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드뷔시 전주곡 - 휠체어 탐정의 사건 파일, <안녕, 드뷔시> 외전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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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안녕, 드뷔시>에서 만났던 부동산 재벌, 성격 괴팍한 고즈키 겐타로 할아버지가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사건의 피해자가 아닌 사건을 쫓는 탐정이 되었는데요. 안락의자 탐정도 있다는데 휠체어 탐정은 왜 안되냐고 주장하는 그! 맞아요 맞아. 안될 이유가 하나도 없죠. 요양 보호사 미치코씨는 머리를 싸매지만 겐타로 할아버지는 위험과 위협에 굴하지 않고 범인을 쫓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특히 휠체어 탐정이 되기로 결심한 첫 사건 앞에서는 더욱 마음이 급한데요. 이놈을 잡지 못하면 고즈키 개발이 소유한 부동산 가격이 똑 떨어질 위기에 처했거든요. 대체 무슨 사건이냐고요? 경찰도 어쩔 줄 몰라하는 본격 미스터리계의 꽃!!! 밀실살인사건이랍니다.

고즈키의 땅 근방에서 건축사 가스모리가 살해당합니다. 용의자는 아내 히토미. 재정파탄에 이를 정도의 사치와 남편의 세무사와 바람이 난 정황으로 가장 유력한 용의자에 지명되지만 문제는 아내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거에요. 무언가로 목이 졸려 죽었음이 분명한 시체, 그러나 집 안으로 또 집 밖으로 범인이 들고 난 자국이 없습니다. 목을 조른 도구도 발견되지 않았구요. 가스모리가 직접 디자인한 집은 단층 구조로 현관과 뒷문, 동쪽서쪽남쪽으로 창문이 나있지만 철저하게 잠겨있는 상태였습니다. 이중창은 외부에서는 절대 열 수 없게 설계되었고 현관과 뒷문은 자물쇠가 두 개나 달려있는 특수키를 장착했습니다. 열쇠를 한번이라도 사용하면 그 흔적이 남는데 아니나 다를까 감식결과 열쇠가 구멍에 꽂힌 흔적조차 없다는군요. 벽, 바닥, 천장, 다락방. 쥐 한 마리 도망나올 틈조차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경찰은 망연자실해 집니다. 그런 때에 바로 휠체어 탐정을 자처하는 겐타로 할아버지가 나서게 되죠. 경찰은 믿을 수가 없어! 이 사건은 내가 해결하겠다!! 어린 딸을 혼자 두고 불륜남과 여행까지 갈 정도로 뻔뻔한 여자지만 그녀가 진정 범인이 맞는걸까요? 범인은 바로 너! 라고 외치는 겐타로의 손 끝에 선 자를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목청 크지요. 입담 쩔지요. 재력 되고요. 여당 최고 입지의 국회의원하고도 줄 닿은 권력 있고요. 이 할아버지 뭐하나 눈치 볼 것 없는 인생에 유일한 핸디캡이 휠체어에 앉은 나이 많은 영감님이라는건데 가끔은 그것마저 강점 같다니까요. 지리멸렬 시간은 가라 나는 모르겠다 대충대충 수사하는 경찰들 귀에 피나도록 잔소리하고 이리저리 굴려가며 사건을 쫓는 모습에 읽는 내내 속이 다 시원해집니다. 시시때때로 마주치는 나약한 마음들에 듣기 좋은 위로는 1도 없이 기분 나쁠만큼 옳은 말만 골라하는데 그게 진짜 핵사이다에요. 입은 야멸차도 잔정은 많은 남자라는 걸 알기에 밉지도 않고요. 추리 초보도 순순히 간파할 수 있는 코난 류의 트릭들을 재미나게 소화할 수 있었던데는 그의 채찍 같은 입담이 큰 몫을 한답니다.

