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기대어 철학하기 -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지 마라
얀 드로스트 지음, 유동익 옮김 / 연금술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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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기대어 철학하기>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가치관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집없는 사람들이며 세상은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 하지만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집을 지을 수 있으며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 안식처를 짓고 노여움 가득한 이 땅에 우호적인 소우주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 그리하여 그는 빵과 물만 있으면 신도 부럽지 않다라는 말을 했는가 봅니다. 우리는 대게 에피쿠로스를 배부른 돼지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는 극단적인 욕망을 삶에서 배제하려고 노력합니다. 자족과 평정심이 아주 평화로운 집을 짓는 가장 중요한 뼈대였지요. 에피쿠로스를 알고 난 후 작은 기쁨에 눈을 뜨려 애쓰고 있어요. 쌩쌩 찬바람 부는 문 밖이 아니라 포근한 내 집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구요. 배부르게 먹고 즐거운 가르침을 주는 책을 읽고 월급을 주는 직장에 무사히 출근할 내일에 만족하게 되요. 에피쿠로스의 이야기로 오늘 하루를 되새기고 내일을 생각하니 마음속에 단단한 벽돌집 한 채를 벌써 절반은 올린 것 같은 기분이 됩니다.

에픽테토스와 세네카가 중심이 된 스토아 학파는 안분지족을 중요하게 생각한 조선의 선비님들 같습니다. 에피쿠로스의 자연스러운 쾌락 추구(자연스럽지도 않고 꼭 필요하지도 않은 쾌락과는 완전히 다른!) 상태에서 한층 나아가 이미 얻은 것 안에서 원하라거나 남에게 속하는 모든 것은 타인의 소유이며 우리가 보는 것만 소유하라거나 하여튼 좀 철절한 금욕주의를 주장하니까요. 에픽테토스는 여러 인상적인 인생 규칙을 남겼습니다. 그 중 한가지는 "철학적 경험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실패에 대해 다른 사람을 책망할 것이다."(p108)라는 거에요. 지식이란 혼자 서 있지 못한대요. 고립되어 떠돌수도 없구요. 때문에 모든 철학이 윤리학이며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잘 어울려 지내려는 소망과 연결되어 있다는군요. 철학이 나 혼자 잘 살거나 나 혼자 건강하거나 나 혼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공감과 이해로 더불어 사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됐어요. 세네카로 말할 것 같으면 요즘 유행하는 말이 있죠. "내일의 내가 하겠지!"와는 정반대되는 주장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친우 루킬리우스에게 모든 순간을 두 손으로 잡으라고 충고합니다. "네가 그렇게 현재를 붙잡고 있으면 결과는 네가 내일이라는 날에 덜 의존하게 될 것이다. 인생은 미뤄놓는 동안에 이미 휙 지나가버리는 것이다."(p126) 그간 내일의 나에게 죄책감 드는 하루들이 많았는데 스토아 학파의 가르침대로 조금은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밖으로도 여러 철학자들이 등장해 우리 삶에 물음표를 던집니다.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위해 서로 의지한다고 생각한 아리스토텔레스, 그는 인간이 무엇으로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를 궁리해요. 피천득 시인과는 달리 "인생은 멋진 소풍이 아니다."(p237)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언제나 이해하는 것으로 시작하라"(p357)고 말한 스피노자의 직업은 안경유리공이었는데요. 그는 잘 보인다고 생각할 때까지 그의 생각하는 안경을 갈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사랑을 보고 사랑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요. '살아지고 있다'는 자유로운 필연에 대해서는 좀 더 궁리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인간을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창조적인 존재로 본 사르트르도 있습니다. 사르트르를 알고 나면 나 자신에 대한 감정적인 학대를 확실히 덜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아무 것도 아니니까요. 되도록 우리 스스로를 완벽하게 정의하려고 애쓰지 맙시다. 사르트르를 생각하면 작가가 저절로 떠올리는 노랫말이 하나 있는데 아마 많이들 공감할 것 같아 소개해요. "인생을 뭘 하면서 살아야 할지 모른다고 자책하지 말아요. 내가 아는 가장 멋진 사람들도 22살 때 그들이 뭘 하면서 살고 싶었는지 몰랐어요. 내가 아는 가장 멋진 어떤 40대들은 아직도 몰라요."(p487) 멋진 40대도 그렇다니 좀 위로가 되는데요?

