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매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8
김금희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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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떤 엄마야?"(p36)

몰라서 묻는가 싶다. 어떤 엄마기는. 어린 자식 남편한테 맞겨놓고 일 한다고 서울 올라와서 옛날 남자친구 자취방에 숨어드는 여자지. 나는 불륜 소재가 싫다. 남이 알까봐 이름조차 부를 수 없어 사랑하는 여자에게 매기라는 애칭을 붙인 남자도 싫고 이제 막 글자를 깨우쳐 자잘하게 읽기 시작한 내 자식이 네 문자를 보는 게 싫다고 말하는 여자도 싫다. 내가 엄마라도 못견디겠지 하는 남자나 내 자식을 위해 더는 문자 보내지 말라고 하는 여자나 "꼴에" 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재훈이와 매기에게 독자로서 지나치게 포용력을 발휘하지 못한걸까? 문학을 애정하는 독자로서 좀 더 관용적이어야 했을까? 그러지 못하는 건 내가 일탈을 해본 적이 없는 인간군에 속해서일까?

"일상적으로 만나는 것들은 쉽게 진저리가 나거든요."(p56)

재훈은 계속해서 의문을 느낀다. 매기와 나는 왜 이런 관계를 선택했는가. 매기는 이혼할 생각이 없다. 그녀가 재훈과 함께 있는 동안 주변 시선을 과용하게 의식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불륜의 무게인양 이고 지고 다니는 보스턴백을 절대 재훈에게 넘기지 않는 모습에서 재훈은 매기가 결국 떠날 사람임을 예감한다. 종료버튼이 눌러지는 건 매기의 제주 삶이 아닌 재훈이 있는 서울의 삶일거라고. 연인이랍시고 바깥에서 손 한번 잡을 수나 있었던가. 모텔을 전전하다 손님 없는 국밥집에서 밥을 먹고 자취방에 발을 들인 후엔 어딘가로 나가는 일도 없이 하루치의 섹스를 마감한 후 튀긴 닭을 먹었다. 궁금해지더라. 매기가 재훈을 만나는 게 일상의 진저리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이라면 그들의 불륜이 일상이 될 때엔 이 관계도 자연스럽게 소멸이 될까 하고. "바닥과, 그 바닥의 깊음과, 그래서 겪는 불편과 고통과 힘듦과 귀찮음"(p60)을 감수할만큼 진저리나는 일상이라는 게 대체 무얼까 하고.

"심지어 당근도 자기 삶을 감당하고 있다고."(p123)

고작 일 년 남짓한 만남. 매기의 모친이 사망한 후 장례식을 찾아간 재훈에게 매기는 X표를 해보인다. "안 돼", 정확히는 "자기 자신에게 안 돼" 라는 표식. 언젠가의 매기의 말에 따르면 그렇게 눈으로 자신에게 보여주면서 되뇌어야 할 일도 있는 법이니까. 그렇게 둘은 헤어졌고 재훈은 불륜의 집합 같은 치킨집 위의 자취방을 정리한다. 그리고 마지막 의식으로 매기의 남편이 운영 중인 제주의 유기농 야채 가게를 찾아간다. 장을 보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장바구니 속 그들의 일상의 무게를 가늠하며 누구나가, 심지어 당근마저 감당하는 자기 삶의 무게에 대해 생각한다. 1만 8천원어치의 야채를 매기 남편에게 건내받으며 그와 손끝을 스친다. 어디에도 미룰 수 없는 삶의, 어쩌면 사랑의 무게를 느낀다. 매기는? 일상으로 스치는 남편의 손끝에서 엄마 하고 외치는 자녀의 부름에서 매기 또한 어떤 무게를 느낄까? 권희철 평론가는 "생을 충분히 겪어내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p142)라고 말한다. 이 한번의 방황이 부디 그들 남은 생을 겪어내기에 충분한 것이었기를. 그들의 방황이 누구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게끔. 부디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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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일록은 내 이름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하워드 제이컵슨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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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를 엄청나게 혐오하면서도 나를 찾아왔어. 호의를 우아하게 요청하는 겸손함도 없이 호의를 구걸했다. 그러니 이건 말이야. 그가 아니라 내가 애원하는 사람이고 또 그걸 감사하게 여겨야 하는 판이었어. 그런 상황이었으니 나도 그자의 방식대로 대꾸해 주자, 라는 유혹을 물리치기 어렵더군. 그자의 모든 공포를 체화하고, 모든 과장된 소문을 정당화시켜 주고, 모든 불합리한 미신들을 확인해 주는 그런 방식으로 말이야. 그가 비유와 소문으로 말한다면 나 또한 비유와 소원으로 말해 주겠다 이거야."(p226)

