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아픔을 나누었기에 더 돈독한 엄마와 딸이 될 수 있을거야] 초등학교 6학년 때였던가? 같은 반 친구 중의 한명이 복도에서 어떤 아주머니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왜 그럴까?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새엄마라고 했다. 한참 민감한 시기에 아버지의 재혼과 새롭게 생긴 엄마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 친구의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되었다. 나중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친구때문에 새엄마가 무척 힘들어 했는데 나중에는 다 잘되었다는 소리만 들었다. 당시 소리를 지르는 친구와는 달리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면서도 웬지 새엄마는 친엄마만큼 사랑해 주지 않을 것 같은 막연함 불안감이 들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 마음 속에는 새엄마에 대한 이미지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콩쥐 팥쥐의 팥쥐 엄마나 신데렐라의 새엄마를 떠올리게 되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도 일종의 편견이고 설정일 뿐이다. 이제는 한 반에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재결합 가정이나 한부모 가정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 해체되고 재결합 되는 가정이 많아질수록 사회에서도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아이들 역시 왜??라는 의문대신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테도가 필요하겠지. 콩쥐 엄마와 팥쥐 딸이라는 설정은 그동안 은연중에 새엄마를 팥쥐 엄마로 생각하던 편견에 반한다. 이제는 누가 누구라는 설정보다는 아이들보다는 훨씬 힘이 강한 어른들에 의해서 해체되고 결합되는 가정에서 아이들이 보이는 태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어른들 또한 아이들만큼 힘겨운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한 이해 역시 필요하다. 이 책에 하수는 어찌 보면 새엄마를 늘 골탕먹이는 팥쥐같은 딸이지만 그만큼 아이가 갖는 큰 거부감과 고통의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하수에 비해서 늘 받아들이고 눈물을 훔치는 새어머니는 콩쥐같은 엄마같다. 그렇지만 이런 엄마 역시 예전에는 새할머니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하수만큼 못된짓은 했던 팥쥐같은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둘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서로의 아픔을 알기에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과정이 함께 하는 이야기. 실제로도 늘 토닥거리는 게 엄마와 딸 사이인데 이렇게 아픔을 함께 나누고 나면 이들은 더 돈독한 엄마와 딸이 되지 않을까? 답답하고 묵직하지 않게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엄마와 하수가 서로의 마음을 묵히지 않고 풀어내는 과정이 함께 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