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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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 작아서 호러에 매우매우 약한 저. 한여름도 아니고 한겨울에 웬 호러 미스터리냐고 생각했어요. 표지 속 소녀의 눈동자부터가 오싹해서 후들후들 떨면서 책을 잡았는데 이럴 수가! 호러 소설에서도 따땃하고 포근한 온기를 느껴요. 그간 제가 읽은 소설들이 앵간히 팍팍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노곤노곤 마음이 풀어질 거라고 장담합니다. 호러 소설도 이렇게 여운 가득할 수 있구나, 상냥할 수 있구나, 읽는 내내 감탄했거든요. 총 8편의 단편 모음집이에요. 하나하나 소개해 드릴게요.

1.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

어느날부턴가 집에서 귀신을 보게 되는 아내와 남편. 처음엔 혼자 헛것을 보는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부부가 동시에 귀신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남편이 신경쇠약에 걸려 회사에서 졸도할 지경에 이르자 부부는 귀신의 정체를 찾는 추리를 시작합니다. 보통 귀신들이 사람 앞에 나타나는 이유가 뭘까요? 원한이 맺혀서? 원한을 풀어달라고? 그런데 암만 따져봐도 이들 부부는 너무 평범해서 귀신이 붙을 건덕지가 없어요. 도대체 왜 귀신은 부부의 앞에만 나타나는 걸까요? 그리고 겁먹는 남편과 달리 왜 아내는 귀신의 존재를 달가워할까요? 결말부를 읽고 나면 괜히 코 끝이 찡해진답니다.

2. 머리 없는 닭, 밤을 해매다

할머니가 계신 시골에 전학온 마키오가 유일하게 사귄 친구는 후코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이모의 집에서 학대받는 후코는 학교에서도 왕따를 당하는데요. 두 아이들은 방과 후에 몰래 만나 비밀을 공유합니다. 머리 없는 닭 교타로의 존재를 말이죠. 부모님이 사주신 닭을 소중히 하는 모습에 약이 오른 이모가 후코가 보는 앞에서 닭의 머리를 쳐버립니다. 어쩐 일인지 교타로는 죽지 않아요. 아이들은 밤이면 교타로와 들판을 산책하고요. 잘린 목으로 물도 먹이고 모이도 준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후코가 실종됩니다. 후코를 찾아 집을 나선 마키오, 소녀의 용기에 탄복하는 동시에 눈물이 울컥 쏟아졌어요. 머리 없는 닭의 존재가 초반에는 무서운데 읽을수록 짠합니다. 아참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마이크라고 1945년에 실제로 머리가 없는 채로 생존한 닭의 사진이 떠요. 후덜덜덜.

3. 곤드레만드레 SF

술에 취하면 미래의 시간을 엿볼 수 있는 N의 여자친구. N은 여자친구의 장기를 이용해 돈 벌 궁리가 없나 싶어 선배인 "나"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처음부터 내 여자친구는 초능력자, 라고 자랑했던 건 아니구요. "나"가 작가인만큼 소설 소재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힌트를 얻지요. 경마로 큰 돈 벌어 떵떵거리고 살게 된 어느 날 아뿔사, 술 취한 여자친구는 보라는 경마는 안보고 피 흘리며 쓰러진 N의 모습을 목격한 후 대성통곡 하며 술에서 깨려고 해요. 잔뜩 겁먹은 N은 다시 선배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선배 저 좀 살려주세요!!! 과연 N은 예견된 미래를 벗어나 생존할 수 있었을까요?