그 남자 샤일록과 또다른 남자 스트룰로비치는 무덤에서 만난다. 서로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두 유대인은 서로에게 친근과 반감을 동시에 품은 채 함께 스트롤로비치의 집으로 간다. 샤일록에게는 아내와 딸이 있다. 아니, 있었다. 아내는 일찍이 신의 품으로 돌아갔다. 딸 제시카는 비유대인 남자와 눈이 맞아 달아났다. 엄마의 유품까지 훔쳐서. 그 유품을 원숭이와 바꾸기까지 하면서. 딸은 사랑에 빠져 아버지와의 의리를, 어머니의 증거를 버렸다. 사랑 이외에 물론 무언가가 더 있었을 수도 있다. 고리대금업자, 아내 사망 후 우울증에 빠진 남편, 무관심하면서도 강압적인 아버지, 샤일록에겐 여러 얼굴이 있었다. 무엇보다 모욕을 당할까봐 미리 모욕을 가하거나 모욕을 참지 않고 배로 돌려주는 유서 깊은 민족성이 제시카의 심경을 건드렸으리라. 그녀는 유대계 남자를 원치 않았다.

스트룰로비치에게도 아내와 딸이 있다. 아내는 중풍으로 쓰러졌다. 딸 비어트리스는 사랑에 빠졌다. 이 어린 여자아이는 이른 육체적 성숙으로 13세부터 일상적으로 남자를 만나거나 사랑에 빠져왔다. 이번의 남자는 그녀 나이 두 배에, 이혼한 전적이 있고, 경기장에서 나치 경례를 한 탓에 출장 정지를 먹은 축구 선수다. 당연히 유대인이 아니며 당연히 스트룰로비치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힌다. 스트룰로비치는 비어트리스와의 관계를 인정받고 싶다면 할례를 하라고 그래턴을 종용한다. 할례할 생각이 없는 그래턴은 비어트리스와 함께 베네치아로 달아난다. 스트룰로비치는 그래턴이 15세의 비어트리스와 동침한 증거를 찾아내어 이들을 도피시킨 당통과 플루러벨을 찾아간다. 당통은 유대인 취향의 축구 선수에게로 자신의 학생 비어트리스를 데려간 인물이다. 플루러벨은 비어트리스의 나이를 뻔히 알면서도 그녀의 집에서 그들이 동침하는 일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전과가 있다. 스트룰로비치가 그래턴을 고발한다면 지역 사회의 유력인사인 당통과 플루러벨의 위치까지 흔들릴 것이다. 그들은 스트룰로비치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한가지 제안을 한다. 2주! 비어트리스와 그래턴이 그 안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당통이 책임지고 할례를 받겠다는 약속장이 등장한다. 2주 후 스트룰로비치는 샤일록을 대동하고 플루러벨의 집으로 향한다. 비어트리스와 그래턴은 친구와의 우정을 위해 영국행 비행기에 올라탔을까? 당통과 플루러벨은 어떤 음모를 계획하며 이 말도 안되는 할례 의식에 참여할 것을 맹세한걸까? 아버지와 딸은 화해라곤 없이 파탄난 각자의 이정표로 등을 돌릴까? 이들의 삶에 이정표가 있기는 할까? 초조한 마음에 결말로 성큼 나아가고 싶은 소설 "샤일록은 내 이름"이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기반으로 하워드 제이컵슨이 새롭게 창작한 소설이다. 유대계 영국인이라서 그런지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유대인과 관련한 얘기를 정말 많이 한다. 좋은 내용은 거의 없고 귀 따갑게 읊어대는 내용들이 대부분 신랄한데 그 신랄함이 이 책의 줄거리 이상가는 재미로 살아있다. 그리고 베니스의 상인으로 읽을 때와는 샤일록에 대한 느낌이 많이 다르다. 초등 고학년 용으로 각색된 베니스의 상인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샤일록이 대단히 나쁜 놈으로만 느껴졌는데 이 책의 샤일록은 좀 많이 슬프다. 별로 밉지도 않고.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를 끝낸 후에는 꼭 원작들도 찾아보리라. 책을 덮으며 새삼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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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1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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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p9)

기 롤랑,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 그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과거를 찾아 방문한 흥신소에서 새이름과 위조신분증, 일자리를 찾는다. 탐정 위트가 말했다. "이제부터 당신 이름은 기 롤랑이오. 기 롤랑씨, 지금부터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시오. 나와 함께 일을 했으면 하는데, 어떻소."(p14) 팔 년. 기는 위트와 팔 년 동안 동거동락하며 사람을 추적하는 일을 배운다. 그리하여 위트가 흥신소를 은퇴하던 날, 그는 드디어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는 일에 나설 수 있었다.

