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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참 오랜만에 미야베 미유키의 책을 읽었다. 그녀의 소설은 다 읽고나면 찾아오는 불편함 때문에 연달아 읽기가 힘들다. 무거운 주제와 미미여사 특유의 으스스한 분위기 때문에 읽으면서도 긴장감을 놓을 수 없지만, 읽고나서도 한동안 그런 기분이 이어진다. <모방범>도, <이유>도 읽고나서 꽤 오랜기간 휴유증에 시달렸기에 한동안은 그녀의 작품에 눈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잊고 있었던 그녀의 작품이 다시 떠올랐던 건 영화화 소식 때문이었다. <화차>가 곧 영화로 개봉한다는 소식이었다.
<화차>는 1992년 발표한 작품으로 그녀의 작품 중에서도 초기작에 속한다. 1987년 단편으로 추리소설 신인상을 받으며 데뷔했고, <화차>는 1993년 제6회 야마모토 슈고 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후 미미여사의 대표작인 <이유>와 <모방범>이 탄생하는데 <이유>는 1999년 제120회 나오키 상을, <모방범>으로는 2001년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대상을 수상한다. 대부분의 일본 추리소설 작가들이 그렇듯 미미도 다작을 하지만 단연 그녀의 최고의 작품은 <이유>와 <모방범>이며 아직 그 작품을 뛰어넘는 작품은 탄생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책 <화차>는 <이유>와 <모방범>을 탄생하게 한 발판이 된 작품이다. 그 주제와 문제의식이 <이유>나 <모방범>과 상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사고로 다친 다리 때문에 휴직중인 형사 혼마에게 어느날 가즈야가 찾아온다. 가즈야는 사고로 죽은 아내의 친척이었는데 사라진 자신의 약혼자를 찾아달라며 나타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세키네 쇼코. 1여년간의 데이트 끝에 결혼을 약속한 그들은 함께 결혼식 준비를 하던 중 쇼코의 이름으로 신용카드를 발급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파산을 신고한 전적이 있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가즈야가 쇼코에게 확인을 하기 위해 묻자 다음날로 그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불쑥 찾아와 부탁을 하는 친척이 얄밉기는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 사건은 묘한 흥미를 끄는 구석이 있었다. 혼마는 그 사건을 수락하고 쇼코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녀의 파산신고를 도왔다는 변호사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두던 중 파산신고를 한 쇼코와 가즈야가 약혼한 쇼코가 동일인이 아님을 알게 된다. 가즈야에게서 건네 받은 사진을 보여주자 변호사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다. 대체 사라진 쇼코는 어디로 갔고, 파산신고를 한 쇼코는 누구란 말인가? 이때부터 그 의문을 풀기위한 본격적인 탐문이 시작된다.
과거를 숨겨야 하기 때문에 위험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 '버려진 이들'이 이삼십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죠. _ 169쪽
앞서 <화차>가 <이유>나 <모방범>의 밑바탕이 된 소설이라고 한 것은, <화차>의 주제가 바로 '신용사회'에 대한 고발에 있기 때문이다. <화차>의 그 문제의식은 <이유>에서의 가장 따뜻해야 할 가족들의 보금자리를 자본주의의 도구로 탈바꿈시킨 부동산 문제로 이어졌고, <모방범>에서는 인간의 선과악에 대한 문제로 확장되었다. <화차>는 신용카드로 인해, 그리고 무분별하게 이루어진 신용대출로 인해 망가진 선량한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고발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용불량자를 단순히 개인의 무절재한 삶으로, 사치스러운 소비행태로 치부해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으며 많은 부분이 기업과 정책, 제도로 인해 만들어진 피해자라는 것이다.
(이하 스포일러 있음)
이 부분은 혼마가 파산 신고를 도운 변호사를 찾아갔을 때 더욱 극명화 된다. 갖가지 수치로, 수많은 상담사례를 통해 보여주는 그의 이야기는 암울한 현실을 투영해 보여준다. "지금 상황은 완전히 '정보파산'이란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하면 돈을 왕창 벌 수 있다. 입는 옷은 이게, 차는 저게 좋다... 제도와 법률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업자들은 너나없이 돈을 빌려주겠다고 설쳐대고. 그것이 성실하고 소심한, 그리고 나이어린 소비자들을 움직여 다중채무의 빚더미에 올려놓죠"
우리보다 앞서 일어난 일본 사회의 카드 버블은 수많은 개인 파산자를 양산했고, 어떤 이들을 빚에 시달리다 자살하거나 가족이 뿔뿔이 헤어져 야반도주를 하는 등 수많은 비극을 만들었다. 가즈야의 약혼녀 쇼코가 자신의 원래 이름인 신조 교코의 이름을 버리고 세키네 쇼코의 삶을 살고자 했던 것도, 신조 교코의 새로운 삶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내어주고 사라져야했던 실재 세키네 쇼코도 모두가 신용카드, 신용사회가 만들어낸 피해자이자 비극이었다.
세키네 쇼코도, 신조 교코도 모두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어느 순간 이 사회에서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빚쟁이들로 부터 쫓기는 도망자가 되었다. 버는 족족 빚을 갚지만 빚은 줄기는커녕 눈덩이처럼 불어만 갔고, 평범한 직장인을, 평범한 가정 주부가 되는 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이 지구상에 내 이름을 가지고 살아있는 그 누구도 이 악의 굴레에서 빼어내줄 수 없었다. 그런 그들의 극단적 선택에 그 누가 돌을 던지고, 그 누가 비난의 말을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화자>도 역시 미미여사의 명성에 걸맞게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던 작품이다. 쇼코가 한 시간을 기점으로 두 명의 사람으로 나뉘어지고, 그 두 명의 끈이 하나둘 밝혀질때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짜릿했다. 쇼코와 교코가 한 장의 사진 속에서 나란히 발견되었을 때, 신조 교코를 만나기 위해 커피숍에서 대기하고 있는 순간, 그리고 다모쓰(쇼코의 친구)가 신조 교코의 어깨에 손을 얻는 순간은 나 역시 숨을 죽이며 읽어내려갈 정도로 긴장됐다.
책을 다 읽고나니 더더욱 영화는 원작을 뛰어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 행간의 긴장감을 스크린으로 옮겨올 수 있을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의 변화를 글이 아닌 연기로 표현할 수 있을지, 작품 전반에 심어놓은 문제의식을 진부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의미 있게 영화에서 나타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 가지만 더, 아직까지 일본에서도 이 작품은 영화화 되지 않았다. 일본 최고의 스릴러이자 일본에서도 엄청난 베스트셀러였던 이 작품에 영화감독들이 눈독들이지 않았다는 거다. 왜? 그만큼 영화로 표현하기 힘든 작품이니깐. 그리고 작품의 명성만큼 제대로 못 만들면 관객들에게 엄청난 실망감을 안겨주게 될 것이 두려웠을테니깐. 그럼에도 아직 영화를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대를 걸어본다. 부디 잘 만들어졌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