4. 이불 속의 우주

의욕을 상실한 채 몇 년이나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는 작가 T. 아내와 이혼하고 자취를 시작했는데 최소 덮는 이불 하나는 있어야겠다 싶어 중고매장을 찾은 그밤부터 이상한 일을 겪습니다. 이불을 덮고 누웠는데 이불 속에서 털이 복슬복슬한 동물이 만져지고요. 어느 밤엔 간질간질 보리 이삭이 발 끝을 스칩니다 . 뾰족한 비늘이 발바닥을 할퀴 귀도 해요. 암만 생각해도 이불을 통해 다른 행성이랑 연결되는 것 같단 말이죠.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자가 나타난 거에요. 긴 머리카락이 발가락 사이를 스치고 올라오는가 싶더니 점점 온몸으로 여자의 알몸이 느껴집니다. 해를 끼치지는 않아요. 매일 밤 조용한 짐승처럼 등 뒤에 누워 가만가만 숨을 내쉬거나 키득키득 어깨를 들썩일 뿐. 요술이불을 덮은 후로 시작된 영감으로 매일 밤 글을 쓰던 작가 T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아침. 그 이불 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5. 아이의 얼굴

함께 고등학교를 다녔던 세 명의 친구가 연쇄적으로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요시나가 가오루는 끔직한 진실을 전하는 친구의 편지를 들고서 부질없이 과거를 후회합니다. "태어난 아기들이 자살한 친구의 얼굴을 하고 있어." 낙태까지도 결심하지만 평범한 가치관의 남편이 이에 동의할 리 만무. 하루하루 두려움에 몸부림 치다가 닥쳐온 출산의 날, 요시나가 가오루가 보게 된 얼굴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녀는 과연 자신이 품은 아이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6. 무전기

2011년 3월 11일의 쓰나미는 일본에 남은 여전히 거대한 상처이자 작가들의 영감이 되는 소재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츠지무라 미즈키의 신간 <파란 하늘과 도망치다> 속에도 쓰나미의 생존자들이 등장하는데 이곳 무전기에서도 그때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더라구요. 아들과 아내가 하루아침에 실종되어 버린 후 슬픔에 허우적대는 가장. 술에 취해 목을 매어 죽으리라 결심한 밤 아들과 함께 가지고 놀던 무전기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빠, 아빠 치이이이익, 아빠 거기 있어?" 귀신은 없다고 귀신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노래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더 많은 밤 술을 마시고 취해있기로 결심합니다. 아들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다면 마시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니까요. 아들의 목소리는 어떻게 지상으로 내려온 걸까요? 정말로 귀신이 존재하는 걸까요?

7.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폭력적인 남편과 이혼해 딸과 함께 친정으로 돌아온 아내. 딸에게 아빠를 뺏지는 않겠다는 의지로 한달에 한번은 만남을 가지기로 했는데요. 세 번째 면회에서 남편이 제안을 합니다. "셋이서 다시 시작하지 않을래?" 유코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눈빛에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었겠지만 아빠를 두려워하는 아이를 알기에 가만히 고개를 저어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이 망할 년아." 소름이 쫙 돋는 대꾸에 망연자실할 겨를도 없이 남편은 거칠게 아내의 따귀를 갈깁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하반신으로 몸을 지탱해보려 하지만 그 사이 남편은 6차선 도로로 딸을 끌고 나아가요. 제발 아이를 잡아달라고 남편을 막아달라고 외치지만 주변의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어주지 않고요. 유코는 결국 남편과 함께 도로에서 사망합니다. 3년을 자살미수로 입퇴원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목소리가 들린 거에요. 여동생과 함께 한 산책길, 오로지 아내에게만 들려온 그 목소리. "엄마, 살려줘." 아내는 우울증 약을 먹고 있습니다. 환청, 환각, 모든 게 가능해요. 그렇지만 이 목소리가 정말로 환청이기만 한 걸까요? 아내는 깊은 밤 조용히 문을 열고 목소리를 쫓습니다.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내 머리가 정상일까봐 걱정하는 아내의 인생에 부디 빛이 내리기를요.