"글자들이 춤을 춘다. 나는 누구일까?"(p109)

기를 처음 알아본 사람은 식당의 점원이었다. "당신만큼 키가 큰 어떤 남자분과 같이 다니곤 했어요."(p22) 코카서스의 노래를 신청하곤 했던 스티오파. 자신을 찾아온 기에게 스티오파는 망명 귀족들의 사진 몇 장을 보여준다. 그루지아 영사관에서 근무한 조르지아제, 미국으로 이민간 조르지아제의 손녀 게이 오를로프,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자신. 기는 줄무늬 모직 양복을 입고 콧수염을 기르고 있는 자신을 가리키며 묻는다. "그가 나하고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p45) 스티오파는 익명의 기를 알아보지 못한다. 기가 사진 속의 그 남자와 닮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뇨, 왜요?"(p45) 반문하는 스티오파로부터 사진이 담긴 붉은 통을 받아 다음 추적에 나선다. 게이 오를로프가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므로 피아니스트인 그의 전남편을 만난다. 그는 게이가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결혼한 남자의 이름을 기억한다. "프레디 하워드 드 뤼즈." 기는 무직의 프랑스 귀족인 자신을 상상하며 그의 옛집을 찾는다. 황량한 광장을 보며 이곳에 놀았던 기억이 난다고, 어쩌면 할아버지 하워드 드뤼즈가 파리발 기차를 타고 자신을 데리러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하워드 가의 늙은 마굿간지기는 기를 부정한다. 있을거라 예상했던 짧은 추억은 싱겁게 막을 내렸고 대신에 새롭게 거론된 이름을 쫓는다. "페드로" 어떤 사람들에게 기의 얼굴을 환기시켰을지 모를 이름 하나. 그리하여 또다시 새롭게 새롭게, 거듭 거듭, 익명의 나를 추척해가는 이야기였다.

"결국 모든 것이 초콜릿이나 비스킷을 담았던 낡은 상자들 속에서 끝이 나는 것이었다.

혹은 담배 상자 속에서."(p98)