철학책을 읽는 행위를 여태 지식을 쌓는 일로 보고 접근했는데요. 생각에 기대어 철학하기를 읽는 순간엔 지식이 아니라 마음 근육을 키우는 일의 한 가지로 느꼈습니다. 보고 느끼고 실행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생각하기에 닿아있는데 그 생각의 빈 구멍들이 너무 많죠. 대체로의 우리는 그리 깊게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고 폭넓게 사유하는 사람도 아니라 혼자 들여다보면 그 구멍이 뭔지 잘 파악이 안되요. 이 생각의 빈구멍들을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철학자들이 보여주고 찾아주고 조금씩 메워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힘들거나 외롭거나 우울하거나 무책임하고 싶거나 무기력하거나 행복하지 않다고 느낄 때 왜 나만? 이라는 자기 중심적 사고로 구멍을 파고 들어가 잠수하기 보다 철학책 한 권 끼고 앉아 철학 속에서 자맥질 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운동하듯 어푸어푸, 머리를 굴리고 말씀을 듣다 보면 마음이 한결 개운해질 거에요.

아참, 작가 얀 드로스트는 <망설임>이라는 책에서 자신의 좌우명이 될 문장을 발견해요. "여기가 어디든 여기에 있다는 것은 언제나 환상적이다."(p352) 생각에 기대어 철학하기에 맞춰 다시금 풀이해 저의 좌우명으로 삼기로 합니다. "이 책이 무슨 책이든 지금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은 언제나 환상적이다." 세네카의 말도 있어요. 저는 그의 사상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 말만큼은 옳다고 생각했거든요. "수 많은 책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때, 비록 전부를 읽을 수는 없어도 되도록 많이 읽으려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p126) 오늘도 많이 읽은 하루, 마음이 충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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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패시지 1~2 - 전2권 패시지 3부작
저스틴 크로닝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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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끊임없는 욕심이 불러온 또 하나의 재앙이 지구에 내려앉았다. 시작은 네 명의 암 환자로 구성된 생태탐사단이었다. 남미의 정글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탐사대원들에게 신의 축복 같은 일이 벌어졌다. 뇌종양, 급성림프백혈병, 난소암. 죽기 전 마지막 소원으로 정글을 탐험하려던 이들은 암세포도 종양도 깨끗히 사라진 기적의 치유을 맛본다. 이뿐만이 아니다. 시각, 청각, 후각, 피부, 폐활량, 근력, 지구력이 십대와 같이 회복되었다. 죽은 성기능이 살아났고 대머리 환자는 라푼젤을 찍어도 될만큼 머리카락이 돋았다. 한타바이러스일거라 판단했던 의사도, 미국의 질병관리국도 이와 같은 사태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곳 볼리비아 정글에 환자들의 면역체계를 되살리는 일종의 바이러스 같은 것이 있다는 것. 슈퍼맨 같은 이 바이러스를 찾아 제대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넓게는 인류의 영원한 번영을, 좁게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꿈을 이룰지도 모른다는 것. 프로젝트의 이름은 노아로 결정난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방주로써의 의미가 아니라 950세까지 살아남은 노아와도 같은 인류로 신체를 재구성하겠다는 의미로써. 사이크스 대령으로부터 이와 같은 설명을 들은 FBI 요원 울가스트는 군부의 프로젝트에 몸을 담기로 결심한다. 신생아였던 딸 에바를 병으로 잃은 경험이 있는 그로서는 애초에 깊이 고민할 사안조차 못됐다.

