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
이
책은?
이 책의 제목은
『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인데,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집이다.
저자는 프란츠
카프카,
체코 출신
소설가이다.
우리에게는
『변신』으로 유명하고,
또 이런 경구로 잘 알려져
있다.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이 책의
내용은?
카프카의 소설
7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제목은 다음과
같다.
<판결>,
<법
앞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시골 의사>,
<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
<어느 개의 연구>,<굴>
카프카의 소설은
진지하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화자의 입장이
늘 진지하다.
이야기 내용도
그렇고,
등장인물들 간의 대화도
진지하다.
그 대화에 농담이나 웃음이 들어갈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설렁 진행되고 있는 소설 속
상황이 뭔가 잘 못 되었더라도,
그래서 우리 생각에는 뭔가
이상하다,
고 느낄 때에도 소설은 진지함과
긴장감이 넘쳐흐른다.
예컨대
<판결>에서 주인공 게오르크 벤더만과 그의 아버지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를 보면, 얼마나 진지한지 대화속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분명
드는데도 그걸 대화 판단의 기준으로 들이댈 수가 없다.
‘잠깐만,
여기 뭔가
이상하다’고 말할 틈새,
아니 생각할 틈새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독자를 끌고 가다가 끝에
가서 게오르크의 아버지가 판결을 내리는 부분에서는 한층 더 진지해진다.
“나는 지금 네게 익사형을 선고한다!”는 판결에 독자들은 의아해 하는데,
정작 그 판결의 당사자는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그는 난간을 펄쩍 뛰어
넘어”
가는 것이다.
또한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제목의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했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어떤가?
원숭이 시절을 보고해 달라는
학술원의 요청에 응해서 보고하는 형식의 이 소설 역시 분위기는 시종일관 진지하다.
각고의 노력으로 유럽인 평균
수준의 교양을 습득한 주인공이 하루 일과 -
인간 앞에서 공연하는
일-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조련이 덜 된 어린 암컷
침팬지와 함께 지내야 하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그 상황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는가?
“그 아이의 눈빛에는 조련 때문에 혼란에 빠진 짐승의
정신착란이 보입니다.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자는
저뿐이고,
저는 그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43쪽)
견딜 수 없는 것은 비단
원숭이뿐만 아니다.
이 소설집의 다른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동물 주인공,
예컨대 <어느 개의 연구>에 화자로 등장하는 개 역시 “나는 직관 덕분에 다름 아닌 학문을 위해 자유를 그
무엇보다도 높이 평가하게 된 것 같다.
오늘날 추구하는 그런 학문이 아닌
다른 학문을 위해.
궁극의 학문을
위해.
자유!
물론 오늘날 허용된 자유는
발육부진 상태다.”(139쪽)라고 현실을 파악한다.
거기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괴로움.
실상 그 괴로움을
원숭이보다도,
개보다도 먼저 느끼는 건 저자
카프카일 것이다.
다시, 이
책은?
카프카는
『변신』으로 유명하고,
또 이런 독서에 관한 경구가
인구에 회자된다.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그렇다면 책의 하나인 이 책
-『가수 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
-
역시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하는데....
이 책을 읽기 전에 읽었던 다른
소설 『언어의 7번 째 기능』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노인은 마치 카프카의 소설에서 튀어나온 사람처럼 두꺼운
천의 잔줄무늬 양복을 입고 있었고 울 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
(『언어의 7번 째 기능』,
로랑 비네,
영림카디널,
394쪽)
‘카프카의 소설에서 튀어나온 사람처럼’이란 의미가 무엇일까?
로랑 비네가 말한 것처럼
옷차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카프카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느끼고 괴로워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은 아닐까?
그 주인공들이 괴롭다는
것은,
현실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은 분명
내면에 얼어붙은 바다가 깨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