1978년 파트릭 모디아노에게 공쿠르 상을 안긴 작품이다. 2014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작가의 이런 이력 앞에 찬사를 보내는 독자이기 보다 겁먹고 주춤하는 독자인데다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프랑스 이름들에 애를 먹었다. 기의 정체가 좁혀지는 중반부까지만 엉금엉금 기고 나면 결말까지는 우사인 볼트처럼 달려갈 수 있으니 부디 초반에 내팽겨치지 마시라고 다음 독자에게 용기를 드려본다. 기는 부고기사와 붉은 통, 비스킷 상자, 악어가죽 수첩, 두 권의 책, 빛바랜 쪽지, 젊은 여자가 인쇄된 잡지 한 권이라는 파편적이고 보잘 것 없는 힌트로 "페드로 맥케부아"와 "드니즈"라는 이름에까지 다가간다. 기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던 어쩌면 사랑했을 여자와 황혼의 인적 없는 도로에서 손을 흔들며 활짝 웃어보이던 아이, 눈속에 드러눕고만 기의 외딴 아침에 먹먹하고 가슴 벅찼는데 마지막 장면, 사진 속의 여자가 울고 있다는 기의 깨달음 앞에서 기가 기억을 찾았다는 안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다음 페이지가 없다는 사실에 어찌나 망연하던지. 기억의 부재가 불러일으킨 얄팍한 착각이 너무도 많았기에 확고한 결말을 원했지만 슬픔을 가중시키기에 이보다 나은 결말은 없었으리라. 한가지 의문은 기가 어째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억의 부재를 숨겼냐는 것이다. 기억상실증이라고, 나는 모든 기억을 잃었고 예전의 나를 찾아가는 중이라고, 왜 마냥 솔직하지 못했을까. 기는 마지막 시도를 결심한다. 로마에 있는 기의 옛주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찾아가자고. 그곳의 거리는 기의 잃어버린 기억을 어떻게 품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무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위트는 '해변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한 인간을 그 예로 들어 보이곤 했다. 그 남자는 사십 년 동안이나 바닷가나 수영장 가에서 여름 피서객들과 할 일 없는 부자들과 한담을 나누며 보냈다. 수천수만 장의 바캉스 사진들 뒤쪽 한구석에 서서 그는 즐거워하는 사람들 그룹 저 너머에 수용복을 입은 채 찍여 있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며 왜 그가 그곳에 사진 찍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아무도 그가 어느 날 문득 사진들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위트에게 감히 그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해변의 사나이'는 바로 나라고 생각했다. 하기야 그 말을 위트에게 했다 해도 그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해변의 사나이'들이며 '모래는 ㅡ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ㅡ 우리들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밖에 간직하지 않는다'고 위트는 늘 말하곤 했다."(p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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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늘과 도망치다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이정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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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지무라 미즈키의 상냥하고 다정다감한 성장소설을 좋아해요. 처음 만난 츠지무라 미즈키의 책은 <아침이 온다>였는대요. 미성숙한 몸과 마음으로 임신을 한 중학생 히카리와 임신을 원하지만 거듭된 실패로 좌절 중인 사토코의 이야기였어요. 두 사람이 낳고 키운 아사토가 다정한 마음을 한데 엮어 가져다준 밝은 아침에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왕따로 등교 거부 중인 중학생 고코로가 거울 나라의 앨리스처럼 환상의 세계에 풍덩 빠져들던 <거울 속 외딴성>은 또 얼마나 사랑스러웠게요. 일본 서점 대상 수상작은 역시 믿을 수 있구나 새삼 실감한 책이었어요. 19년에 출간된 얼음고래부터 만나야지 작정했는데 어쩌다보니 블루홀식스에서 출간된 <파란 하늘과 도망치다>를 먼저 읽게 되었습니다. 앞서의 두 권과 마찬가지로 따뜻하고 포근한 모자의 성장기에 역시 츠지무라 미즈키!! 제 최애 작가님은 아니시지만 뿌듯뭉클한 심정이 되어 책 자랑을 해봅니다.

새벽녘 걸려온 응급실에서의 전화. 연극 훈련을 마친 후 귀가하던 남편 겐이 교통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에 혼비백산해 병원으로 달려가지만 이후 사나에는 남편에게 발길을 끊습니다. 유명 여배우의 차량에 동승한 남편, 두 사람의 불륜을 떠들어대는 언론, 얼굴에 입은 치명적인 상처에 좌절한 여배우의 자살. 배신감에 치떨려 할 새도 없이 연이은 가십에 벌떼처럼 달려드는 취재진과 조폭 기획사의 괴롭힘에 숨조차 쉬기 힘든 상황으로 떠밀려요. 이 사태를 책임져야 할 남편은 퇴원 후 소식 한 통 없이 잠적 중이고요. 아들 방의 장농에서는 피 묻은 식칼이 떨어져 사나에를 패닉에 빠트립니다. 초등학생인 아들의 짐을 추슬러 허겁지겁 사만토로 달아난 사나에. 식당에서 알바를 하며 아들 자카라의 여름방학을 평화롭게 지켜가려 하지만 그곳까지 쫓아온 기획사 일당 때문에 결국 이에시마, 벳푸, 센다이로 계속된 도피생활을 지속합니다.

이런 무책임한 인간이 다 있나!!! 사나에의 남편 겐 때문에 읽는 내내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몰라요. 처자식은 나몰라라 저만 살겠다고 달아나서 소식 한 통 없는 아버지지만 자카라는 겐을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엄마 이혼하지마, 펑펑 울며 매달리는 아들을 다독이며 사나에의 가슴이 얼마나 찢어졌을까요. 개학날이 다가와 도쿄로 돌아가야만 하던 아침 자카라는 또 한번 엄마에게 부탁합니다. 엄마 나 학교 가기 싫어, 도쿄에 가고 싶지 않아, 사실 나 학교에서 왕따 당하고 있어. 아들의 손을 꼭 쥐고서 사나에는 얘기합니다. "조금만 더 둘이서 도망쳐 보자."(p140) 새우들이 뛰노는 맑은 강에서는 어려운 이웃을 품어주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너른 바다에서는 주저 않고 다가와 먼저 말 걸어주는 친구를 사귀었고요. 온천 위에 떠있는 마을에서는 번듯한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으며 혼자라는 외로움도 씻었습니다. 대지진을 겪고도 다시 시작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꿋꿋한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주고 받는 기쁨도 깨달았지요. 학교와 집, 아버지와 남편의 울타리 안에서 살 때에는 알지 못했던 일들입니다.