울가스트가 대령의 명령을 받아 실험실로 전달한 피실험체들은 모두 범죄자였다. 1급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들. 차례대로 "뱁콕, 모리슨, 차베스, 배프스, 터럴, 윈스턴, 소서, 에콜스, 램브라이트, 마르티네스, 라인하르트, 카터"다. 바이러스 균을 맞은 이들은 괴생명체로 진화한다. 형광물질을 바른 듯 빛이 났고 하루에 6개씩 이가 빠지고 새로 났는데 칵테일 픽처럼 길쭉하고 날카로웠다.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잠들었으며 생식을 했다. 토끼 한 마리쯤은 2초만에 배를 가르고 뼈를 바를 수 있을 정도였으니 더는 인간으로 보기 어려웠다. 이후 트웰브라 불린 이들의 탄생이었다. 세계가 멸망하기 전 군부의 마지막 재물이 된 것은 에이미였다. 여섯 살, 살인을 저지른 창부의 딸, 바이러스 주사를 맞기 전부터 동물들과 교감하는 신비로운 능력을 갖췄던 어린애, 어쩌면 신이 내린 인류의 안배. 뒤늦게 죄책감에 빠진 울가스트가 에이미를 빼돌리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군부의 지하실을 청소하던 그레이가 프로젝트 제로의 암시에 걸려 지하의 문을 전면 개방한 것이다. 쏟아져 나온 트웰브의 공격 속에 바이러스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퍼져나가고 영문을 모르는 미국인들이 피를 쏟으며 쓰러진다. 바이러스에서 살아남은 자 "바이럴"들은 인간을 공격하고 피를 빨아먹는다. 뱀파이어와 다름없다. 미국은 멸망했다. 어쩌면 인류도. 미국 밖으로 향하는 시선이 없어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틀림없이. 에이미를 안고 군부를 탈출한 울가스트의 머리 위로 핵폭발의 잔해가 흰눈처럼 떨어져내린다. "저 산등성이가 보이지,에이미? 만약 아저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거든, 저 산등성이를 따라가렴. 절대 멈추지 말고, 온 힘들 다해 달리고 또 달려가라."(p368-369)

그리하여 다시 백년 후. 살아남은 최후의 자들로 이루어진 도시 퍼스트 콜로니, 캘리포니아 공화국 샌저신토산맥, '귀환의 날'을 기다리며 '최초의 밤'의 불을 밝혔던 콜로니의 사람들로 이야기가 옮겨간다. "한 세계가 죽고 다른 세계가 태어날 때까지 걸린 시간, 단 32분." 하나님도 일주일만에 만든 세상을 32분만에 뚝딱 지어올릴 수는 없었으므로 새로운 세계는 미숙하고 조악하며 위험하며 파렴치했다. 바이럴들은 끊임없이 인간을 공격했고 살아있는 모든 짐승의 피를 빨았다. 트웰브가 생존을 위해 인간을 사육해야 할 지경까지 내몰린 세계에서 퍼스트 콜리니의 사람들은 오늘에 처절하게 대항하지만 희망이 없다. 조명도 전기도 이제는 막바지. 길어야 3년이면 불은 꺼질테고 조명 말고는 바이럴에 대항할 길이 없는 콜로니의 사람들도 전멸을 맞을 터다. 내일이 없는 것만 같이 암울하던 밤, 장벽으로 접근하는 소녀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콜로니의 외톨이 케일럽이었다. 바이럴들이 뒤를 쫓는 모습을 보자마자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성문을 열었다. 소녀를 알아보지 못한 파수꾼이 소녀의 어깨에 활을 쏘았다. 쓰러진 소녀를 구하기 위해 또다른 파수꾼 알리시아가 장벽을 넘는다. 에이미, 산맥을 달리고 달려 어딘가로 사라졌던 소녀의 귀환이었다.

