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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평점 :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책을 읽으며 제목의 의미를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 해방의 의미가 정말 이념적인 의미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버지의 해방은 바로 죽음이었다. 평생을 소위 빨치산, 사회주의자로 살았던 아버지의 해방은 이념적으로 자유를 누린 때가 아닌 죽음이었다니...! 전봇대에 부딪쳐 병원으로 옮긴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딸인 고아리는 고향 구례의 반내골로 향한다. 뭐 하나 낯설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가운데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들이 등장한다. 동네 장례식장의 황 사장을 비롯하여, 아버지의 동창이자 삼오 시계방 사장인 박한우 선생, 아리의 동창이지만 아버지와 더 이념적으로 친구같이 지냈던 학수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10살 되던 해 감옥에 가게 된 아버지는 6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다. 그 사이 아리는 부쩍 성장했고, 아버지와의 거리감은 아버지가 사망하는 날까지 좁혀지지 않았다. 이념적 동기인 어머니와의 결혼. 그리고 고문으로 성 불구자가 된 아버지가 한약을 먹고 기적적으로 낳게 된 고아리. 그리고 장례식이 진행되면서 밝혀진 아버지의 전처와 어머니의 전 남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사회주의자였지만, 노동과는 평생 친하지 않았던 아버지는 문자로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다. 책에서 하라는 대로 파종을 하고, 김을 맸기에 매번 농사를 망치고 말았다. 작은 논 조금 메고 힘이 들어 주저앉아 소주 한 병을 먹고 쉴 정도로 아버지였으니 말이다. 그나마 엄마 덕분에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았긴 하지만 말이다. 늘 인민을 위하고, 바른 소리 하기만 했던 아버지는 작은아버지와 평생 척을 지고 살았다. 그리고 작은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이유 때문에 육사에 떨어진 큰 오빠의 사연을 비롯하여 할아버지의 사망, 아버지와 연관되어 있던 친척들 간의 소소한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드러난다. 처음에는 아버지에 대해 좋지 않게 여겼던 아리는 조문을 위해 오는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통해 조금씩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찾는다. 가장 어린 친구라 할 수 있는 10대의 아이는 아버지와 담배 친구 사이였다. 학교 담벼락에서 담배를 피우다 아버지를 알게 된 아이는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했었다. 그런 아이의 마음을 읽고 그와 종종 담배를 주고받았던 아버지. 몇 달 후 검정고시에 합격하면 소주를 사주겠다는 약속을 안 지키고 세상을 떠났다는 말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이를 통해 아리는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마주한다.
"민족이고 사상기고, 인심만 안 잃으먼 난세에도 목심은 부지허는 것이여."
이념은 반대라도 같은 마을 사람들이기에 서로 돕고 살았던 그네들의 이야기는 책을 통해 잔잔하게 풀어진다. 남의 일이라도,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더라도 앞장서서 도와줬던 아버지인지라 그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한 발걸음은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올 것 같지 않았던 작은아버지의 등장은 그동안 쌓였던 형제간의 반목이 눈 녹듯 사라지는 뭉클한 장면이었다.
여전히 이념으로 갈린 이 나라. 홍범도 장군의 일만 보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전쟁 중인 나라가 맞다. 책을 읽고 나니 무엇이 맞느냐고 묻는다면 글쎄...라는 말 밖에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책 속에 등장한 아버지 고상욱의 삶은 옹호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이 따뜻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