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 (양장) 소설Y
천선란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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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다는 건 세상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 내는 것이라고 했다.

얼마 전 SF 소설 천 개의 파랑을 읽으며 새로운 재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사실 SF소설 하면 공상과학적 요소가 많기에 실제와 동떨어졌다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독특하지만 인간미 넘치는 소설이었어서 천선란이라는 작가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 세 번째 만나는 그녀의 소설 나인은 천 개의 파랑 만큼이나 독특했다.

이 책의 제목인 나인은 주인공의 이름이다. 고등학생인 나인과 현재 그리고 미래는 절친이다. 우연한 계기로 친구가 된 이들은 참 많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통하는 것이 있다. 이모인 지모(유지이모를 줄여서 지모라고 부른다.)와 사는 나인, 엄마와 동성의 애인과 사는 미래, 사이가 좋지 않은 부모님 사이에서 고민하는 현재. 서로에게 비밀이 없기로 약속을 한 셋이지만, 나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큰 출생의 비밀이 있다. 그리고 그 비밀을 깨닫게 된다.

그곳은 1963년 사료공장이 있던 자리였다. 폐기물을 불법으로 땅에 묻었고, 그렇게 그 땅은 죽은 땅. 불모지가 되었다. 그저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그런 땅에 화원을 짓겠다고 한 여자가 나타난다. 그녀는 매일같이 땅을 갈고 폐기물을 끄집어 냈다. 그렇게 한 달 넘게 땅을 파헤친 그녀는 그곳에 식물을 심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브로멜리아드 화원이 되었다. 지모의 손을 거치면 죽어가는 식물들이 생기를 되찾기도 하고, 그녀가 키웠던 식물은 죽지 않는다. 결혼도 하지 않고 나인을 키우는 지모에게 사람들은 잔소리를 한다. 그런 소리가 듣기 싫은 지모는 때론 괴상한 소리를 내기도, 큰 소리로 웃거나 울어서 그 자리를 모면한다. 나인은 그런 지모가 안타깝고, 한 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인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이상한 아이가 보이기도 한다. 승택이라는 아이는 나인에게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 식물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황당한 이야기를 들은 나인은 지모에게 승택의 이야기를 농담 삼아 하지만, 나인의 이야기를 들은 지모는 표정이 바뀐다. 그리고 그녀는 나인의 출생의 비밀을 이야기해준다. 그녀가 식물인 누브족이라는 이야기 말이다.

과거 타 행성에 살던 누브족은 지구로 이주를 해온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손에서 새싹이 자라는데, 그 새싹을 땅에 심게 되면 거기서 다시금 생명이 자라 나인과 같이 될 수 있다. 물론 10개의 새싹 중 실제 생명을 가지고 자라는 경우는 3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누브족으로 나인과 같은 생명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는 지구상에서 나인과 승택 이후로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죽고 나면 누브족의 명맥이 끊길 수 있기에, 새로운 터전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도래하게 되는데...

외계인 누브족인 나인의 이야기와 실종된 사람 원우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생명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많은 것이 풍요롭고, 그래서 결여가 없는 현대 우리의 삶 속에서 소중한 무언가를 지킨다는 것은 조금은 어색할 때가 있다. 그래서 대체할 것들을 쉽게 찾아내는 건 아닐까?

천선란의 소설은 그런 울림이 있다. 공상과학적이고, 뭔가 떠 있는 미래의 이야기 같지만 그 안에 마음을 움직이는 따스함이 있다. 나인 또한 그런 소설이다. 한동안 캄캄한 밤이되면 파랑색 빛이 가득한 그곳이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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