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쓴다는 건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글이 뚝딱 써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혜정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부신 날은 9편의 단편소설이 담겨있는 단편소설집이다. 눈이 부신 날이라는 제목은 9편 중 한 편의 제목으로, 이 작품이 표제작이라 할 수 있다. 각기 다른 상황 속에 처해있는 주인공들의 이야기 속에는 뭔지 모를 따뜻함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다들 자신만의 아픔과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 11세에 교통사고로 지체 1급 판정을 받은 작가가 보조 기구에 의지해 한자 한자 적은 글이 작품이 되어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책 안에는 각가지 장애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주인공들이 많았다.
어린 시절 열병을 앓은 후 청각장애를 갖게 되었지만 헤비메탈을 즐기는 주인공 수연. '귀가 안 들리는 데 어떻게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던 차에, 쿵쿵 울리는 진동과 비트로 음악을 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놀랐다. 작품 속에는 그런 그녀가 꼭 듣고 싶던 희귀 음반을 구하는 이야기와 함께 남자친구의 친구들로부터 받은 실제적인 대우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담담하게 친구인 지우에게 편지 형식으로 전했지만, 그녀가 오롯이 겪어냈을 상처들이 느껴져서 참 안쓰러웠다.
뇌종양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다시 재발하고 전이되어 고통을 겪던 장누리는 뇌를 비롯하여 제 기능을 못하는 장기들을 이식받고 사이보그가 된다. 건강은 되찾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기 힘들어진 누리. 그렇게 그녀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기억에 남는 작품은 역시 표제작인 눈이 부신 날이라는 작품이었다. 신인배우로 시상식에서 상을 받게 된 핫한 여배우 지혜와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던 친구이자 조명 스텝 규호의 이야기였다. 어려서부터 연기자가 되고 싶었던 지혜 주변에는 그녀의 꿈을 비웃거나 안될 거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규호만은 그녀의 꿈을 응원해 주었다. 다른 학교로 진학하게 되면서 둘은 예전만큼 자주 만날 수 없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청소년 작품의 오디션을 준비 중인 지혜에게 응원의 말을 건넸던 규호. 오랜 시간이 흘러, 그녀는 드디어 배우로 인지도를 갖게 되었고, 신인상을 수상하던 날 둘은 한 장소에서 만났다. 하지만 지혜에서 신인배우 성이린이 된, 너무 눈부신 그녀에게 차마 다가가서 인사를 건넬 수 없었던 규호는(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 봐도, 배우인 지혜에 비해 자신의 처지가 보잘것없이 느껴지기도 했기에...) 멀리서나마 지혜를 축하했다. 그리고 그렇게 끝날 것 같았던 이야기는 다시, 지혜의 목소리로 펼쳐진다. 과연 지혜는 규호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니 지혜는 규호를 알아봤을까? 영화처럼 가슴 설레는 둘의 이야기를 읽으며 정말 눈이 부신 하루였겠다 싶었다. 솔직히 둘의 관계가 어떻게 이어질지 너무 궁금할 정도였다.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SF적 요소들이 담겨있어서 더 흥미로웠지만, 그럼에도 모든 이야기에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담겨있었다. 어느 것도 편하게 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였다면, 온통 어둡고 음습한 이야기만 펼쳐놓지 않았을까라는 내 생각이 부끄러울 정도로 예쁘고 건강한 이야기가 많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고 건강하고 재미있기도 한 작품들 속에서 나 역시 밝아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