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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 350년 동안 세상을 지배한 메디치 이야기
김상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1년 6월
평점 :
14세기 피렌체, 메디치 은행을 연 조반니 디 비치는 고민이 많았다. 당시 피렌체에는 이미 알비치, 카포니, 우차노 등의 가문이 은행 업계를 평정하고 있었고, 후발주자로 은행업에 뛰어든 메디치 가문은 뭐 하나 크게 내세울 것 없는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조반니가 생각한 것은 바로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 되어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반니는 발다사레 코사라, 후에 요한네스 23세라는 법명을 쓰게 되는 교황을 만나게 된다.
조반니는 '고객에 대한 무한한 신뢰'하나로 요한네스 23세와의 거래를 시작했고 그를 지지했다. 그리고 요한네스 23세는 조반니의 바람대로 추기경에서 교황으로 자리를 잡았고, 메디치 은행이 곧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 될 참이었다. 그런데 그때 문제가 발생했다. 요한네스 23세가 전임 교황을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으며 감옥에 갇힌 것이다. 게다가 이에 대해 어마어마한 벌금까지 부과 받았다. 땡전 한푼 없는 요한네스가 손을 내밀 유일한 곳은 메디치 은행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누가 보아도 요한네스 23세가 어마어마한 돈은 갚을 길은 전혀 없었고, 그가 다시 교황청에 들어갈리도 만무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 누가 보아도 요한네스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은 은행이 곧 문을 닫게 되는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그때 조반니는 요한네스 23세에게 대출을 승락한다. 갚지도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엄청난 금액의 돈을 빌려준 것 뿐 아니라, 모두가 등을 돌린 그에게 손을 내밀어 의리를 지킨 것이다(후에 요한네스 23세는 메디치 가문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세례자 성 요한의 손가락을 바친다). 이 모든 상황을 교황청과 피렌체 공화국의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한번 맺은 고객과의 관계를 끝까지 지키는 의리와 신용, 부실채권까지 떠안으면서도 고객을 절대로 버리지 않은 메디치 은행의 정신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지켜본 새로 선출된 교황 마르티누스 5세는 메디치 은행을 교황청 주거래 은행으로 지명한다. 마침내 메디치 가문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메디치 가문이 '신용'하나만 있었다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존경받는 가문이 될 수는 없었을거다. 메디치 가문이 누구나가 인정하는 존경받는 가문이 된 데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당시 피렌체 정부는 새로운 조세 원칙을 제안했다. 소유 재산을 모두 등록하고 그 목록에 근거해 차등 부과하는 '카타스토의 원칙'을 내세운 것이다. 이전에는 개인의 수입을 추청하여 징수했기에 부자들에게만 유리하고, 월급쟁이들에게는 불리했기에 새로운 조세 정책을 수립한 것이다. 당연히 부자들은 들고 일어났다. 기득권층은 물론 귀족들과 부호들은 이 새로운 조세 정책에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이때 메디치 가문의 행동은 단연 빛났다. 메디치 가문은 새로운 조세 정책에 대한 단 한마디의 비난도 하지 않은채 카타스토의 원칙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민들의 돈으로 자신들이 부를 향유한 만큼, 세금을 납부하고 사회에 되돌려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메디치 가문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모범적인 조세 납부 하나로 전 피렌체 공화국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결코 길지 않은 350년, 피렌체를 지배했던 메디치 가문이 수백년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고 끊임 없이 회자되는 건 바로 메디치 가문의 이러한 행동들 덕분이었을거다. 지금도 피렌체에는 메디치 가문의 흔적들로 가득하고 사람들의 마음 속엔 메디치 가문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하다. 은행으로 시작해 두 명의 교황을 배출하고,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수많은 천재 예술가들이 거쳐갔으며 피렌체 시민들을 위해 각종 예술품들로 가득한 우피치 미술관을 남기고 간 메디치 가문. 그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이 바로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이다.
지금 우리가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존경 받는 리더가 없고, 모두가 신뢰하는 기업이 없으며,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 하는 사회. 이것만으로도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간과 경영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며 '메디치 효과'라는 말을 낳은 최초로 인문경영을 시도했던 코시모 데 메디치,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이들마저 감싸안고 '용서'라는 것을 할줄 알았던 피엘로 데 메디치, 재능있는 예술가들에게 아낌없는 후원으로 문화발전에 힘을 쏟은 '위대한 자'로렌초까지 그들의 이야기 하나하나는 지금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동시에 많은 배움을 남겨준다.
역사책을 읽는 듯 편안하고 친절하게 써내려간 저자의 글을 몰입도를 높여주고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잘 정리된 메디치 가문의 역사와 이야기 중간중간 독자들에게 시사점을 던져주는 독자의 시각도 메디치 가문에 대한 입문서로는 손색이 없다. 또 마치 피렌체라는 도시를 걷는 듯 중간중간 배치되어 있는 사진도 보는 재미가 크다. 하지만 매 도입부마다 억지스럽게 써 놓은 약간의 사족과,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인물 안나 마리아의 이야기(안나 마리아는 임종 직전 피렌체 바깥으로 반출하지 않는다는 단 하나의 조건을 약속 받고 모든 예술품을 피렌체 시민들에게 기증했다)가 단 몇줄로 끝나버린 점은 아쉬웠다(사실 무엇보다 아쉬웠던 건 제목이다. 이 책이 SERI CEO에 선정되지 않았다면 난 평생 이 책을 어줍잖은 자기계발서로 여겼을거다).
다시 한번 피렌체의 거리를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미리 읽고 갔다면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었을텐데... 그날의 피렌체 밤 거리가, 거리 곳곳에서 느껴지는 메디치 가문의 흔적이 그리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