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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조각들
연여름 지음 / 오리지널스 / 2025년 11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뭔가 하기는 해야겠는데 뭘 해야 좋을지 모를 때는 그게 유일한 방법이나 다름없잖아요.
원점이 내가 아는 단 하나의 방향이라면.
낯선 작가의 낯선 작품. 별 기대 없이 읽었다가 흠뻑 빠져들었다. 두 번째 발견한 SF 작가. 연여름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두어야겠다.
SF 소설류를 좋아하지 않았다. 미래와 과학 어딘가에 있는 차갑고 어렵고 요란스러운 미래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라는 것이 SF에 대한 첫 기억이었다. 그러다 천선란 작가의 작품을 만난 후, SF의 맛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SF 작품(특히 천선란 작가의 작품)은 피하지 않고 읽는다. 사실 책 어디에도 SF라는 글자를 만날 수 없었다. 소설이라는 생각 하나만 가지고 읽기 시작했는데, 재미있었다. 천 개의 파랑이 생각나는 따스함도 있었다. 알고 보니 밀리의 서재에서 만든 종이책이었다니...!
주인공 뤽셀레가 한 집의 청소부 면접을 보는 것으로 책은 시작한다. 이래저래 깐깐하게 보는 면접자는 집사이자 매니저 그리고 집 주인 소카의 이모인 위나다. 면접 내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담배와 같은 느낌의 기호식품 베이퍼셀을 하는지와 동물을 키우는지다. 둘 다 안 했던 뤽셀레는 결국 청소부로 취업을 한다. 사실 뤽셀레는 이 집에서 오래 일할 생각이 없다. 딱 10개월만 일해서 돈을 벌면 된다.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 청소부 자리에서 생각보다 오래 일한 사람이 드물었다. 오히려 뤽셀레보다 전문적이고, 체력도 좋았던 사람들이 번번이 몇 달 만에 잘렸단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주인인 소카의 작품을 봤기 때문이란다. 그렇기에 청소부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소카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고용된 뤽셀레는 요리사인 바사, 설비담당인 에르완(완)과 인사를 나눈다. 바사는 10개월을 버티면 멋진 케이크를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할 정도로 뤽셀레가 오래 일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까칠하기만 한 소카는 이 집의 주인이자 화가다. 그는 중증 폐 질환 및 호흡기 질환을 앓고 있기에, 대기질이 무척 중요하다. 그래서 뤽셀레의 면접에서 두 가지를 체크한 것이었다. 문제는 예술가로 살기 위해서는 인핸서(약하거나 망가진 부위를 인공 기능으로 대체하는 수술을 받은 사람) 수술을 받지 않은 오가닉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폐 질환을 앓고 있는 소카는 예술가로 살기 위해 수술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반면에 과거 파일럿으로 일했던 뤽셀레는 사고로 인해 흑백증을 앓게 되지만 잠깐 나타났던 현상인지라 아내 로레인에게 그 사실을 숨겼다. 아내와 같이 여행을 떠났던 곳에서 플라이모 사고를 당한 뤽셀레는 그렇게 현장에서 아내를 잃고 직장마저 퇴직하게 된다. 결국 다시 파일럿으로 일하고 싶은 뤽셀레는 인핸서 수술비를 마련하러 소카의 집에서 청소부로 일하게 된 것이다.
조금씩 소카와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 둘. 소카 역시 뤽셀레에게 마음을 연다. 사촌이자 위나의 딸인 마리안은 소카와 앙숙이다. 여행은커녕 외출도 자유롭지 않은 소카에게 자신이 다녀온 곳을 일부러 얘기하면서 약을 올리기도 한다. 그런 마리안이 방학이라 긴 시간을 소카의 집에서 보내기로 하는데, 혼자가 아니라 친구를 데리고 온다. 이든이라는 남자인데, 특이한 것은 소카처럼 산소 헬멧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기다 이든은 적극적으로 소카에게 다가온다.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에 소카는 이든에게 빠져들게 되고, 라타네드로 부터 의뢰받은 거액의 작품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든과 마리안이 돌아갈 날이 얼마 안 남자, 모두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잠깐 휴가를 받은 뤽셀레는 돌아오는 길에 이든과 마리안이 길에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근데 예상치 못한 장면을 보게 되는데...
늘 자기만에 세상에 빠져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살았던 소카와 그런 소카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고용인들. 예기치 못한 만남을 통해 소카는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계기가 되지만, 그 또한 소카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뤽셀레의 눈을 통해 예술가 소카의 삶과 모습이 밖으로 드러난다. 또한 그와 함께 뤽셀레의 과거의 상처도 드러나기 시작한다. 다른 듯하지만 상처를 가지고 사는 소카와 뤽셀레의 모습을 통해 진한 여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짜인 틀 속에서의 예술가로 사는 삶과 예술을 포기하고 평범한 일상을 살고 싶은 소카의 모습을 통해 여러 생각을 해보게 된다. 마지막까지 진한 감동을 주는 빛의 조각들. 덕분에 큰 소득이 있었다면, 연여름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는 것과 두 번째 SF 작을 만났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