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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2월
평점 :
간이 작아서 호러에 매우매우 약한 저. 한여름도 아니고 한겨울에 웬 호러 미스터리냐고 생각했어요. 표지 속 소녀의 눈동자부터가 오싹해서 후들후들 떨면서 책을 잡았는데 이럴 수가! 호러 소설에서도 따땃하고 포근한 온기를 느껴요. 그간 제가 읽은 소설들이 앵간히 팍팍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노곤노곤 마음이 풀어질 거라고 장담합니다. 호러 소설도 이렇게 여운 가득할 수 있구나, 상냥할 수 있구나, 읽는 내내 감탄했거든요. 총 8편의 단편 모음집이에요. 하나하나 소개해 드릴게요.
1.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
어느날부턴가 집에서 귀신을 보게 되는 아내와 남편. 처음엔 혼자 헛것을 보는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부부가 동시에 귀신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남편이 신경쇠약에 걸려 회사에서 졸도할 지경에 이르자 부부는 귀신의 정체를 찾는 추리를 시작합니다. 보통 귀신들이 사람 앞에 나타나는 이유가 뭘까요? 원한이 맺혀서? 원한을 풀어달라고? 그런데 암만 따져봐도 이들 부부는 너무 평범해서 귀신이 붙을 건덕지가 없어요. 도대체 왜 귀신은 부부의 앞에만 나타나는 걸까요? 그리고 겁먹는 남편과 달리 왜 아내는 귀신의 존재를 달가워할까요? 결말부를 읽고 나면 괜히 코 끝이 찡해진답니다.
2. 머리 없는 닭, 밤을 해매다
할머니가 계신 시골에 전학온 마키오가 유일하게 사귄 친구는 후코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이모의 집에서 학대받는 후코는 학교에서도 왕따를 당하는데요. 두 아이들은 방과 후에 몰래 만나 비밀을 공유합니다. 머리 없는 닭 교타로의 존재를 말이죠. 부모님이 사주신 닭을 소중히 하는 모습에 약이 오른 이모가 후코가 보는 앞에서 닭의 머리를 쳐버립니다. 어쩐 일인지 교타로는 죽지 않아요. 아이들은 밤이면 교타로와 들판을 산책하고요. 잘린 목으로 물도 먹이고 모이도 준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후코가 실종됩니다. 후코를 찾아 집을 나선 마키오, 소녀의 용기에 탄복하는 동시에 눈물이 울컥 쏟아졌어요. 머리 없는 닭의 존재가 초반에는 무서운데 읽을수록 짠합니다. 아참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마이크라고 1945년에 실제로 머리가 없는 채로 생존한 닭의 사진이 떠요. 후덜덜덜.
3. 곤드레만드레 SF
술에 취하면 미래의 시간을 엿볼 수 있는 N의 여자친구. N은 여자친구의 장기를 이용해 돈 벌 궁리가 없나 싶어 선배인 "나"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처음부터 내 여자친구는 초능력자, 라고 자랑했던 건 아니구요. "나"가 작가인만큼 소설 소재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힌트를 얻지요. 경마로 큰 돈 벌어 떵떵거리고 살게 된 어느 날 아뿔사, 술 취한 여자친구는 보라는 경마는 안보고 피 흘리며 쓰러진 N의 모습을 목격한 후 대성통곡 하며 술에서 깨려고 해요. 잔뜩 겁먹은 N은 다시 선배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선배 저 좀 살려주세요!!! 과연 N은 예견된 미래를 벗어나 생존할 수 있었을까요?