대박!! 각 권 500이 넘는 쪽수에 깨 뿌려놨나 싶게 작은 글자 앞에서 후들후들 떨었는데 잠도 못자고 읽을만큼 재미나서 3부 중 겨우 1부만이 번역됐다는 사실에 하마터면 울 뻔 했다. 세계가 멸망하기까지의 과정도 물론 재미나지만 원정대를 꾸려 콜로니를 탈출한 피터, 알리시아, 케일럽, 마이클, 사라, 홀리스, 모사미, 무엇보다 에이미가 함께 하는 여정이 이 책의 백미나 다름없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부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 이전 문명의 그립고 놀라운 흔적들을 발견하는 일, 숨겨진 식량을 습득하거나 물자사냥에 나서는 일, 바이럴과 대항하며 협력하고 우정을 쌓는 일, 사랑을 깨닫고 확인하는 일, 에이미의 몸에 숨겨진 비밀을 발견하는 일, 무엇보다 패시지 1부의 또다른 주인공이라 할만한 피터가 소극적이고 수줍음 많고 꾹꾹 눌러 숨기고 있던 열등감에서 벗어나 그룹의 용맹한 대장으로 성장하는 모습 앞에서 너무 좋아 침이 꼴깍, 카타르시스 뿜뿜으로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세계의 질서를 되찾으려면 뱁콕을 비롯한 트웰브를 소멸시켜야 한다는 걸 알게 된 원정대. 노아 프로젝트는 백 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드디어 제 이름을 되찾게 된다. 대홍수의 침몰에서도 살아남은 노아처럼 트웰브라는 홍수 속에서도 인류는 그들의 씨를 말리고 살아남게 되리라. 에미미를 방주로 한 피터와 친구들의 다음 여정이 얼른 돌아왔으면 좋겠다. 비둘기를 날려보내는 아름다운 날을 하루 빨리 만났으면!!

**참고로 패시지 2부 트웰브는 2020년에 발간된다고 한다. 영어를 잘해서 원작을 읽을 줄 알면 좋았을텐데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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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정명수 옮김 / 모모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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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오늘의 작가상"이 발표됐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 수상 작가 김초엽의 소감이 인상적이다. "그가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다른 우주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되었으면 좋겠다. 미스터리로 가득한, 신비롭고 따뜻한 행성을 걷는 즐거움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그 여행의 끝이 너무 외롭거나 쓸쓸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 맞아. 그 여행 참 재밌었지.” 돌아와 생각하면서도 눈을 감고 잠들기 전에는 그런 생각이 스쳐 갔으면 좋겠다. 번뜩, 어린 왕자가 생각났다. 김초엽 작가는 우리 독자들을 "어린 왕자"로 만들고 싶은건지도 모르겠다. 김초엽의 행성들을 즐겁게 여행하던 가을 초입의 기분 좋은 나날들을 떠올리다 생택쥐페리의 진짜 <어린 왕자>를 꺼내든다. 모모북스에서 출간한 노란 양장 표지가 작고 가볍고 예쁜 책이다.

"만일 네가 친구를 원한다면 나를 길들여 줘!"(p102)행기 조종사인 "나"는 사막에 불시착했다. 일주일치의 마실 물을 안고 수리작업을 하는 그의 곁에 다가온 한 꼬마가 얘기한다. "저기.... 양 한 마리만 그려 줘!" 승객도 다른 승무원도 없이 혼자 비행기를 몰다 고립된 이 사막에 사람이라니! 어린 아이라니!!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놀라 벌떡 일어난다. 꼬마는 "나"의 마음도 모른 채 심각한 얼굴로 재차 요구한다. "양 한 마리만 그려 줘." 결국 6살 이후 처음으로 "나"는 그림을 그린다. 꼬마는 아무렇게나 휘갈긴 상자 그림에서 양을 발견한다. 잠든 양을 본다. 그렇게 "나"와 어린 왕자는 친구가 된다.

"그런 것을 가지고는 정말 위대한 왕자는 되지 못할 거야."(p97)행성 B612(추정)에서 살던 어린 왕자는 네 개의 가시가 있는 허영심 많은 장미 때문에 불행해졌다. 장미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의심하거나 사소한 말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삶이 고단해졌던가 보다. 의자를 몇 걸음 당기기만 해도 석양을 볼 수 있는 작은 별이니까 떨어져있기도 힘들었을테고 결국엔 별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무릎께 밖에 안오는 활화산 두 개를 청소하고 사화산 하나도 정성을 다해 치웠다. (솔질을 했을까?) 바오바브 나무의 싹들을 걷어치우고 장미에게 인사하던 아침 어쩌면 오후, 장미가 고백한다. "제가 어리석었어요. 미안해요. 행복해야 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이럴 수가. 장미녀석 아주 못된 녀석인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반성 후 어린 왕자 등을 떠민거였다. 결심한 이상 망설이지 말라고. 어린 왕자는 자존심 때문에 울지도 못하는 장미를 뒤고 한 채 별을 뜬다.

