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 350년 동안 세상을 지배한 메디치 이야기
김상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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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피렌체, 메디치 은행을 연 조반니 디 비치는 고민이 많았다. 당시 피렌체에는 이미 알비치, 카포니, 우차노 등의 가문이 은행 업계를 평정하고 있었고, 후발주자로 은행업에 뛰어든 메디치 가문은 뭐 하나 크게 내세울 것 없는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조반니가 생각한 것은 바로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 되어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반니는 발다사레 코사라, 후에 요한네스 23세라는 법명을 쓰게 되는 교황을 만나게 된다.

 

조반니는 '고객에 대한 무한한 신뢰'하나로 요한네스 23세와의 거래를 시작했고 그를 지지했다. 그리고 요한네스 23세는 조반니의 바람대로 추기경에서 교황으로 자리를 잡았고, 메디치 은행이 곧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 될 참이었다. 그런데 그때 문제가 발생했다. 요한네스 23세가 전임 교황을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으며 감옥에 갇힌 것이다. 게다가 이에 대해 어마어마한 벌금까지 부과 받았다. 땡전 한푼 없는 요한네스가 손을 내밀 유일한 곳은 메디치 은행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누가 보아도 요한네스 23세가 어마어마한 돈은 갚을 길은 전혀 없었고, 그가 다시 교황청에 들어갈리도 만무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 누가 보아도 요한네스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은 은행이 곧 문을 닫게 되는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그때 조반니는 요한네스 23세에게 대출을 승락한다. 갚지도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엄청난 금액의 돈을 빌려준 것 뿐 아니라, 모두가 등을 돌린 그에게 손을 내밀어 의리를 지킨 것이다(후에 요한네스 23세는 메디치 가문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세례자 성 요한의 손가락을 바친다). 이 모든 상황을 교황청과 피렌체 공화국의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한번 맺은 고객과의 관계를 끝까지 지키는 의리와 신용, 부실채권까지 떠안으면서도 고객을 절대로 버리지 않은 메디치 은행의 정신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지켜본 새로 선출된 교황 마르티누스 5세는 메디치 은행을 교황청 주거래 은행으로 지명한다. 마침내 메디치 가문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메디치 가문이 '신용'하나만 있었다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존경받는 가문이 될 수는 없었을거다. 메디치 가문이 누구나가 인정하는 존경받는 가문이 된 데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당시 피렌체 정부는 새로운 조세 원칙을 제안했다. 소유 재산을 모두 등록하고 그 목록에 근거해 차등 부과하는 '카타스토의 원칙'을 내세운 것이다. 이전에는 개인의 수입을 추청하여 징수했기에 부자들에게만 유리하고, 월급쟁이들에게는 불리했기에 새로운 조세 정책을 수립한 것이다. 당연히 부자들은 들고 일어났다. 기득권층은 물론 귀족들과 부호들은 이 새로운 조세 정책에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이때 메디치 가문의 행동은 단연 빛났다. 메디치 가문은 새로운 조세 정책에 대한 단 한마디의 비난도 하지 않은채 카타스토의 원칙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민들의 돈으로 자신들이 부를 향유한 만큼, 세금을 납부하고 사회에 되돌려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메디치 가문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모범적인 조세 납부 하나로 전 피렌체 공화국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결코 길지 않은 350년, 피렌체를 지배했던 메디치 가문이 수백년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고 끊임 없이 회자되는 건 바로 메디치 가문의 이러한 행동들 덕분이었을거다. 지금도 피렌체에는 메디치 가문의 흔적들로 가득하고 사람들의 마음 속엔 메디치 가문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하다. 은행으로 시작해 두 명의 교황을 배출하고,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수많은 천재 예술가들이 거쳐갔으며 피렌체 시민들을 위해 각종 예술품들로 가득한 우피치 미술관을 남기고 간 메디치 가문. 그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이다.