4. 이불 속의 우주
의욕을 상실한 채 몇 년이나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는 작가 T. 아내와 이혼하고 자취를 시작했는데 최소 덮는 이불 하나는 있어야겠다 싶어 중고매장을 찾은 그밤부터 이상한 일을 겪습니다. 이불을 덮고 누웠는데 이불 속에서 털이 복슬복슬한 동물이 만져지고요. 어느 밤엔 간질간질 보리 이삭이 발 끝을 스칩니다 . 뾰족한 비늘이 발바닥을 할퀴 귀도 해요. 암만 생각해도 이불을 통해 다른 행성이랑 연결되는 것 같단 말이죠.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자가 나타난 거에요. 긴 머리카락이 발가락 사이를 스치고 올라오는가 싶더니 점점 온몸으로 여자의 알몸이 느껴집니다. 해를 끼치지는 않아요. 매일 밤 조용한 짐승처럼 등 뒤에 누워 가만가만 숨을 내쉬거나 키득키득 어깨를 들썩일 뿐. 요술이불을 덮은 후로 시작된 영감으로 매일 밤 글을 쓰던 작가 T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아침. 그 이불 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5. 아이의 얼굴
함께 고등학교를 다녔던 세 명의 친구가 연쇄적으로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요시나가 가오루는 끔직한 진실을 전하는 친구의 편지를 들고서 부질없이 과거를 후회합니다. "태어난 아기들이 자살한 친구의 얼굴을 하고 있어." 낙태까지도 결심하지만 평범한 가치관의 남편이 이에 동의할 리 만무. 하루하루 두려움에 몸부림 치다가 닥쳐온 출산의 날, 요시나가 가오루가 보게 된 얼굴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녀는 과연 자신이 품은 아이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6. 무전기
2011년 3월 11일의 쓰나미는 일본에 남은 여전히 거대한 상처이자 작가들의 영감이 되는 소재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츠지무라 미즈키의 신간 <파란 하늘과 도망치다> 속에도 쓰나미의 생존자들이 등장하는데 이곳 무전기에서도 그때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더라구요. 아들과 아내가 하루아침에 실종되어 버린 후 슬픔에 허우적대는 가장. 술에 취해 목을 매어 죽으리라 결심한 밤 아들과 함께 가지고 놀던 무전기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빠, 아빠 치이이이익, 아빠 거기 있어?" 귀신은 없다고 귀신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노래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더 많은 밤 술을 마시고 취해있기로 결심합니다. 아들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다면 마시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니까요. 아들의 목소리는 어떻게 지상으로 내려온 걸까요? 정말로 귀신이 존재하는 걸까요?
7.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폭력적인 남편과 이혼해 딸과 함께 친정으로 돌아온 아내. 딸에게 아빠를 뺏지는 않겠다는 의지로 한달에 한번은 만남을 가지기로 했는데요. 세 번째 면회에서 남편이 제안을 합니다. "셋이서 다시 시작하지 않을래?" 유코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눈빛에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었겠지만 아빠를 두려워하는 아이를 알기에 가만히 고개를 저어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이 망할 년아." 소름이 쫙 돋는 대꾸에 망연자실할 겨를도 없이 남편은 거칠게 아내의 따귀를 갈깁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하반신으로 몸을 지탱해보려 하지만 그 사이 남편은 6차선 도로로 딸을 끌고 나아가요. 제발 아이를 잡아달라고 남편을 막아달라고 외치지만 주변의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어주지 않고요. 유코는 결국 남편과 함께 도로에서 사망합니다. 3년을 자살미수로 입퇴원을 반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목소리가 들린 거에요. 여동생과 함께 한 산책길, 오로지 아내에게만 들려온 그 목소리. "엄마, 살려줘." 아내는 우울증 약을 먹고 있습니다. 환청, 환각, 모든 게 가능해요. 그렇지만 이 목소리가 정말로 환청이기만 한 걸까요? 아내는 깊은 밤 조용히 문을 열고 목소리를 쫓습니다.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내 머리가 정상일까봐 걱정하는 아내의 인생에 부디 빛이 내리기를요.
8. 아이들아, 잘 자요
마지막에 오는 이유가 있었던 소설이에요. 키드스쿨의 조장으로 임명된 안나. 여객선에서 조원이 된 아이들과 카드게임을 하던 안나는 배가 기울고 있다는 걸 알고 서둘러 아이들과 함께 구명보트로 건너가지만 중심을 잡지 못해 바다에 빠져 사망하게 됩니다. 놀란 아이들도 곧 바다에 빠지기 일보직전인 채로 우선 저승에 먼저 올라가게 된 안나, 그곳에서 천사를 만나는데요. 사자를 심사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필름을 봐야하는데 안나에게는 이 필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걸 알게 됩니다. 필름을 찾도록 도와주면 잠시 동안 지상에 내려가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시간을 주겠다는 천사장의 허락을 받지만 온데간데 없는 필름에 안나는 결국 악마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사게 됩니다. 죽는 순간에도 죽은 다음에도 저승의 감옥에 갇혀서도 오로지 아이들 걱정뿐인 안나, 그녀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구명보트의 아이들은 무사히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아이들아, 잘자요. 사람들아, 잘 자요. 잘 자요, 편안하게.(p256)" 안나가 전하는 마지막 인사가 여덟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였어요. 가슴 한 구석 오래오래 남을 여운을 품고 여러 독자들에게 추천하고픈 책입니다. 앞으로 더 다양한 작품으로 작가를 만나뵐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굿나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