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과거의 선수인 것이다.
달릴 수 없는 선수는 선수가 아니다.
하코네 러너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마라톤 러너로 성장한 라이벌.
모기는 그이 등을 쫓아가던 입장에서 그저 방관할 뿐인 입장으로 바뀌었다.
사이다 전개로 유명한 이케이도 준의 새 장편소설을 만났다. 이케이도 준의 소설을 처음 만난 건 드라마로도 제작된 한자와 나오키였다. 주인공 한자와 나오키가 불의에 굴하지 않고,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정도를 가며 은행원으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실제적이지만 또 감동적으로 그려졌었기에 그 이후 작가의 작품에도 관심이 생겼다. 사실 이케이도준의 소설의 내용 전개는 비슷하다.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는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횡포와 은행권의 장난질, 각종 배신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은 어려움을 이겨낸다는 이야기다. 물론 한 번의 위기로 기업의 어려움이 끝나고 승승장구하는 것은 아니다. 계속 어려움은 찾아오고, 그때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어려움을 타개해가는 과정이 통쾌하게 그려져 있다. 이번 작품은 100년의 전통을 가진 일본 전통 버선을 만드는 고하제야의 이야기다. 4대째 이어온 버선 제작 업체인 고하제야는 갈수록 수요가 줄어가는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사장인 미야자와 고이치는 가업임에도 사양산업이라 할 수 있는 고하제야를 아들 미야자와 다이치에게 물려주는 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들이 다른 회사에 취업할 때까지만 임시 직원으로 회사에 둔다. 그날도 백화점 매장 축소로 담당자와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딸의 부탁으로 신발을 사러 갔다가, 기묘한 모양의 신발을 발견한다. 비브람사에서 나온 파이브 핑거스라는 신발인데, 착용감이 좋고 모양이 특이해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착용감을 말하자면, 전통 버선인 다비 역시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던 미야자와는 우연히 사이타마 중앙은행의 융자 담당 사카모토 다로와 이야기를 나누다 과거 육상 선수로 활약했던 지인 아리시마를 소개받는다. 과거 고하제야에서 만들었던 러닝화인 육왕을 토대로 다비와 러닝슈즈를 합쳐 고하제야 만의 특별한 러닝화를 개발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자금이다. 이미 사양산업이 되어서 매출이 감소하고 있는 형편에,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고 만들기 위해서는 적잖은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상무이자 경리 담당인 도미시마 겐조(겐 씨)는 미야자와의 의견에 반대한다. 쉽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봉제와의 니시이 후쿠코와 야쓰다 도시미쓰, 아리시마 등의 도움으로 기존 육왕의 새로운 버전을 만든다. 문제는 육왕의 실적에 대한 지표가 없다는 것이었고, 실제 착용을 통해 품질을 개선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편, 육상 유망주였던 다이와 식품의 모기 히로토는 경기 중 부상을 입는다. 라이벌이었던 아시아 공업 게즈카 나오유키는 승승장구하는데, 부상으로 앞으로의 선수 생명조차 위태한 지경에 처한다. 대기업 아틀란티스의 슈피터인 무라노 다카히코는 이런 모기의 상황이 안타깝다. 주법을 바꾸지 않으면, 회복되어도 부상이 계속 이어질 수 있는 상황에 처한 모기에게 더 이상의 후원을 통한 광고효과를 얻기 어렵겠다는 아틀란티스 영업부장 오바라 겐지는 무라노에게 더 이상 모기를 지원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다. 당장 주법을 바꾸려면 새로운 러닝화가 필요하다. 그 시점에 미야자와는 주법을 바꾸려는 모기에게 육왕을 제공하고자 하지만, 감독인 기도 아키히로는 탐탁지 않아 하고 모기에게 신발을 전달하지 않는다. 다행히 신발은 모기에게 전달되지만, 듣보잡인 업체의 신발을 믿을 수 없었던 모기는 방 한편에 육왕을 처박아 둔다.
융자 담당 사카모토가 타 지점으로 발령을 받게 되자, 가뜩이나 자금 융통이 어려운 고하제야는 어려움에 빠진다. 그런 와중에 러닝화 밑창 때문에 고민인 고하제야에게 신소재지만, 기업의 파산으로 사장된 특허 실크레이 기술을 개발한 이야마 하루유키를 소개해 주는 사카모토. 덕분에 가볍지만 내구성이 좋고, 친환경 소재인 실크레이 덕분에 육왕의 질은 크게 업그레이드된다. 하지만 자금의 문제에 부딪친 데다, 기계마저 돌릴 수 없는 지경이 된 고하제야는 육왕을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고 만다. 그때 대기업인 펠리스에서 자회사로 들어오라는 솔깃한 제안을 하는데...
중소기업은 참 힘들다. 육왕 속 이야기가 실제적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케이도 준의 손에서 탄생하는 중소기업의 이야기는 수난에 가깝다. 물론 해피엔딩으로 극이 이끌어지긴 하지만, 대기업에게 어렵게 개발한 기술력을 빼앗기도 도태되는 중소기업이 얼마나 많은가? 러닝화 천 회사 다치바나 러셀이 대기업 아틀란티스의 회유에 고하제야를 배신하는 장면 또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선택이라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이케이도준의 소설에는 특히 은행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은행원 사카모토의 말처럼 은행은 미래의 성장 가능성보다는 과거 실적에 대한 평가에 따라 자금을 대준다는 사실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신소재를 발명했지만 자금 때문에 파산한 실쿨이나, 새로운 신발을 만들었지만 자금이 없어서 생산장비를 구매할 엄두가 안 나는 고하제야, 회사에 광고효과가 없다는 이유로 바로 내치는 아틀란티스 등 다양한 기업의 생리를 통해 사업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다시 한번 마주할 수 있었다. 소설처럼 중소기업이 자신의 권리와 기회를 빼앗기지 않고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진정한 자부심이란 간판도 직함도 아니야.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갖는 거지.
회사가 크든 작든, 직함이 근사하든 근사하지 않든
그런 건 관계없어.
자신에게서, 자신이 하는 일에서
얼마나 책임과 가치를 찾아낼 수 있느냐 하는 게 중요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