 

지금 우리가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존경 받는 리더가 없고, 모두가 신뢰하는 기업이 없으며,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 하는 사회. 이것만으로도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간과 경영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며 '메디치 효과'라는 말을 낳은 최초로 인문경영을 시도했던 코시모 데 메디치,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이들마저 감싸안고 '용서'라는 것을 할줄 알았던 피엘로 데 메디치, 재능있는 예술가들에게 아낌없는 후원으로 문화발전에 힘을 쏟은 '위대한 자'로렌초까지 그들의 이야기 하나하나는 지금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동시에 많은 배움을 남겨준다.

 

역사책을 읽는 듯 편안하고 친절하게 써내려간 저자의 글을 몰입도를 높여주고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잘 정리된 메디치 가문의 역사와 이야기 중간중간 독자들에게 시사점을 던져주는 독자의 시각도 메디치 가문에 대한 입문서로는 손색이 없다. 또 마치 피렌체라는 도시를 걷는 듯 중간중간 배치되어 있는 사진도 보는 재미가 크다. 하지만 매 도입부마다 억지스럽게 써 놓은 약간의 사족과,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인물 안나 마리아의 이야기(안나 마리아는 임종 직전 피렌체 바깥으로 반출하지 않는다는 단 하나의 조건을 약속 받고 모든 예술품을 피렌체 시민들에게 기증했다)가 단 몇줄로 끝나버린 점은 아쉬웠다(사실 무엇보다 아쉬웠던 건 제목이다. 이 책이 SERI CEO에 선정되지 않았다면 난 평생 이 책을 어줍잖은 자기계발서로 여겼을거다).   

 

다시 한번 피렌체의 거리를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미리 읽고 갔다면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었을텐데... 그날의 피렌체 밤 거리가, 거리 곳곳에서 느껴지는 메디치 가문의 흔적이 그리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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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문워킹을 - 보통의 두뇌로 기억력 천재 되기 1년 프로젝트
조슈아 포어 지음, 류현 옮김 / 이순(웅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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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세기쯤 그리스 대연회장이 붕괴되는 참사가 일어났다. 그 붕괴 정도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구조 작업을 시작했지만 시신들이 훼손되어 그 신원을 파악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당시 이 연회장에 누가,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하게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신원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 한 남자가 등장해 사람들의 이름과 생김새, 붕괴 직전 그 사람들이 서 있던 장소를 줄줄 외우기 시작했다. 그는 시모니데스라는 사람이었는데, 참사가 일어나기 바로 몇 분전 대연회장에서 시를 읊고 밖으로 나오던 중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은 자였다. 그는 자신이 시를 읊을 당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옷가지, 행동거지 등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남자 덕분에 유가족들을 가족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지금 우리는 ‘기억술’이라는 위대한 도구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아인슈타인과 문워킹을》은 바로 기억술의 시초라고 알려지는 시모니데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그의 기억술은 ‘기억의 궁전’으로 불리며 기억력 훈련의 가장 기초가 되는데, 자신에게 친숙한 공간을 상정하고 기억해야 할 것들을 이미지화해 그 공간 속에 배치하는 것이다. 저자 역시 이 방법을 사용해 메모리 챔피언에 등극한다). 가끔은 친한 친구의 전화번호도 까먹고, 차 키는 어디에 두었는지 매일같이 찾는 우리네와 같은 평범한 기억력을 가진 저자가 어느날 취재차 방문한 ‘2005 전미 메모리 챔피언십’에 참관하게 된다. 그리고 기억력의 대가들을 취재하며 그들은 타고난 기억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시모니데스와 같이 자신만의 기억술을 동원해 훈련한 후천적 기억력의 대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저자는 이참에 훈련을 통해 1년 후 전미 메모리 챔피언십에 도전하는 것을 목표로 훈련에 돌입한다. 그 과정을 담은 것이 바로 이 책이고,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가 만난 기억력의 대가들과 반대로 기억력이 형편없는 사람들, 각종 연구 자료와 실험들을 토대로 어떻게 기억력이 훈련을 통해 증진되고 발달 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다. 훈련을 통해 실제 메모리 그랜드 마스터에 등극한 에드 쿡, 레인맨의 모티프가 된 자폐 천재 킴 피크, <신경과학 저널>에 실린 기억력이 가장 나쁜 EP등이 실제 저자와 만나 자신들의 기억력에 대해 말하는 부분은 굉장히 흥미롭다.

