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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 45분, 나의 그림 산책 - 혼자 있는 시간의 그림 읽기
이동섭 지음 / 홍익 / 2019년 10월
평점 :
편안하고 기분 좋은 그림 에세이를 만났다. 새벽 1시 45분, 나의 그림 산책.
올빼미형과는 거리가 먼 탓에 새벽 1시 45분까지 깨어있는 때는 거의 없지만
그때까지 홀로 깨어 있는 느낌 아니까 혼자 있는 시간의 그림을 잔잔하고 차분하게 읽어본다.
1. 일리야 레핀 / 숲속의 레오 톨스토이
레오 톨스토이의 책 읽는 자세가 좋다.
내 경우 팔을 들지 않고 바닥에 손날이 붙는다는 차이가 있지만 얼추 비슷한 느낌으로 책을 읽는다.
아침에 눈 떠서 비몽사몽한 상태로 책을 펼쳤는데 단박에 저 그림이 나왔다.
차례대로 읽기 위해 앞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그림이 마음에 들어 그 페이지부터 먼저 읽기로 한다.
마치 내가 숲속에서 책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거장 톨스토이와 마주 누워 책을 읽는 것만 같아서,
청량하고 마음이 밝아져서 책을 덮어야 하는 시간이 왔을 때도 움츠리지 않고 가뿐하게 일어났다.
내가 톨스토이였다면 저 숲, 어쩌면 저 공원을 한참을 걷다가 책을 들고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등이 촉촉해질만큼만 육체의 때를 빼고서 한숨을 고르듯이 골라온 책을 안고 누웠을 때
어려운 책이 한결 가뿐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톨스토이의 손에 들린 책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쉬운 책은 아닐 듯 하여 ㅎㅎㅎ
2. 조지프 라이트 / 도브데일의 달빛
파키스탄에서 쓰는 우르두어로 나스naz는 조건없이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기에 느끼는 긍지와 자신감(p124)이라고 한다.
나는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딸들을 부러워 한 적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어떤 특별한 얼굴, 특별한 심성 같은 게 있을 거라고 환상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나스라는 단어를 읽으며 문뜩 그 때 느꼈던 허기짐과 질투가 떠올랐다.
아버지라는 존재로 인해 긍지와 자신감을 갖는 게 무척 힘들었던 밤들.
사랑을 받고 싶은지 아닌지도 헷갈렸던 마음.
어린애도 아닌데 어쩜 이런 고민을 다할까 위축되던 나.
작가님은 나스라는 단어를 발음하면 조지프 라이트의 그림 "도브데일의 달빛"처럼 잔잔한 밤이 떠오른단다.
성인이 되어 주는 사랑도 받는 사랑도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하는 나이가 됐다.
긍지도 자신감도 이제는 누구에게서 전해받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스스로 차오르게 해야 한다.
그러니 내가 가장 앞장 서서 나를 조건없이 사랑하자.
달빛이 도브데일의 골짜기를 채우듯 오늘은 내가 달빛이 되어 조용조용 가만가만 나를 채우자.
3. 앙리 루소 / 잠자는 집시
찰칵 사진을 찍는 것처럼, 찰칵 내 마음을 찍어 보는 시간.
새벽 1시 45분, 나의 그림 산책을 읽는 시간이 꼭 그랬다.
잠든 연꽃처럼 고요하고 야무지고 묵직한 달처럼 편안한 책이다.
알몸으로 엽서를 쓰는 여인처럼 솔직하게 다정하고픈 마음이 페이지마다 보글댄다.
정물화의 일부처럼 언제나 가만히 앉은 사람인데도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대패질 하는 사람을 보고는 사부작사부작 책상정리를 해본다.
일상으로 스며드는 예술의 가치를 다 알지는 못해도
물티슈로 쓱싹 닦아낸 책상에 개운해지는 마음 같으면야 더 바랄 것도 없다ㅎㅎ
밤을 준비하며 마지막으로 펼쳐드는 그림은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
지팡이를 짚으며 먼길을 걸어왔을 집시 여인의 곁에서
그녀를 지키는 사자와 함께 나도 나붓이 잠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