8. 아이들아, 잘 자요

마지막에 오는 이유가 있었던 소설이에요. 키드스쿨의 조장으로 임명된 안나. 여객선에서 조원이 된 아이들과 카드게임을 하던 안나는 배가 기울고 있다는 걸 알고 서둘러 아이들과 함께 구명보트로 건너가지만 중심을 잡지 못해 바다에 빠져 사망하게 됩니다. 놀란 아이들도 곧 바다에 빠지기 일보직전인 채로 우선 저승에 먼저 올라가게 된 안나, 그곳에서 천사를 만나는데요. 사자를 심사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필름을 봐야하는데 안나에게는 이 필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걸 알게 됩니다. 필름을 찾도록 도와주면 잠시 동안 지상에 내려가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시간을 주겠다는 천사장의 허락을 받지만 온데간데 없는 필름에 안나는 결국 악마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사게 됩니다. 죽는 순간에도 죽은 다음에도 저승의 감옥에 갇혀서도 오로지 아이들 걱정뿐인 안나, 그녀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구명보트의 아이들은 무사히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아이들아, 잘자요. 사람들아, 잘 자요. 잘 자요, 편안하게.(p256)" 안나가 전하는 마지막 인사가 여덟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였어요. 가슴 한 구석 오래오래 남을 여운을 품고 여러 독자들에게 추천하고픈 책입니다. 앞으로 더 다양한 작품으로 작가를 만나뵐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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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 선서 법의학 교실 시리즈 1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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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 에서 지원해준 #블루홀식스 #나카야마시치리 #함께읽는도서 입니다.

우라와 의대 법의학 교실 시리즈 제 1탄.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시작은 한 가지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당신, 시신은 좋아합니까?"(p7) 주인공 마코토는 당황합니다. 세상천지 시신이 좋아서 법의학과 오는 사람도 있습니까? 이게 지금 말이나 되는 질문이에요? 독자도 당황스럽습니다. 이거 혹시 신종 후임 갈구기 같은건가 싶어서요. 그런데 있더라구요. 산 사람보다 시신을 상대하는게 더 즐겁고 마음 편한 법의학자들이 말이죠.

미스자키 도지로로 말할 것 같으면 누구나가 인정하는 해부 천재입니다. 바다 건너 미국에까지 권위가 알려진 양반인데 대신에 성격이 더럽습니다. 고지식하고 대쪽같고 조그만 잘못도 절대 그냥 넘기는 법이 없는 꼰대 중의 꼰대. 할당량 이상으로 시체를 해부해 예산이 쪼들리는 대학과 경찰의 지탄을 받기도 하는데 그러든지 말든지 마이웨이에요. 캐시 팬들턴은 미스자키 도지로에게 반해 미국에서 유학을 왔는데 모친의 양수가 포르말린이었던 것 아니냐고 의심을 살 정도로 시신 매니아입니다. 아참, 학문적으로 반했다는 겁니다. 이성적 아니에요. 미스자키 교수님 60세도 넘은 할아버지거든요. 물론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지만 캐시는 딱 봐도 그런 타입의 여성은 아니니까요. 햇병아리 조교의사 쓰가노 마코도로 말할 것 같으면 임상연수장님의 지시로 피치 못하게 법의학과로 온 경우이다 보니 시신이 좋고 싫고가 없는데요. 덕분에 부검은 커녕 매스 한번 못잡아보고 쫓겨날 뻔 합니다. 때맞춰 시신 한구가 발견되는 바람에 활약.... 은 못하지만 법의학과에 발 붙일 구실이 생겨 살아(?)남아요. 그리고는 차츰차츰 시신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법의학자로 성장해가죠.