 

결과적으로 저자는 이듬해인 2006년 기자기 아닌 선수로 참여서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다. 그가 이 과정을 통해 보여주는 건 기억력이라는 것은 적절한 기억술을 사용하면 증진시킬 수 있다는 것이고, 누구나가 훈련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가 알려주는 ‘기억의 궁전’ 활용법, 숫자를 외우는 PAO시스템(사람-행동-대상), 이름 외우는 베이커 베이커역설(빵굽는 베이커와 같이 이름을 시각화 하는 방법) 등은 충분히 일상에서도 써먹을 수 있으며 정말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어렵지 않은 방법이다.

 

그렇다면 이 저자는 1년 만에 기억력이 좋아졌다고 할 수 있는가하면 그건 또 꼭 그렇지는 않다. 메모리 대회라는 것 역시 종목이 있고, 그 종목에 맞춰 트레이닝 된 사람만이 잘 할 수 있다. 메모리 대회의 기본 종목인 스피드 넘버(숫자 기억하기), 스피드 카드(카드 순서 기억하기), 얼굴과 이름, 시, 단어 등을 잘 외운다고 평소 삶에서의 기억력이 꼭 좋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이 책만큼 책을 읽으며 책의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 본 책은 없는 것 같다. 내게는 기억의 축복보다는 망각의 즐거움이 더 큰 것 같다. 아무튼 간만에 즐겁게 읽은 책이다(1주일 뒤면 내용의 90%는 까먹겠지만 말이다).  

 

 

 

 

 

[덧붙여]

1) 이 책의 제목인 <아인슈타인과 문워킹을>은 포커 카드를 외우기 위한 기억 장치로 "인상적인 장면 만들기"를 상징한다. 아인슈타인이 페니 로퍼를 신고, 다이아몬드 글러브르르 끼고 문워킹을 하는 장면이 저자에게는 쉽게 잊히지 않는 장면이어서 그렇단다(내게는 그 장면 자체가 더 어려워 기억하기 힘들 것 같지만).

 

2) 이 책에서 대표적으로 소개되는 세 가지 기억술 중 '기억의 궁전'법이 가장 유용할 듯하다. 예를 들어 장보기 목록을 기억하기 위해 각 장소에 사야할 각 항목을 배치해 이미지화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이미지 마저 떠올리지 못할 것 같아 좌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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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의 전쟁 - 세계 경제를 장악한 월스트리트 신화의 진실과 음모
펠릭스 로하틴 지음, 이민주 옮김 / 토네이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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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르고 읽고자 마음을 먹었을 땐 그 책에 기대하는 바가 있어서이다. 물론 책을 읽기 전이라 책의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책의 표지, 그리고 저자의 서문 등을 통해 그 책의 내용을 짐작하고 기대를 갖게 된다.




이 책 <월가의 전쟁>을 읽고자 마음을 먹었을 때 내가 기대했던 건 세계 경제를 장악한 월스트리트가의 진실과 음모에 관한 이야기였다(실제 이 책의 부제가 세계 경제를 장악한 월스트리트 신화의 진실과 음모였다). 월스트리트를 누볐던 저자의 입에서 금융위기를 만들어낸 장본인들의 육성을 듣고 싶었고, 실제 그곳에서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산증인의 눈으로 실체를 보고 싶었다. 지금 우리가 긴장해야하는 이유, 앞으로의 경제시장에 대한 예측 등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이 책은 내 예상을 보란듯이 빗겨갔다. 물론 그 이야기가 없었다는 건 아니다. 저자의 삶 자체가 그 업계의 경험이고, 네트워크 자체가 세계 경제를 주무르는 인물들이기에 그에 대한 없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책은 근본적으로 저자인 펠릭스 로하틴의 자서전이다. 80여년 간 금융세계에서 활동한 자신의 경험을 주요 사건들을 통해 되돌아본 내용이다. 경제 예측서라기 보다는 한 금융인의 파란만장 일대기를 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 펠릭스 로하틴은 국내에선 낯선 금융인이다. 그는 1949년 투자은행 라자드 프레레스에 입사, 처음으로 금융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천재적인 감각 덕분인지 그는 금세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게 되고 미국 전화통신기기 제조업체인 ITT 회장 헤럴드 제닌의 눈에 띄어 스카우트된다. 이후 수많은 기업간의 빅딜을 성사시켰고, 1975년 파산 위기에 처한 뉴욕 시의 재정문제 해결에도 능력을 발휘한다. 2000년 리먼 브러더스에서 몸 닸았고, 리먼의 파산 이후 최초의 소속이었던 라자드 프레레스로 복귀, 현재 회장 겸 CEO로 있다.