"어른들은 정말로 완전히 이상해."(p70) 첫 번째 별에는 왕이 살았다. 입고 있는 담비 망토로 전 국토를 덮을 수 있는 작은 별에서 국민도 신하도 없이 왕노릇을 했다. 왕은 떠나겠다는 어린왕자에게 대사직을 수여한다. 두 번째 별에는 숭배받길 원하는 허영쟁이가 살았다. 갈채를 보내는 사람들을 위해 커다란 모자를 썼지만 어린 왕자 외에는 스쳐가는 이조차 없다. 세 번째 별의 주인은 술꾼이다. 그는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데 부끄러움은 또 술 때문이라는 고역에 빠져있다. 네 번째 별에는 사업가가 살았다. 그는 하루 웬종일 별들의 수를 센다. 그 별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도 어쨌든 소유한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다섯째 별의 가로등지기는 어린 왕자가 처음으로 친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 어른이다. 그는 명령에 의해 가로등을 끄고 켜기를 반복하는데 해가 거듭될수록 별이 도는 속도가 빨라져서 이제는 1분에 한번씩 불을 껐다 켠다. 여섯 번째 별의 지리학자는 소문만 듣고 어린왕자에게 지구별을 추천한다. 덕분에 어린 왕자가 지구에 왔다.

"정말 재미있겠다! 아저씨는 5억 개의 방울을 가지게 되고, 난 5억 개의 우물을 가지게 되고."(p132) 어린 왕자는 달빛 색깔의 똬리 같은 뱀을 만나고 꽃잎이 세 개 달린 볼품없는 꽃을 만나고 메아리를 만나고 5000 송이나 되는 장미화원을 만나고 여우를 만난다. 길들인다는 것, 관계를 맺는다는 것, 무엇보다 책임을 알게 되고 별에 혼자 남은 장미를 그리워한다. 가장 마지막으로 만난 이가 바오바브 나무를 먹어줄 양을 선물한 비행기 정비사 "나"였다. 그는 어린 왕자에게 양을 선물하면서 양의 부리망에 가죽끈을 덧붙이는 걸 잊는다. "나"는 혹여 어린 왕자의 장미가 잘못되었으면 어쩌나 걱정하지만 독자인 나는 끄덕없다고 생각한다. 어린 왕자와 떨어져있는 동안 장미 또한 네 개의 가시를 더욱 단단하고 옹골차게 키웠을테니까.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다. 양 한 마리가 장미꽃을 먹었느냐 먹지 않았느냐에 따라 우주 전체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p136) 유명한 구절들이 너무 많아 읽었다고 착각하기 쉬운 책이다. 가끔은 어린 왕자 속 얘기가 아닌 것까지 어린 왕자의 힐링 어록이라며 짤이 돌아다니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것!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뭔지 아니? / 흠.. 글쎄요. 돈 버는 일? 밥 먹는 일?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는 건 기적이야." 같은 거. 슬프게 공감가는 문장인데 어린 왕자에는 사실 이런 이야기가 없다. 친숙하고 익숙한 문장들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철학적이고 아름답고 우화 같이 재미난 이야기로 꽉 찬 책이다. 김초엽 작가가 우리 독자들에게 바랬던 우주 여행을 일찍이 성공시킨 작가의 가장 성공한 책이기도 하고. 어린 왕자를 어여쁜 문장으로뿐만 아니라 꼭 책으로 함께 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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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 수업 365 1일 1페이지 시리즈
데이비드 키더.노아 D. 오펜하임 지음, 허성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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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7명, 감수자가 6명. 수석 논설위원, 교사, 컴퓨터공학박사,월스트리트저널 기자, 연구원, 교수, 각계각층의 전문가들이 이 책 한 권을 위해 뭉쳤습니다.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 수업!!" 역사, 문학, 미술, 과학, 음악, 종교, 철학, 종교의 7파트를 365개의 손바닥만한 크기의 교양으로 채워넣은 책인데요. 기획 의도는 1일 1지식 하루 1분의 교양 쌓기인데 한번 펼치면 의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사실 한달치 정도는 부담없이 쭉쭉 읽어내리게 됩니다. 짧고 간략하고 재미있는 내용으로 핵심만 콕콕 짚어줘서인 것 같아요.