책에는 어릴 적 친구들과 술을 마신 후 강가에서 잠들었다 죽어버린 미네기시 도루의 사체 "산 자와 죽은 자", 결혼식이 며칠 남지 않은 상태에서 차에 치여 죽고만 구리타 마스미의 사체 "가해자와 피해자", 콘크리트 방파제에 경정보트가 부딪치며 사망한 마야마 신지의 사체 " 감찰의와 법의학자", 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폐렴으로 사망한 가시와기 유코의 사체 "어머니와 딸", 열 살밖에 안됐는데 병원에서 죽고만 어린이 환자 구라모토 사유키의 사체 "위약과 서약" 등 살아있는 인간들처럼 거짓말을 일삼지도 않고 자신의 처우에 불평할 수도 없는 사자들이 들려주는 다채로운 죽음의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범인을 잡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범인이 아님을 밝혀내는 구제 사건 또한 담겨있어서 읽고 나면 어째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까지 들어요. 시치리 작품치고는 사건도 캐릭터들도 평범한 편이지만요. 한국만큼, 어쩌면 한국 이상으로 부검에 의려움을 겪는 일본 의료계의 현실을 고발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라 흥미롭구요. 원치 않게 법의학과에 들어가 시간만 떼우자 했던 쓰가노 마코토와 마코토를 이끌며 사건에 뛰어드는 열혈형사 고테가와의 성장을 다루고 있어 귀엽기도 합니다. 소재는 이래도 가독성도 좋고 편안하게 읽히는 미스터리라 추천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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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2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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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 에서 지원해준 #비채 #요네스뵈 함께 읽는 도서입니다.

방콕의 모텔에서 노르웨이의 대사가 사망한다. 칼에 찔린 상태였고 발견한 사람은 대사가 구매한 사창가의 여자였다. 총리의 죽마고우이자 긴 시간 정치적 동반자였기에 선거를 앞둔 총리파의 일원들이 모여 대사의 사망을 조용히 묻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다. 그리하여 선택된 것이 해리 홀레.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살해당한 노르웨이 여성의 진범을 밝혀내며 일약 스타가 된 형사였다. 사랑하는 연인이 살해당했다는 충격으로 해리는 다시금 알콜 중독 상태다. 지적 장애가 있는 여동생이 성폭행을 당하여 마음은 한층 피폐해졌고 아버지의 침묵과 여동생의 범인을 체포하지 못했다는 좌절감에 비애를 느낀다. 경찰서에 출근도장은 찍고 있지만 딱 거기까지. 잘리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지만 그의 직속상관은 어쨌든 해리를 믿고 있는 듯 하다. 그는 살인수사를 맞기에는 지나치게 방만해진 상태임을 자백하고 출장을 거부하지만 윗선의 지시를 무시할 수 없어 결국 방콕행 비행기를 탄다.

한 마리가 눈에 띄면 사실상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있는 개체 수가 열 마리 백 마리를 넘어간다는 바퀴벌레. 방콕의 바퀴벌레는 성매매자들이다. 여자, 동성애자, 트렌스젠더, 아동을 욕망하며 돈을 뿌리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최악은 소아성애자들이다. 해리 홀레 또한 한 소년에게 껌을 샀다가 미소를 짓기는커녕 잔뜩 겁을 먹는 모습에 어리둥절한 적이 있다. 알고 보니 껌은 명목일 뿐 그 거리에서 실제로 팔리는 것은 껌을 파는 소년이었는데 19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빡빡 머리, 흉터 가득한 얼굴의 해리에게 자신이 팔린다고 생각한 소년의 공포를 상상하자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휴가 나온 미군들이 풀어제끼는 외화를 쫓아 들어선 방콕의 저급한 유흥문화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화려하게 살아남아 전세계의 성매수자, 성범죄자들을 끌어모은다. 대사의 가방에서도 아동에게 성욕을 푸는 남성의 사진이 발견되는데 대사 자신이 소아성애자였는지 아니면 누구를 협박하기 위한 용도로 찍은 것인지 알 수 없어 해리는 거기서부터 사건을 풀어나간다. 그리고 목격한다. 밟아죽여도 시원치 않을 추접한 족속들이 꿈틀대는 방콕의 그늘 밑을 말이다.

