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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을 범하다 - 서늘하고 매혹적인 우리 고전 다시 읽기
이정원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http://postfiles2.naver.net/20101117_257/nayana0725_1289979495541ynilo_JPEG/45919_S58_143540.jpg?type=w2)
"도련님, 벗으시오."
이 도령이 하는 말이, "모든 일은 주인을 따라 한다고 했으니, 네가 먼저 벗어라."
"도련님 말씀이 옳소.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씀이니 도련님이 먼저 벗으시오."
"춘향아, 좋은 수가 있다. 수수께끼를 하여보자. 지는 사람이 먼저 벗기 하자."
"그럽시다. 도련님이 먼저 하오."
_ 이명선 고사본 <춘향전>에서 , <전을 범하다> 240쪽
영화 <방자전>을 보고는 "이 영화, 참 재미난 발상전환이네."라는 생각을 했었다. 열녀의 상징, 영원한 사랑의 상징인 <춘향전>을 '방자'의 시각으로 뒤틀어 어쩌면 이리도 통속적이고 발칙하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 참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절을 버리느니 목숨을 끊겠다던 춘향은 사실은 방자와 놀아나고 있었고, 춘향을 만난 이후 상사병에 걸려 춘향만 바라보았다는 몽룡은 향단이는 물론 수많은 여자를 후리고 다녔으며, 탐관오리를 척결하겠다던 암행어사 출두 장면은 사실은 춘향과 몽룡, 변사또가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니.
그런데 어쩌면 이 <방자전>의 발상이 진짜일지도 모르겠다. <춘향전>, <토끼전>, <장화홍련전>, <심청전> 등 단 한번도 의심의 눈길로 보지 않았던, 어쩌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리 고전을 뒤집어 본 책 <전을 범하다>에는 영화 <방자전>과 같은 발칙한 상상들이 가득차 있다. '고전'이라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포스에 눌려 어린 시절부터 배운 그대로 '권선징악'의 논리만으로 해석해야 옳은 것이라고 교육 받아온 우리들에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고전 뒤집어 보기를 권한다.
총 13편의 우리 고전 다시 읽기를 시도한 저자는 고전을 '권선징악'의 논리로만 읽어내려가는 것 부터가 잘못이라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배우고 공부했던 것들이 사실은 누군가의 의도된 해석이었으며, 잘못된 교육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한 편 한 편 서로 다른 고민과 숨결을 지닌 그 많은 고전소설들에 권선징악이라는 '계몽의 스티커'를 붙여버렸던 것은
창피했던 봉건을 뛰어넘어 황급히 근대로 가고자 했던 우리 사회의 치열한 자기 갱신의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무리 폭력적이고, 무지한 일이었다 할지라도 바로 그런 독서의 방식 자체가 우리의 고전 읽기의 출발점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_ 프롤로그 중에서
물론 그렇다고 여기 이 책에서 저자가 내놓은 해석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전을 범하다>는 단지 우리 고전을 '이렇게 읽어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을 뿐인 것이다. 문학이라는 것이 저마다의 가치를 가지고, 작가의 다양한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을 권성징악이라는 천편일률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려가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얘기다.
예를 들면 이렇다. <춘향전>의 몽룡은 욕정을 이기지 못한 남정네에 불과하고 춘향은 그런 몽룡과 월매의 거래를 성사시켜주는 기생일 뿐인 열녀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의 고전이라는 것이다. 또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져 효의 상징이 된<심청전>의 심청은 어쩔 수 없이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게 만든 공동체 구성원에 의한 살인을 담고 있는 내용이고, 사악한 계모라는 끔찍한 탈을 쓴 <장화홍련전>의 계모는 사실 가부장제라는 진범을 감추기 위한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던 그대로 심청은 스스로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버릴만큼의 효녀는 아니었고, 장화홍련전의 계모는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의 악독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세상의 악한 사람들을 처벌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구했다는<홍길동전>에 대한 해석은 더욱 흥미롭다. 홍길동은 스스로를 의병이라 여겼지만 홍길동이 깨뜨려야 할 거짓과 악이 율도국에는 없었고, 오히려 홍길동의 침략 전쟁으로 무고한 군사들이 죽었고, 정당한 통치 질서가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서자라 설움 받던 홍길동이 부인을 여럿 두고 자식들은 그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지위를 부여 받은 이 책의 결말만 보아도 우리가 얼마만큼 홍길동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남의 간을 당당하게 요구하는<토끼전>은 또 어떤가? 병에 걸린 용왕의 딸이 토끼의 간을 먹어야만 살아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용왕은 별주부를 육지로 보내 토끼를 잡아들인다. 자신의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무고한 토끼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것이 말이 되느냔 말이다. 게다가 <토끼전>은 다양한 결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간을 내놓을 것을 요청하는 별주부에게 토끼가 별주부의 아내를 자신에게 보내 수청을 들게 하고, 수청을 든 별주부의 아내는 토끼를 사모하게 된다. 토끼가 수궁을 빠져나가자 상사병에 걸린 별주부의 아내는 죽어버리고 사람들은 이를 별주부에 대한 사랑으로 여겨 열녀문을 세워준다. 지금의 막장 드라마에 맞먹는 스펙타클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우리가 '권선징악'의 논리로 배우고 있는 그 고전이라는 것이다.
고전이 왜 고전인가.시대를 뛰어넘어도 그 시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고, 무수한 변주가 가능하며, 읽는이가 저마다 처한 상황과 처지에 따라 제각기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탄탄한 텍스트라는 점에 있어 고전이다. 수많은 논란에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여전히 읽히고 있는 건 그의 텍스트가 그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고, 저마다의 서로 다른 해석이 문학계에 자양분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고전은 어떠한가? 그동안 지나치게 천편일률적으로 해석해오지 않았는가? 우리도 이제 그동안 배운 것의 틀에서 벗어나 저마다의 시각으로 고전을 다시 읽어보자. 이 책은 그 첫걸음을 떼어줄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