책의 내용은 그의 일대기를 따라 생생한 에피소드와 함께 그려내고 있다. 시장을 예측하는 눈, 과감한 투자와 반짝이는 아이디어까지 월가를 누빈 금융인의 삶 자체는 배울 것이 많다. 하지만 왜 꼭 그의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세계 금융시장에 대한 공부와 예측을 원한다면 다른 책을 읽을 볼 것, 하지만 그래도 펠릭스 로하틴이 궁금하다면 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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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미모자를 그렸나 - 손미나의 로드 무비 fiction
손미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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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았다. 손미나의 소설 <누가 미모자를 그렸나>를 다 읽고 났을 때 제일 먼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이 낭만의 도시 파리를 배경으로 한 연애소설이라고? 틀렸다. 이 소설은 가슴 아리는 사랑을 꿈꾸는, 아직 사랑에는 서툰, 어쩌면 심장이 타들어갈 만큼의 감정을 경험해보지 못한 그녀가 쓴 연애를 꿈꾸는 소설이다.  

 

연예인인의 책이라면 색안경부터 쓰고 보는 편인지라 사실 이번 책도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 특히나 전작들이 내 취향에 맞지 않았고, 그녀의 경험들이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키지 않았기에 더더욱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책 <누가 미모자를 그렸나>는 달랐다. 어쩌면 손미나라는 색안경을 벗고 읽었더라면 더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을텐데 아쉬움마저 남았다.

 

이야기는 소설가를 꿈꾸는 장미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자신의 소설을 쓰고 싶지만 남의 책만 써주는 대필작가를 벗어나지 못하는 장미, 어느날 그녀는 K그룹 회장의 딸 최정희(레아)의 자서전을 대필해줄 것을 의뢰 받는다. 최정희는 프랑스에서 레아라는 이름으로 상당한 수준의 그림을 그리던 중 홀연히 그 모습을 갖춘 후였다. 어느 순간 대중의 눈에서 사라진 최정희에 대한 이야기로 세간의 이목을 잡아보겠다는 출판사의 의지였다. 인물에 대한 부담감과 언제까지 대필작가를 해야하나라는 자괴감이 있었지만, 이번 대필만 끝나면 장미의 소설을 내주겠다는 제안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일을 수락한다. 단 조건이 있었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최정희의 남자 테오에 대한 정보를 찾아 책에 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테오의 정보를 찾기 위해 프랑스로 떠난 장미, 그러나 그 과정은 험난했다. 장미는 공항에서 가방이 바뀌는 실수로 최정희에 대한 모든 정보가 담긴 가방을 잃어버리고, 자신과 가방이 바뀐 로베르를 만나게 된다. 가방을 찾기 위해 찾아간 로베르의 집에서 장미는 노란 꽃으로 뒤덮인 두 개의 그림을 발견한다. 똑같은 그림, 하지만 두 그림에 적힌 완전히 다른 화가의 이니셜. 장미는 로베르와의 대화 중에 그림을 그린 사람이 어쩌면 최정희일수도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로베르와 함께 그림의 배경인 봄레미모자 마을을 향해 출발한다.

 


"이 마을엔 겨울이 끝나갈 즈음 짧고 가는 솜털 뭉치 모양의 샛노란 꽃들이 피죠.