단, 진짜 많이 꼰대기는 합니다. 만화가인 아들에 대해서도 그렇고 패기도 근성도 없는 요즘 젊은이들에 대해 한심해하는 마음을 조금도 숨기지 않아요. 근면성실 하면 뭐든,까지는 아니더라도 남부끄럽지 않은 삶을 이룩할 수 있었던 세대 특유의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남자거든요. 그 자신 한국 전쟁의 특수 속에서 누린 호황과 경제성장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지금 세대의 고전을 오로지 나약한 정신과 경쟁 없는 교육에서만 찾는 듯해 안타까웠습니다. 막판에 가서는 자신의 가치관이 잘못된 건 아닌가 고뇌에 빠지기도 하지만 겐타로 할아버지를 통해 한국뿐 아니라 일본도 세대 간 입장 차이를 좁히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다 싶더군요. 그리고 일본 국민성에 대한 좀 같잖은 얘기 "리더따위 없어도 하나가 되어 대항하는 기개? 결코 비겁한 행동은 하지 않는 품성??" 같은 게 나오는데 이건 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인정하고 패스하기로 했어요. 작가는 일본 사람 독자는 한국 사람, 이 온도차는 어떻게해도 극복이 안될 것이므로;;;; 미사키 요스케와의 만남이 이루어진 휠체어 탐정의 마지막 인사에서는 번역가님이나 다른 독자님의 말씀처럼 저도 가슴이 뭉클해졌는데요. 안녕, 드뷔시에서의 재회가 결코 해피엔딩은 아니었기에 집으로 들어가는 겐타로 할아버지를 붙들고만 싶었습니다. 꼭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지만요. 안녕, 드뷔시의 스핀오프 작품이므로 가급적이면 차례대로 읽을 것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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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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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책방에 나온 거 보고 읽어야겠다 싶었습니다.
고맙게도 전자도서관에 소담 출판 책이 있더라구요.
대출해서 보는데 어이쿠, 번역가님이 다르세요 ㅋㅋ
90년대 옛날 책이라 그런가 봅니다.
안정효 역자님 번역으로 다시 만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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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삶
실비 제르맹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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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년...."(p24) 남편의 당첨된 복권이 사라졌다. 안절부절 화가 난 남편이 소리친다. 서랍에 둔 내 복권 못봤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남편보다 더 설레발을 치며 복권을 찾아 책상을 부술듯이 뒤지고 온 집안을 샅샅이 수색했을 것이다. 여기다 둔 거 맞아? 다른데 넣어 놓고 기억 못하는 거 아니야? 잘 좀 생각해봐! 어디다 뒀는데?!! 남편 보다 더 목청을 키워서 싸움을 만들었겠지. 조르주의 아내 사빈 베렝스는 어땠을까? 그녀는 나와는 정 반대되는 인간이다. 차분하고 대범하고 침착하고 냉소적이다. 복권 당첨, 일확천금을 사빈은 흘려듣는다. 애초에 믿을만한 말도 못된다는 것이 그녀 생각이었던 것 같다. 복권에도 남편에도 철저하게 무관심하게. 그럼에도 싸움이 났다. 사빈의 무신경한 태도가 남편을 화나게 만든 것이다. 남편은 강제로라도 관심을 끌어내겠다는 듯 사빈에게 책임을 전가했고 사빈은 그제서야 목청을 틔우며 거대한 분노로 대응한다. 거친 싸움 후 남편이 집을 나선다. 차에 막내딸 마리가 잠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속력을 높이다 플라타너스 나무를 들이받는다. 서른넷, 조르주는 알량한 종이 한 장으로 목숨을 잃었다. 사빈은 알량한 종이 한 장으로 미망인이 되어 네 아이들을 책임져야 할 가장이 된다. 하물며 마리는 아빠와 함께 오른쪽 발목 아래도 같이 땅에 묻었다. 그리고 그 꽃이 나타났다. 붉은색과 오렌지색깔의 화려한 장미 다발, 조르주가 사망한 나무에 헌화되어 내 남편에게 여자가 있었다는 정염의 증거를 일 년에 네 차례씩 피우는 꽃. 그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오로지 사빈, 그녀 뿐이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셀레스트, 앞으로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고."(p232) 아버지의 팔에 기대어 빛나는 자태로 성당에 들어섰던 신부는 사랑의 맹세 대신 쏘아진 독침 같은 신랑의 말에 발작적인 웃음을 터트린다. 신랑의 고백에 어떤 비열한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이 남자는 그저 정직하고자 했던 것 뿐이었다. 결코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몸으로, 다른 남자를 사랑하지만 고백조차 못한 채 돌아선 몸으로 잠시잠깐 마음의 짐을 덜어내기 위하여 신부에게 고백했던 것이다. 임신을 한 순간부터 의무를 다한 듯 각방을 쓰며 멀어진 남편, 태어난 아이는 순전히 남편만을 닮은 채 그의 첫사랑과 같은 이름으로 호적에 올려졌고 셀레스트는 자신이 대리모가 된 듯한 충격에 빠진다. 제이차세계대전에 징집된 남편이 집을 떠난 후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의 남자가 집으로 들어왔다. 강제가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임신과 출산까지 했지만 사랑이라고는 몰랐던 몸과 마음으로 남자를 포옹했다. 전쟁의 집밖의 사정이었다. 집안의 사정은 사랑으로 충분했다. 나라를 팔아먹지도 동포를 배신한 것도 아니었다. 남편 앞에서도 떳떳했다. 훗날 돌아와 모든 사정을 알게 된 남편은 오히려 그녀의 용기를 칭송한다. 그는 절대로 가질 수 없는 품성이었으므로. 그러나 이웃들은 아니다. 나치가 물러간 후 십삼개월 된 아이까지 끌고 나와 셀레스트와 함께 조리돌림을 한다. 머리를 밀고 옷을 벗기고 침을 뱉는 그 자리에서 셀레스트는 또다시 발작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훗날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웃음소리가 울려퍼지는 그 속에 아들 피에르가 있었다. 피에르의 비밀은 '어머니의 몸 아버지의 몸 누이의 몸'이다.