 

4000년 전 고대 이집트인이 노예와 의사소통 하기 위해 만든 글자가 알파벳이라는 거 혹시 아시나요? 어디까지나 추정이긴 하지만 이집트의 노예가 본국으로 귀국하며 알파벳도 함께 유럽 각국으로 퍼지지 않았겠나 하는 썰이 흥미로웠습니다. 세종대왕님이 고대 이집트에서 태어났으면 참 좋았을텐데 자꾸만 아쉬움이 생겨요. 율리시스 하면 호메로스만 떠올리는 저였는데 1922년 제임스 조이스 작 <율리시스>가 따로 있었더라구요. 20세기 최대의 작품으로 셰익스피어 이후 가장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는 작가로 손꼽힌다는데 단 8개의 긴 문장에 쓰여진 단어가 2만 4000개 이상이라나요? 불륜한 아내가 실은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세줄쯤 번역한 문장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그 세 줄만 봐도 제가 소화할 수 있는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독자님들은 어떤가 궁금해 책을 검색해봤더니 한 독자님께서 장식품으로 잘 꽂아두고 있다셔서 껄껄 웃었어요. 라스코 동굴 벽화는 1948년에 일반대중에게 공개되었다가 하루 평균 1200명에 이르는 관광객 때문에 작품이 너무 많은 손상을 입었대요. 결국 63년에 동굴이 폐쇄되었고 대중들의 요구가 너무 열렬해 83년에 2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실제 크기 동굴을 복제해 전시를 했다는군요.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는 사진들은 진품 동굴 사진인지 복제품 동굴 사진인지 급 궁금해지더라구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당한만큼 갚아주는 함부라비 법전을 속시원하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는데요. 함무라비 법전에도 말 못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여자는 술집에 출입해도 사형, 아내가 가출해도 사형, 마녀재판도 아닌데 고소 당하면 피고소인 물에 뛰어들라고도 했다네요. 유죄면 물에 빠져 죽을 것이요 무죄면 살 것이니 중세 마녀재판이 혹시 함무라비 법전에서 힌트를 얻은 거였을까요?

 

저는 계획성 없이 책을 좀 마구잡이로 읽었는데요. 출판사 블로그를 방문하시면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교양 수업 365를 위한 챌린지 스티커판이 공유되고 있어요. 다이어리 쓰듯이 매일 한바닥씩 공부하고 스티커를 채우면 하루치씩 쌓이는 지식과 더불어 남다른 재미와 뿌듯함을 느끼실 수 있을 거에요. 흥미진진한 갖가지 이야기들로 폭넓은 앎의 의의를 깨우쳐주는 책, 무엇보다 쉽고 재미있어서 추천하는 책, 1년 365일 이 책으로 교양을 쌓아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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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틈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지넷 윈터슨 지음, 허진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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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무인도에 가져갈 세 권의 책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으로 완성한 책이 있다. 무인도의 이상적 도서관(프랑수아 아르마네, 문학수첩)이다. 작가는 메일을 보내면서 추신으로 성경과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제외해 달라고 요청한다. 많은 작가들이 추신을 무시하고 대답한다. "셰익스피어요!!" 작가들의 작가, 모든 시대의 작가, 이상적인 서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작가, 서거 400주년에도 여전히 후대 작가들의 영감이 되는 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기리기 위해 호가스 출판사가 기획하고 7명의 작가가 뭉쳐 글을 썼다. 시작은 지넷 윈터슨, 겨울 이야기를 다시 쓴 <시간의 틈>이다.