김기창 작가는 소설 <방콕>에서 얘기한다. 하나의 생명체에게 지옥인 곳이 다른 생명체에게 천국일 수는 없다고. 요 네스뵈가 바퀴벌레에서 그리고 있는 주제가 김기창의 그 말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천사의 도시라기에는 바퀴벌레에게 좀 먹히는 존엄이 너무나 많고 바퀴벌레 사육이 목적인 양 도시를 더럽히는 쓰레기가 지나치게 비대하다. 쾌락이라는 손 쉬운 돈벌이가 쉽게 쓸려나가거나 치워지지 않을 것을 알아서 읽는 내내 안타까울 수 밖에 없었다. 해리 이상으로 마음 속에 남은 남자는 한국전쟁에도 참전한 적이 있는 대사관 직원 이바르 뢰켄이다. 그는 다섯살도 되기 전에 양부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성장하며 그 자신이 아동을 성적 대상으로 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게 어떤 고통인 줄 알면서도 누군가는 아동에게 손을 뻗지만 뢰켄은 아니었다. 그는 군에 들어가고 군에서 쫓겨난 후에도 계속해 전쟁통 같은 환경에 스스로를 내몰며 욕망을 억누른다. 아동을 욕망하는 꿈을 꾸고 깨어나 절규할지언정 돈으로 어린애를 사지 않는다. 몸을 파는 사내에들이 껌 한 통 들고 나와 거리를 헤매는 방콕의 뒷골목에서도 뢰켄은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고 상대의 존엄을 사수한다. 바퀴벌레의 후반부는 내내 그의 생존을 바라며 책을 읽었던 것 같다. (그는 해리 홀레를 성실하기는 하나 어딘지 좀 모자라는 후임 보듯 했는데 사람을 잘 보는 양반이었다. 박쥐 때의 실수를 알아서 결말이 내심 불안하더라니 역시나.......ㅠㅠ)

해리 홀레 시리즈를 관통하는 그 나라 그 시대의 풍부한 배경들이 좋다. 그러나 지나치게 잔혹해서 마음이 번잡하고 어질어질해지는 것 또한 사실. 여성과 아동을 대상으로 한 연속된 성범죄의 목격이 피로감을 누적시킨다. 범죄 양상이 동일하게 계속된다면 시리즈를 포기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걱정이 될 정도. 레드브레스트에서는 좀 다른 양식의 차가운 추격이 펼쳐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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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 동화전집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1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한스 테그너 그림, 윤후남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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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왕국의 흥행 덕분에 겨울왕국의 모티브가 된 눈의 여왕과 안데르센 동화까지 관심을 받게 된 것 같다. 덕분에 나도 어릴 적 읽었던 그림동화의 원작들을 다시 읽게 되고 말이다. 완두콩 공주, 엄지 아가씨, 인어공주, 야생백조, 벌거벗은 임금님, 장미 요정, 돼지치기 왕자, 못생긴 새끼 오리, 눈의 여왕, 빨간 신, 성냥팔이 소녀, 바보 한스. 아는 동화만해도 열 손가락을 넘어가는데 모르는 동화까지 합치니 작품 수가 자그마치 168개나 된다. 해제를 빼고서도 페이지가 1254를 찍을만큼 어마어마한 숫자다. "가장 환상적인 동화는 현실에서 솟아나온다"고 말한 안데르센의 고집은 그의 동화 전반에 미쳐있었는데 "못생긴 새끼 오리"는 미운 외모에 못배우고 가난했던 안데르센의 자전적인 성장기였고, "빨간 신"은 견신례 때 신을 새신발에만 관심이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기반으로 한 동화였다. "성냥팔이 소녀"는 구걸로 연명했던 어머니의 이야기였으며, "인어공주"는 루이즈 콜린에 대한 안데르센의 짝사랑이 줄거리가 되었다. 이 밖에도 "돼지치기", "눈사람", "꿋꿋한 장난감 병정" 등 많은 동화들에서 안데르센과 안데르센이 사랑했던 여인들, 친구와 이웃의 추억이 담겼다. 근대 아동문학의 아버지, 어린이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 최초의 작가, 1800년대에 쓰여진 옛 이야기임에도 여전히 흥미롭고 재미난 동화가 어른들을 반긴다.