"웃지 마요! 웃지 마세요....."(p14) 훔친 양탄자를 코트 속에 숨긴 채 허겁지겁 부둣가로 달려가는 사빈은 누군가의 눈에 금방이라도 자살할 것처럼 비췄을지도 모르겠다. 이를 테면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백화점 근무를 서던 피에르 같은 사람의 눈에 말이다. 낮은 목소리로 다가와 휘청거리는 사빈의 팔꿈치를 받쳐 균형을 잡아 준 남자, 이름 말고는 무엇도 알 수 없는 남자 피에르와 사빈 그리고 그녀 아이들의 마음에 우정이라는 씨앗이 심어진 성탄절. 신기하게도 이 책은 남편이자 아버지인 조르주의 부재를 메워가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의 남편도 누구의 애인도 누구의 아버지도 아닌 상태로 가족 속에 머물다 사라진 피에르의 부재 후 성장하는 사빈 가족들의 이야기이자 자신의 가족사에서 풀려난 피에르의 해방기이다. 부랑자 같은 피에르의 존재를 믿지 못해 그의 아파트를 뒤진 큰아들 앙리, 피에르와 가장 짙은 우정을 나누었으나 혹독한 사춘기를 겪으며 개처럼 충성스런 친구 피에르를 경멸하는 마리, 사라진 피에르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그의 붉은 스웨터를 간직하는 사빈. 피에르와 별 관계는 없지만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관능적인 사랑에 경의를 표한 후 인생의 종료 버튼을 누른 조르주의 고모 에디트나 며느리의 불륜 상대라는 의심으로 피에르를 경멸한 조르주의 아버지 샤를람도 잊을 수 없는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이 책의 가장 중심 인물이라 할 만한 피에르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를 모르겠어서 그를 볼 때 꼭 필요한 태도만을 알려주려 한다. "소리가 들릴 만큼 바라보기, 사물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귀귀울이기. 낮시간에 산재해있는 밤의 찌꺼기들을 간파할 만큼, 어둠 속에 자리한 눈부신 빛의 흔적들을 알아챌 만큼 귀기울이기."(p223) 고요한 남자였지만 가슴에 숨겨진 삶까지 조용한 남자는 아니었다. 한때는 휘청였지만 이제는 단호한 그의 발걸음을 쫓아 가만가만 귀귀울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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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후지사키 사오리 지음, 이소담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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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마음을 나는 슬픔이라고 불렀다. 누군가의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지만 그 누구에게도 특별한 존재가 되지 못하는 비참함을 슬픔이라고 표현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서, 누군가에게 소중하게 여겨지고 싶어서 나는 울었다. 그래서 그때, 눈물을 흘릴 만큼 간절하게 바라던 말을 해준 쓰키시마를 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네가 있을 곳은 내가 만들 테니까, 울지 마." (p22-23)

