있으면 일상의 순간순간이 빛난다.
지루한 일이 되기보다 깨어있는
순간들이 된다.
일상적 행위를 습관적으로 하는 것과 그 의미를 자각적으로 알고 하는 행위는 하늘과 땅
차이다.
자각적 앎을 통해 새로운 창조가
가능하다.
일상 행위의 의미를 자각적으로
알고 하는 행위,
이것을 통한 자기 내면의 고양이
일상의 성화(聖化)다.>
바로 모든 순간에 집중하는 게,
심지어 밥을 먹는 시간도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 바로 일상의 성화인 것을.
이제 알게
된다.
해서 이제
앞으로나,
잘,
인생의 많은 시간들을 잘
바라보고, 내 것을 결코 흘려보내지 않고, 내 것으로 알고 잘 살아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