"게르다가 널 찾아 온 세상을 뒤졌는데, 그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인지 한번 봐야겠어."(p298) 눈의 여왕에게 납치된 친구 카이를 찾아 집을 나선 게르다. 요술쟁이 노파의 꽃밭에서, 말을 제일 잘하는 신랑을 얻은 공주님과 왕자님의 왕궁에서, 도둑의 딸 게르다의 집과 라플란드 노파와 핀란드 여자가 머무는 북극광의 하늘 아래서 신발도 없이 배를 쫄쫄 굶으며 눈보라속을 헤맨다. 어릴 적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심한 게르다의 고난에 마음이 애처로왔다. 악마의 거울 파편을 맞은 카이는 납치되기 전부터 아주아주 못된 아이가 되어 게르다에게 미운 소리만 했는데 게르다는 어쩜 이런 희생을 자처했는지 모르겠다. 어른이 되어 돌아온 집, 만발한 장미와 성큼 다가온 무더위는 기억 속의 그림책엔 없는 내용이다. 게르다의 용기와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부디 행복하길!

"아름답고 착한 것은 얼마나 빨리 사라져 버리는가! 정말 슬픈 일이야."(p217) 여동생의 약혼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오빠는 날카로운 칼을 뽑아 청년을 찔러 죽인다. 보리수 나무 밑에 묻힌 청년은 영영 잊힐 뻔 했으나 다행히 이를 목격한 자가 있었다. 여름정원의 가장 아름다운 장미꽃에 살던 요정님이었다. 요정은 처녀의 꿈에 나타나 약혼자의 행방을 알리고 처녀는 약혼자의 머리를 자신의 방 화분에 옮겨 심은 뒤 그 위에 재스민 가지를 꽂는다. 상심으로 흘리는 처녀의 눈물을 받아마시며 재스민 가지는 점점 더 싱그럽게 피어난다. 처녀마저 죽은 뒤 사악한 오빠는 여동생의 유산이라 할만한 재스민 화분을 제 침대 옆으로 옮기는데 그 밤 활짝 핀 재스민 꽃에서 무장한 요정들이 달려나와 오빠의 혀에 독침을 찔렀다. 다음날 시체를 발견한 이웃들이 침대를 둘러싸고 말한다. "재스민 향기 때문에 죽었군." 나쁜 사람을 벌하는 장미요정을 찬양하라.