사실 꽃이 핀다기보다 나무를 가득 엎어 버린다 싶을 정도로 탐스러워요.

미모자나무가 얼마나 많은지,
2월 말이면 마을 전체가 노란 숲 속에 폭 싸여버리죠. "
_ 145쪽 중에서
  

이 책의 제목이 '누가 미모자를 그렸나'인 이유는 바로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을 찾는 것이 이 책에 등장하는 장미와 로베르, 최정희(레아)와 그녀의 남자 테오의 관계를 푸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적은 없지만 노란색으로 눈부시게 피어나 누구나 한 번 보면 반할 수 밖에 없다는 꽃 미모자, 그리고 미모자를 밟지 않고는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다는 프랑스의 봄레미모자 마을, 그리고 그 봄레미모자 마을에서 밝혀지는 주인공들의 비밀이 이 소설의 핵심이었다.

 

소설은 장미, 테오 두 입장이 번갈아가며 진행되는 데 그 시점과 서술방식을 묘하게 다르게 배치함으로서 책을 다 읽은 후에야 그 두 입장이 연결되어 거대한 서사가 완성될 수 있게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이제는 손미나를 소설가로 불러도 되겠다고 생각했던 부분이었는데, 배경 묘사나 인물 묘사도 뛰어났지만 소설의 가장 큰 핵심인 이야기를 배치하는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퍼즐을 모으는 재미, 그리고 그 퍼즐이 완성되었을 때의 짜릿함, 그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앞서 이 소설이 연애 소설이 아니라 연애를 꿈꾸는 소설이라고 한 이유는 그 이야기 배치의 힘이 사랑의 감정선 묘사보다 더 강했기 때문이다. 인물간의 절절한 감정선, 자신의 신분까지 바꿔가며 사랑하는 이를 지켜야 했던 그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그들의 모습이 도드라지지 못했다. 그건 아마도 손미나가 최정희나 테오가 아닌 장미에게 자신을 더 많이 투영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관찰자의 입장에서 자신도 그런 사랑을 꿈꾸고 싶은... 뭐, 어찌 되었듯 벌써부터 손미나의 두번째 소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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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을 범하다 - 서늘하고 매혹적인 우리 고전 다시 읽기
이정원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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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벗으시오."
이 도령이 하는 말이, "모든 일은 주인을 따라 한다고 했으니, 네가 먼저 벗어라."
"도련님 말씀이 옳소.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씀이니 도련님이 먼저 벗으시오."
"춘향아, 좋은 수가 있다. 수수께끼를 하여보자. 지는 사람이 먼저 벗기 하자."
"그럽시다. 도련님이 먼저 하오."
_ 이명선 고사본 <춘향전>에서 , <전을 범하다> 240쪽


화 <방자전>을 보고는 "이 영화, 참 재미난 발상전환이네."라는 생각을 했었다. 열녀의 상징, 영원한 사랑의 상징인 <춘향전>을 '방자'의 시각으로 뒤틀어 어쩌면 이리도 통속적이고 발칙하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 참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절을 버리느니 목숨을 끊겠다던 춘향은 사실은 방자와 놀아나고 있었고, 춘향을 만난 이후 상사병에 걸려 춘향만 바라보았다는 몽룡은 향단이는 물론 수많은 여자를 후리고 다녔으며, 탐관오리를 척결하겠다던 암행어사 출두 장면은 사실은 춘향과 몽룡, 변사또가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니.    

 

그런데 어쩌면 이 <방자전>의 발상이 진짜일지도 모르겠다. <춘향전>, <토끼전>, <장화홍련전>, <심청전> 등 단 한번도 의심의 눈길로 보지 않았던, 어쩌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리  고전을 뒤집어 본 책 <전을 범하다>에는 영화 <방자전>과 같은 발칙한 상상들이 가득차 있다. '고전'이라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포스에 눌려 어린 시절부터 배운 그대로 '권선징악'의 논리만으로 해석해야 옳은 것이라고 교육 받아온 우리들에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고전 뒤집어 보기를 권한다.

