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린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정명수 옮김 / 모모북스 / 2019년 10월
평점 :
2019년 "오늘의 작가상"이 발표됐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 수상 작가 김초엽의 소감이 인상적이다. "그가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다른 우주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되었으면 좋겠다. 미스터리로 가득한, 신비롭고 따뜻한 행성을 걷는 즐거움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그 여행의 끝이 너무 외롭거나 쓸쓸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 맞아. 그 여행 참 재밌었지.” 돌아와 생각하면서도 눈을 감고 잠들기 전에는 그런 생각이 스쳐 갔으면 좋겠다. 번뜩, 어린 왕자가 생각났다. 김초엽 작가는 우리 독자들을 "어린 왕자"로 만들고 싶은건지도 모르겠다. 김초엽의 행성들을 즐겁게 여행하던 가을 초입의 기분 좋은 나날들을 떠올리다 생택쥐페리의 진짜 <어린 왕자>를 꺼내든다. 모모북스에서 출간한 노란 양장 표지가 작고 가볍고 예쁜 책이다.
"만일 네가 친구를 원한다면 나를 길들여 줘!"(p102) 비행기 조종사인 "나"는 사막에 불시착했다. 일주일치의 마실 물을 안고 수리작업을 하는 그의 곁에 다가온 한 꼬마가 얘기한다. "저기.... 양 한 마리만 그려 줘!" 승객도 다른 승무원도 없이 혼자 비행기를 몰다 고립된 이 사막에 사람이라니! 어린 아이라니!!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놀라 벌떡 일어난다. 꼬마는 "나"의 마음도 모른 채 심각한 얼굴로 재차 요구한다. "양 한 마리만 그려 줘." 결국 6살 이후 처음으로 "나"는 그림을 그린다. 꼬마는 아무렇게나 휘갈긴 상자 그림에서 양을 발견한다. 잠든 양을 본다. 그렇게 "나"와 어린 왕자는 친구가 된다.
"그런 것을 가지고는 정말 위대한 왕자는 되지 못할 거야."(p97) 소행성 B612(추정)에서 살던 어린 왕자는 네 개의 가시가 있는 허영심 많은 장미 때문에 불행해졌다. 장미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의심하거나 사소한 말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 삶이 고단해졌던가 보다. 의자를 몇 걸음 당기기만 해도 석양을 볼 수 있는 작은 별이니까 떨어져있기도 힘들었을테고 결국엔 별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무릎께 밖에 안오는 활화산 두 개를 청소하고 사화산 하나도 정성을 다해 치웠다. (솔질을 했을까?) 바오바브 나무의 싹들을 걷어치우고 장미에게 인사하던 아침 어쩌면 오후, 장미가 고백한다. "제가 어리석었어요. 미안해요. 행복해야 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이럴 수가. 장미녀석 아주 못된 녀석인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반성 후 어린 왕자 등을 떠민거였다. 결심한 이상 망설이지 말라고. 어린 왕자는 자존심 때문에 울지도 못하는 장미를 뒤고 한 채 별을 뜬다.
"어른들은 정말로 완전히 이상해."(p70) 첫 번째 별에는 왕이 살았다. 입고 있는 담비 망토로 전 국토를 덮을 수 있는 작은 별에서 국민도 신하도 없이 왕노릇을 했다. 왕은 떠나겠다는 어린왕자에게 대사직을 수여한다. 두 번째 별에는 숭배받길 원하는 허영쟁이가 살았다. 갈채를 보내는 사람들을 위해 커다란 모자를 썼지만 어린 왕자 외에는 스쳐가는 이조차 없다. 세 번째 별의 주인은 술꾼이다. 그는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는데 부끄러움은 또 술 때문이라는 고역에 빠져있다. 네 번째 별에는 사업가가 살았다. 그는 하루 웬종일 별들의 수를 센다. 그 별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도 어쨌든 소유한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다섯째 별의 가로등지기는 어린 왕자가 처음으로 친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 어른이다. 그는 명령에 의해 가로등을 끄고 켜기를 반복하는데 해가 거듭될수록 별이 도는 속도가 빨라져서 이제는 1분에 한번씩 불을 껐다 켠다. 여섯 번째 별의 지리학자는 소문만 듣고 어린왕자에게 지구별을 추천한다. 덕분에 어린 왕자가 지구에 왔다.
"정말 재미있겠다! 아저씨는 5억 개의 방울을 가지게 되고, 난 5억 개의 우물을 가지게 되고."(p132) 어린 왕자는 달빛 색깔의 똬리 같은 뱀을 만나고 꽃잎이 세 개 달린 볼품없는 꽃을 만나고 메아리를 만나고 5000 송이나 되는 장미화원을 만나고 여우를 만난다. 길들인다는 것, 관계를 맺는다는 것, 무엇보다 책임을 알게 되고 별에 혼자 남은 장미를 그리워한다. 가장 마지막으로 만난 이가 바오바브 나무를 먹어줄 양을 선물한 비행기 정비사 "나"였다. 그는 어린 왕자에게 양을 선물하면서 양의 부리망에 가죽끈을 덧붙이는 걸 잊는다. "나"는 혹여 어린 왕자의 장미가 잘못되었으면 어쩌나 걱정하지만 독자인 나는 끄덕없다고 생각한다. 어린 왕자와 떨어져있는 동안 장미 또한 네 개의 가시를 더욱 단단하고 옹골차게 키웠을테니까.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다. 양 한 마리가 장미꽃을 먹었느냐 먹지 않았느냐에 따라 우주 전체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p136) 유명한 구절들이 너무 많아 읽었다고 착각하기 쉬운 책이다. 가끔은 어린 왕자 속 얘기가 아닌 것까지 어린 왕자의 힐링 어록이라며 짤이 돌아다니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것!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뭔지 아니? / 흠.. 글쎄요. 돈 버는 일? 밥 먹는 일?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는 건 기적이야." 같은 거. 슬프게 공감가는 문장인데 어린 왕자에는 사실 이런 이야기가 없다. 친숙하고 익숙한 문장들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철학적이고 아름답고 우화 같이 재미난 이야기로 꽉 찬 책이다. 김초엽 작가가 우리 독자들에게 바랬던 우주 여행을 일찍이 성공시킨 작가의 가장 성공한 책이기도 하고. 어린 왕자를 어여쁜 문장으로뿐만 아니라 꼭 책으로 함께 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