사춘기 예민하고 섬세하고 아프고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페이지마다 묻어나는 성장소설을 만났다. 일본의 4인조 밴드 SEKAI NO OWARI의 피아노 연주와 라이브 연출을 담당하는 후지사키 사오리가 쓴 데뷔소설이자 제 158회 나오키상 후보작에 오른 <쌍둥이>다. 어째서인지 어려서부터 친구가 없었던 나쓰코. 친구를 사귀고 싶어 이런저런 방법을 다 써봤지만 매번 왕따만 당했다. 겨우겨우 동성 친구를 만들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나쓰코의 방에서 용돈을 훔치는 게 목적이었던 것 같다. 사랑받고 싶다고, 되는 일이 없다고, 외롭다고, 슬프다고 울음을 터트리는 나쓰코에게 위로가 되는 건 피아노와 한 살 많은 남자친구 쓰키시마 밖에 없다. 네가 쓸쓸해 보여서 좋았다고,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얘기하는 녀석에게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쓰키시마로 말하자면 완전히 날라리 같은 녀석이다. 중학생 밖에 안됐는데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귀를 뚫고 학교를 대충대충 건성으로 다닌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어떻게 하느냐며, 자신은 그런 걸 참을 수가 없단다. 앞날을 걱정한 부모님의 권유와 호기심으로 미국에 유학을 갔지만 채 한달도 되지 않아 일본으로 돌아온다. 공황장애와 ADHD의 증세가 심각해진 탓이다. 쓰키시마는 나쓰코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이용한다. 도돌이표처럼 계속되는 힘들어, 싫어, 귀찮아에 나쓰코가 두 손 두 발을 다 든 날 그는 나쓰코의 목에 커터칼을 들이민다. 그러고도 둘은 친구다. 용서하고 화해하고 다시 시작한다. 그러나 연인은 아니다. 나쓰코는 이성으로써 쓰키시마를 사랑하지만 쓰키시마는 자주 여자친구가 바뀐다. 나쓰코의 마음을 알지만 결코 나쓰코의 마음을 받아주지도 않는다. 그저 쌍둥이이고 싶단다.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너무나 비슷한 감정을 공유해서, 너는 내 목표를 네 것인냥 공유해 주니까 너를 잃고 싶지 않단다. 두 사람이 물방울이면 서로 다른 색이라도 하나로 합쳐질 수 있을텐데 두 아이가 다 각진 돌멩이 같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싸우고 부딪히고 서로를 깔고 뭉개고 짓이긴다. 계속해서 함께. 계속해서 같이 성장해 간다. 어디까지 함께일 수 있을지는 이 소설로 결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무사히 잘 살아가라고" <양과 강철의 숲> 작가 미야시타 나츠와 함께 외치게 된다.

후지사키 사오리의 성장기와 밴드 생활이 고스란히 반영된 나쓰코와 쓰키시마의 사춘기 시절. 어른이 된다고 걱정이 줄지는 않겠지만 탄산을 쏟은 듯 부글부글 하고 용암처럼 뜨겁던 가슴이 차츰차츰 식어가는 때가 온다고, 갈팡질팡한 그 마음까지 그리워지는 때가 온다고 아이들에게 얘기해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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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 45분, 나의 그림 산책 - 혼자 있는 시간의 그림 읽기
이동섭 지음 / 홍익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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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고 기분 좋은 그림 에세이를 만났다. 새벽 1시 45분, 나의 그림 산책.