 

총 13편의 우리 고전 다시 읽기를 시도한 저자는 고전을 '권선징악'의 논리로만 읽어내려가는 것 부터가 잘못이라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배우고 공부했던 것들이 사실은 누군가의 의도된 해석이었으며, 잘못된 교육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한 편 한 편 서로 다른 고민과 숨결을 지닌 그 많은 고전소설들에 권선징악이라는 '계몽의 스티커'를 붙여버렸던 것은
창피했던 봉건을 뛰어넘어 황급히 근대로 가고자 했던 우리 사회의 치열한 자기 갱신의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무리 폭력적이고, 무지한 일이었다 할지라도 바로 그런 독서의 방식 자체가 우리의 고전 읽기의 출발점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_ 프롤로그 중에서

 

물론 그렇다고 여기 이 책에서 저자가 내놓은 해석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전을 범하다>는 단지 우리 고전을 '이렇게 읽어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을 뿐인 것이다. 문학이라는 것이 저마다의 가치를 가지고, 작가의 다양한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을 권성징악이라는 천편일률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려가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얘기다.

 

예를 들면 이렇다. <춘향전>의 몽룡은 욕정을 이기지 못한 남정네에 불과하고 춘향은 그런 몽룡과 월매의 거래를 성사시켜주는 기생일 뿐인 열녀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의 고전이라는 것이다. 또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져 효의 상징이 된<심청전>의 심청은 어쩔 수 없이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게 만든 공동체 구성원에 의한 살인을 담고 있는 내용이고, 사악한 계모라는 끔찍한 탈을 쓴 <장화홍련전>의 계모는 사실 가부장제라는 진범을 감추기 위한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던 그대로 심청은 스스로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버릴만큼의 효녀는 아니었고, 장화홍련전의 계모는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의 악독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세상의 악한 사람들을 처벌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구했다는<홍길동전>에 대한 해석은 더욱 흥미롭다. 홍길동은 스스로를 의병이라 여겼지만 홍길동이 깨뜨려야 할 거짓과 악이 율도국에는 없었고, 오히려 홍길동의 침략 전쟁으로 무고한 군사들이 죽었고, 정당한 통치 질서가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서자라 설움 받던 홍길동이 부인을 여럿 두고 자식들은 그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지위를 부여 받은 이 책의 결말만 보아도 우리가 얼마만큼 홍길동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남의 간을 당당하게 요구하는<토끼전>은 또 어떤가? 병에 걸린 용왕의 딸이 토끼의 간을 먹어야만 살아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용왕은 별주부를 육지로 보내 토끼를 잡아들인다. 자신의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무고한 토끼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것이 말이 되느냔 말이다. 게다가 <토끼전>은 다양한 결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간을 내놓을 것을 요청하는 별주부에게 토끼가 별주부의 아내를 자신에게 보내 수청을 들게 하고, 수청을 든 별주부의 아내는 토끼를 사모하게 된다. 토끼가 수궁을 빠져나가자 상사병에 걸린 별주부의 아내는 죽어버리고 사람들은 이를 별주부에 대한 사랑으로 여겨 열녀문을 세워준다. 지금의 막장 드라마에 맞먹는 스펙타클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우리가 '권선징악'의 논리로 배우고 있는 그 고전이라는 것이다.

 

고전이 왜 고전인가.시대를 뛰어넘어도 그 시대에 맞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고, 무수한 변주가 가능하며, 읽는이가 저마다 처한 상황과 처지에 따라 제각기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탄탄한 텍스트라는 점에 있어 고전이다. 수많은 논란에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여전히 읽히고 있는 건 그의 텍스트가 그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고, 저마다의 서로 다른 해석이 문학계에 자양분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고전은 어떠한가? 그동안 지나치게 천편일률적으로 해석해오지 않았는가? 우리도 이제 그동안 배운 것의 틀에서 벗어나 저마다의 시각으로 고전을 다시 읽어보자. 이 책은 그 첫걸음을 떼어줄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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