시칠리아의 왕 레온테스는 친우 보헤미아의 왕 폴렉세네스와 아내 헤르미오네의 불륜을 의심한다. 임신 중인 아내의 뱃속에 자신이 아닌 폴렉세네스의 아이가 있다는 생각은 그를 미치게 만든다. 폴렉세네스에 대한 독살 시도는 신하 카밀로의 경고로 좌절되고 폴렉세네스의 탈출은 레온테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다. 딸이 태어나자 아내의 부정을 더욱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레온테스. 급기야는 재판을 진행한다. 헤르미오네의 정숙한 성품을 알기에 온 왕궁의 사람들이 그를 말린다. 억울한 마음에 레온테스의 분노는 더욱 커지고 급기야는 아이를 내다버리는 지경에 이른다. 델피의 신탁이 도착했다. 헤르미오네 무죄! 폴릭세네스 무죄! 아이 역시 무죄! 죄인 레온테스는 들으라. 버린 아이를 되찾지 못하면 너는 후계자를 갖지 못할 것이다! 예언에 레온테스가 광분한다. 전령이 뛰어온다. 레온테스의 외아들 마밀리우스의 사망 소식. 헤르메오네가 실신하고 레온테스는 회개한다. 늦었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렸다. 느님은 우리를 벌할 필요가 없다. 우리 스스로 벌할 수 있으니까.(p33)

<시간의 틈>의 기본 줄거리와 캐릭터는 원작과 동일하다. 차이가 있다면 보헤미아의 왕 폴렉세네스를 분한 현대인 지노가 동성애자이며 시칠리아의 왕 레온테스로 분한 리오와 십대 시절 연애를 한다는 것 정도일까? 그들은 연애가 아니라고 하지만 시간을 나누고 키스를 하고 몸을 섞고 서로를 위해 입을 다물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연애가 아니면 또 무얼까? 동성애자라기 보다 양성장애자라는 말이 더욱 적합할 수도 있겠다. 지노는 리오와 그의 아내 미미 모두를 사랑했으니까. 리오 또한 마찬가지다. 읽다 보면 리오가 질투하는 것이 소년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사랑하는 아내 미미인지, 말 그대로 소년인, 이었던, 회색 눈동자가 아름다운 남자 지노인지 알 수 없다. 미미로 태어난 헤르미오네 또한 남편의 부정을 의심한다. 미미를 처음 만난 날, 프랑스를 산책하며 창녀를 산 남자, 미미는 리오를 잘 안다. 안다고 믿었다. 어째 관능적이고 질퍽하고 타락한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전혀. 황사로 흐려진 하늘처럼 감추는 게 많고 텁텁한 관계. 그들이 서로를 오해하고 관계의 창을 닫은 것이 이해가 간다. 독을 쌓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무의식 중에라도. 때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 마음이 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p37)

이야기를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은 잃어버린 아이를 주운 남자와 그의 아들이다. 솁과 클로.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기 퍼디타를 잃어버린 사랑의 설명서로 이해한 따뜻한 부자. 퍼디타는 그들 속에서 사랑과 음악으로 성장한다. 작가에 따르면 "하나의 이야기에 가능한 결말은 세 가지밖에 없다."(p395) 그래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를 제외한다면 세 가지 가능한 결말은 이렇다. "복수, 비극, 용서." 셰익스피어의 인상적인 이야기들은 대체로 비극으로 끝나지만 겨울 이야기는 새로운 삶을 암시하며 낙천적으로 마무리 된다. 시간의 틈은? 작가는 그를 모르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뜬금없이 소설 속에서 튀어나와 고백한다. 나도 모르는 새 작가 후기를 펼쳤는가 싶어 감짝 놀랐다. "30년이 넘도록 나에게는 이 희곡이 개인적인 글이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 입양된 업둥이 그리고 동성애자, 그는 퍼디타였고 지노였고 리오였고 어쩌면 헤르미오네였을 수도 있겠다. 비극이 아니라 희극으로 마무리 된 글에 그래서 안심이 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만든 건 항상 자리를 비우는 신이 아니라 추락자, 루시퍼 같은 인물이라는 거지. 우리는 죄를 짓거나 지위를 잃은 게 아니야, 우리 잘못이 아니었지.우리는 이렇게 태어났어. 우리가 무얼 하든 그건 결국 추락이야.걷는 것조차 일종의 잘 통제된 추락이지." 우리가 이걸 안다면 고통을 견디는 게 더 쉬울 거야."(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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