뽀글뽀글 거품이 되어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인어공주는 공기의 요정이 되어 불멸의 영혼을 얻는다. 완두콩 공주를 아내로 맞은 왕자는 공주가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완두콩을 왕궁 방물관에 전시한다. 엄지공주에겐 마야라는 예쁜 이름이 있었다. 왕자는 물론이고 공주도 상대 얼굴부터 본다. 알라딘이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면 그는 트렁크를 타고 하늘을 날았을지도 모른다. 엄마 오리가 처음부터 새끼오리를 미워했던 건 아니다. 못생겼지만 튼튼하고 헤엄을 잘 치니 제 힘으로 운명에 잘 맞설거라는 믿음이 있던 때도 있었다. 그런 엄마 오리가 왜 변했느냐? 다 남의 말 때문이다. 이러쿵저러쿵 아이를 두고 갖은 입방정을 떠는 이웃들에 대한 스트레스로 엄마 오리는 출산 우울증이 왔던 것 같다. 돼지치기 왕자는 공주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는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와 공주를 비웃는다. "한낱 장난감을 가지려고 돼지치기에게 입을 맞추다니, 그럼, 잘 있으시오." 인사하며 왕국으로 돌아가 성문까지 걸어잠가 버린다. 쫓겨난 공주는 모든 것이 끝났다며 구슬피 울고 이야기는 그냥 그걸로 끝. 안데르센 동화에서는 의외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결말이 흔치 않다. 마냥 예쁘거나 마냥 귀여운 인물도 잘 없다. 꿈과 희망, 사랑으로만 꽉 찬 세상도 물론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인물, 어느 동물, 어느 인형이든 자신이 지고가야 할 몫의 짐이 있다. 동화는 그 짐들을 어떻게 이고지고 살아갈지에 대한 이러저러한 답들이다. 또 어쩌면 조금이라도 짐을 가볍게 느끼기를 바라는 안데르센의 위로다. 어른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그의 동화가 가진 위로의 힘이 우리 기억 속의 그것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은 가급적 정제된 그림동화로 안데르센을 만나기를. 비극적이고 냉혹하고 부조리한 현실은 조금 더 커서, 가급적이면 천천히 마주쳤으면 좋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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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지인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3
M. C. 비턴 지음, 문은실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해미시 맥베스는 우울한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있다. 그와 동반자이자 큼지막한 개 타우저를 옆에 앉히고서. 스코틀랜드 서부해안에 위치한 시골마을 시노선, 그곳의 경사 맥그리거가 휴가를 가있는 동안 대신 일을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안가면 안되냐고 로흐두도 위험하다고 사정사정을 하지만 씨알도 안먹힌다. 말단이 까라면 까야지 별 수가 있나. 로흐두도 자못 개방적인 편은 아니지만 이곳 시노선의 사람들은 한층 폐쇄적이다. 이사 들어온지 십수년이 된 이웃도 이방인 취급하는 그들이니 로후드에서 잠깐 발령받은 해미시야 말할 것도 없지. 달리 무슨 일이 일어나기야 하겠냐고 울적한 와중에도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아뿔싸! 해미시가 발을 들이기 무섭게 들판에서 사체가 발견된다. 아니 사체라기엔 좀 왜소한 해골이다. 살점 하나 없이 지나치게 말끔해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필수검증을 거쳐야 할 것만 같은 뼈는 윌리엄 메인워링의 것으로 판명났다. 이모의 유산을 물려받아 잉글랜드에서 이주해 온 외지인. 이모의 덕망 탓에 초반에는 적잖이 환영도 받았었다. 본인도 잘해보겠다고 가식을 좀 떨었던 모양이지만 본성이 어디가랴. 심술궂은 성격에 툭하면 시비를 걸고 사사건건 약올리며 약점을 잡아대는 악명 높은 남자는 결국 새하얀 뼈다귀가 되고 조용하던 시골 마을은 발칵 뒤집혀 언론에 아그작아그작 씹힌다. 3권에서는 영영 등장하지 않을 것 같던 해미시의 짝사랑 프리실라는 런던에서 뉴스에 나온 해미시를 본다. 해미시와 프리실라가 이 살인사건을 계기로 다시 재회할 수 있을까?

이럴 수가! 내내 순정남으로 남아 애간장을 녹일거라 예상했던 해미시는 시노선에서 새로운 여자를 만난다. 역시 추리 소설 주인공치고 바람둥이(?) 인기남(?)이 아닌 남자는 없는것인가. 상대는 남편과 이혼 후 캐나다에서 시노선으로 이주한 화가 제니 러브레이스였는데 손을 맞잡자마자 찌릿찌릿, 입술이 맞닿자마자 정신이 행방불명, 해미시는 결국 제니에게 프로포즈할 마음까지 굳힌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죽은 메인워링이 넘 재수없는 인간이라 누구 손에 죽었댄들 내 관심은 아니었고 나는 해미시가 제니랑 잘되어가는 과정에 울화통이 터져서 내내 프리실라만 찾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야 1권에서 프리실라는 딴 남자랑 데이트를 했고 2권에서는 약혼도 했고 3권에서는 또 딴 남자랑 데이트를 했지만 해미시는 계속 좀 찌질하게 남아줘도 괜찮았잖아. 작가님 괜히 미워지려 하고 제니에게 살짝쿵 질투하는 프리실라를 보면서는 이 멍충아 하면서 화가 난다. 해미시를 좋아하면서 해미시가 자신을 좋아하는줄 뻔히 눈치채고 있으면서 어째서 이토록 진전이 없냔 말이다. 4권에서는 제발 프리실라만 바라봐줘, 부탁이다 해미시. 작가님이 로설을 먼저 성공하셨던 분이라 그런지 어쩐지 추리물이 아니라 연애물을 읽는 느낌으로 감상 중. 4권 현모양처의 죽음도 얼른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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