올빼미형과는 거리가 먼 탓에 새벽 1시 45분까지 깨어있는 때는 거의 없지만

그때까지 홀로 깨어 있는 느낌 아니까 혼자 있는 시간의 그림을 잔잔하고 차분하게 읽어본다.

1. 일리야 레핀 / 숲속의 레오 톨스토이

레오 톨스토이의 책 읽는 자세가 좋다. 

내 경우 팔을 들지 않고 바닥에 손날이 붙는다는 차이가 있지만 얼추 비슷한 느낌으로 책을 읽는다.

아침에 눈 떠서 비몽사몽한 상태로 책을 펼쳤는데 단박에 저 그림이 나왔다.

차례대로 읽기 위해 앞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그림이 마음에 들어 그 페이지부터 먼저 읽기로 한다.

마치 내가 숲속에서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거장 톨스토이와 마주 누워 책을 읽는 것만 같아서,

청량하고 마음이 밝아져서 책을 덮어야 하는 시간이 왔을 때도 움츠리지 않고 가뿐하게 일어났다.

내가 톨스토이였다면 저 숲, 어쩌면 저 공원을 한참을 걷다가 책을 들고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등이 촉촉해질만큼만 육체의 때를 빼고서 한숨을 고르듯이 골라온 책을 안고 누웠을 때

어려운 책이 한결 가뿐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톨스토이의 손에 들린 책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쉬운 책은 아닐 듯 하여 ㅎㅎㅎ

2. 조지프 라이트 / 도브데일의 달빛

파키스탄에서 쓰는 우르두어로 나스naz는 조건없이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기에 느끼는 긍지와 자신감(p124)이라고 한다.

나는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딸들을 부러워 한 적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어떤 특별한 얼굴, 특별한 심성 같은 게 있을 거라고 환상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나스라는 단어를 읽으며 문뜩 그 때 느꼈던 허기짐과 질투가 떠올랐다.

아버지라는 존재로 인해 긍지와 자신감을 갖는 게 무척 힘들었던 밤들.

사랑을 받고 싶은지 아닌지도 헷갈렸던 마음.

어린애도 아닌데 어쩜 이런 고민을 다할까 위축되던 나.

작가님은 나스라는 단어를 발음하면 조지프 라이트의 그림 "도브데일의 달빛"처럼 잔잔한 밤이 떠오른단다.

성인이 되어 주는 사랑도 받는 사랑도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하는 나이가 됐다.

긍지도 자신감도 이제는 누구에게서 전해받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스스로 차오르게 해야 한다.

그러니 내가 가장 앞장 서서 나를 조건없이 사랑하자.

달빛이 도브데일의 골짜기를 채우듯 오늘은 내가 달빛이 되어 조용조용 가만가만 나를 채우자.

3. 앙리 루소 / 잠자는 집시

찰칵 사진을 찍는 것처럼, 찰칵 내 마음을 찍어 보는 시간.

새벽 1시 45분, 나의 그림 산책을 읽는 시간이 꼭 그랬다.

잠든 연꽃처럼 고요하고 야무지고 묵직한 달처럼 편안한 책이다.

알몸으로 엽서를 쓰는 여인처럼 솔직하게 다정하고픈 마음이 페이지마다 보글댄다.

정물화의 일부처럼 언제나 가만히 앉은 사람인데도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대패질 하는 사람을 보고는 사부작사부작 책상정리를 해본다.

일상으로 스며드는 예술의 가치를 다 알지는 못해도

물티슈로 쓱싹 닦아낸 책상에 개운해지는 마음 같으면야 더 바랄 것도 없다ㅎㅎ

밤을 준비하며 마지막으로 펼쳐드는 그림은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

지팡이를 짚으며 먼길을 걸어왔을 집시 여인의 곁에서

그녀를 지키는 사자와 함께 나도 나붓이 잠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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