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삶
실비 제르맹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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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년...."(p24) 남편의 당첨된 복권이 사라졌다. 안절부절 화가 난 남편이 소리친다. 서랍에 둔 내 복권 못봤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남편보다 더 설레발을 치며 복권을 찾아 책상을 부술듯이 뒤지고 온 집안을 샅샅이 수색했을 것이다. 여기다 둔 거 맞아? 다른데 넣어 놓고 기억 못하는 거 아니야? 잘 좀 생각해봐! 어디다 뒀는데?!! 남편 보다 더 목청을 키워서 싸움을 만들었겠지. 조르주의 아내 사빈 베렝스는 어땠을까? 그녀는 나와는 정 반대되는 인간이다. 차분하고 대범하고 침착하고 냉소적이다. 복권 당첨, 일확천금을 사빈은 흘려듣는다. 애초에 믿을만한 말도 못된다는 것이 그녀 생각이었던 것 같다. 복권에도 남편에도 철저하게 무관심하게. 그럼에도 싸움이 났다. 사빈의 무신경한 태도가 남편을 화나게 만든 것이다. 남편은 강제로라도 관심을 끌어내겠다는 듯 사빈에게 책임을 전가했고 사빈은 그제서야 목청을 틔우며 거대한 분노로 대응한다. 거친 싸움 후 남편이 집을 나선다. 차에 막내딸 마리가 잠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속력을 높이다 플라타너스 나무를 들이받는다. 서른넷, 조르주는 알량한 종이 한 장으로 목숨을 잃었다. 사빈은 알량한 종이 한 장으로 미망인이 되어 네 아이들을 책임져야 할 가장이 된다. 하물며 마리는 아빠와 함께 오른쪽 발목 아래도 같이 땅에 묻었다. 그리고 그 꽃이 나타났다. 붉은색과 오렌지색깔의 화려한 장미 다발, 조르주가 사망한 나무에 헌화되어 내 남편에게 여자가 있었다는 정염의 증거를 일 년에 네 차례씩 피우는 꽃. 그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오로지 사빈, 그녀 뿐이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셀레스트, 앞으로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고."(p232) 아버지의 팔에 기대어 빛나는 자태로 성당에 들어섰던 신부는 사랑의 맹세 대신 쏘아진 독침 같은 신랑의 말에 발작적인 웃음을 터트린다. 신랑의 고백에 어떤 비열한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이 남자는 그저 정직하고자 했던 것 뿐이었다. 결코 여자를 사랑할 수 없는 몸으로, 다른 남자를 사랑하지만 고백조차 못한 채 돌아선 몸으로 잠시잠깐 마음의 짐을 덜어내기 위하여 신부에게 고백했던 것이다. 임신을 한 순간부터 의무를 다한 듯 각방을 쓰며 멀어진 남편, 태어난 아이는 순전히 남편만을 닮은 채 그의 첫사랑과 같은 이름으로 호적에 올려졌고 셀레스트는 자신이 대리모가 된 듯한 충격에 빠진다. 제이차세계대전에 징집된 남편이 집을 떠난 후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의 남자가 집으로 들어왔다. 강제가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임신과 출산까지 했지만 사랑이라고는 몰랐던 몸과 마음으로 남자를 포옹했다. 전쟁의 집밖의 사정이었다. 집안의 사정은 사랑으로 충분했다. 나라를 팔아먹지도 동포를 배신한 것도 아니었다. 남편 앞에서도 떳떳했다. 훗날 돌아와 모든 사정을 알게 된 남편은 오히려 그녀의 용기를 칭송한다. 그는 절대로 가질 수 없는 품성이었으므로. 그러나 이웃들은 아니다. 나치가 물러간 후 십삼개월 된 아이까지 끌고 나와 셀레스트와 함께 조리돌림을 한다. 머리를 밀고 옷을 벗기고 침을 뱉는 그 자리에서 셀레스트는 또다시 발작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훗날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웃음소리가 울려퍼지는 그 속에 아들 피에르가 있었다. 피에르의 비밀은 '어머니의 몸 아버지의 몸 누이의 몸'이다.

"웃지 마요! 웃지 마세요....."(p14) 훔친 양탄자를 코트 속에 숨긴 채 허겁지겁 부둣가로 달려가는 사빈은 누군가의 눈에 금방이라도 자살할 것처럼 비췄을지도 모르겠다. 이를 테면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백화점 근무를 서던 피에르 같은 사람의 눈에 말이다. 낮은 목소리로 다가와 휘청거리는 사빈의 팔꿈치를 받쳐 균형을 잡아 준 남자, 이름 말고는 무엇도 알 수 없는 남자 피에르와 사빈 그리고 그녀 아이들의 마음에 우정이라는 씨앗이 심어진 성탄절. 신기하게도 이 책은 남편이자 아버지인 조르주의 부재를 메워가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의 남편도 누구의 애인도 누구의 아버지도 아닌 상태로 가족 속에 머물다 사라진 피에르의 부재 후 성장하는 사빈 가족들의 이야기이자 자신의 가족사에서 풀려난 피에르의 해방기이다. 부랑자 같은 피에르의 존재를 믿지 못해 그의 아파트를 뒤진 큰아들 앙리, 피에르와 가장 짙은 우정을 나누었으나 혹독한 사춘기를 겪으며 개처럼 충성스런 친구 피에르를 경멸하는 마리, 사라진 피에르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그의 붉은 스웨터를 간직하는 사빈. 피에르와 별 관계는 없지만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관능적인 사랑에 경의를 표한 후 인생의 종료 버튼을 누른 조르주의 고모 에디트나 며느리의 불륜 상대라는 의심으로 피에르를 경멸한 조르주의 아버지 샤를람도 잊을 수 없는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이 책의 가장 중심 인물이라 할 만한 피에르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를 모르겠어서 그를 볼 때 꼭 필요한 태도만을 알려주려 한다. "소리가 들릴 만큼 바라보기, 사물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귀귀울이기. 낮시간에 산재해있는 밤의 찌꺼기들을 간파할 만큼, 어둠 속에 자리한 눈부신 빛의 흔적들을 알아챌 만큼 귀기울이기."(p223) 고요한 남자였지만 가슴에 숨겨진 삶까지 조용한 남자는 아니었다. 한때는 휘청였지만 이제는 단호한 그의 발걸음을 쫓아 가만가만 귀귀울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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