도피 중임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아들이 두 손 꼭 잡고 걸어가는 길 위의 풍경들이 아름다워 설렜습니다. 길 위에서 만나는 인연들은 한결같이 보석 같고요. 어려움 속에서도 한뼘씩 성장하는 모자의 모습과 모자를 뒤따르는 푸른 하늘에 반해 독자의 마음도 쪽빛으로 물드는 것만 같았습니다. 역자 후기로 전해진 작가의 마음도 감동이었어요. 20대 때 이 소설을 썼다면 사람들의 선의에 이유를 붙였겠지만 30대인 지금은 사람들의 선의에 이유를 붙일 필요를 못느낀대요. 조건 없는 선의를 믿으니까요. 그 마음 고스란히 받아 독자도 정다웁게 독서를 마무리 합니다. 아참, 겐은 어떻게 되었냐구요? 그건 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세요. 확실한 건 제가 사나에였으면 이유 무관 그 자식 등짝을 발로 확 차줬을 거라는 겁니다. 어휴, 용서가 안된다, 증말! (겐 앞에서만은 정다움 잠깐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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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연한 고양이
최은영 외 지음 / 자음과모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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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 버려진 고양이의 새주인을 찾아주는 <임보 일기>, 약혼자의 부주의한 행동으로 고양이가 행방불명되자 결혼을 엎고 홀로 신혼집에 들어가는 <테라스가 있는 집>, 모요시의 백설공주님을 데리고 바다로 떠나는 트럭왕자님과 고양이 파스칼의 해피 로드 <세상의 모든 바다>, 길고양이 밥을 주다 살해당한 언니의 복수를 꿈꾸는 <너를 부른다>, 아픈 고양이들의 수혈을 담당하는 공혈모 장수의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덤덤한 식사>, 영화를 찍는 대학생들의 손에 길거리로 내쫓긴 고양이와 그 고양이의 울음소리 속에서 원치 않게 옷을 벗어야만 했던 문창과 새내기의 <질주>, 남편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는 아내와 그녀 발밑에 누워 잠이 든 고양이 얌이의 봄날 <식초 한 병>, 어느 날 내 고양이가 인간으로 변신한다면? 고양이와 연애하는 주인의 설렘이 폭발하는 <유메노유메>, 인간들의 넘치는 사랑을 받아 이백년 넘게 저승길을 거부 중인 요물 고양이와 차사들의 한담 <묘령이백>, 하루아침에 실종된 내 고양이가 사실은 외계 고양이였다? 별에서 온 고양이 체다의 밤 <유니버셜 캣샵의 비밀> 등 10인의 한국 작가가 모여 쓴 그야말로 공공연한 고양이들과의 만남이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울먹이는 주인 앞에서 우주복을 입고 안녕히 계시오 인사하는 함장 고양이는 어쩜 그리 듬직하고 믿음직스럽던지. 별에서 온 그대 2탄 찍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두근두근 했다. 톨게이트에서 엄마아빠를 기다리는 백설이는 믿기지 않겠지만 <유령>의 작가 정용준의 작품이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에서 사형수 474를 그리며 악의 정체를 되묻던 그가 이번엔 반짝반짝 동화 같이 사랑스러운 단편을 쓴 것이다. 작가님의 인상 깊은 전작 탓에 마지막 줄의 마침표가 등장할 때까지 안심하지 못했다. 이렇게 따뜻하게 끝날 리 없다며 손에 땀을 쥐며 읽었는데 다행히도 백설공주다운 결말을 맞아 행복했다. 인간으로 변신한 암컷 고양이와 주인 미애는 서로를 여보라고 칭한다. 종족도 뛰어넘었는데 성별 까짓,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나는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응원하련다. 대체 고양이가 무엇이기에. 내 고양이가 천년만년 살기를 바라는 주인의 고뇌가 눈물겨운 묘령이백은 이 소설집에서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이다. 아마 고양이 집사들 모두가 묘령이백의 존재에 환호하지 않을까? 고양이에게 쏟아진 폭력이 고스란히 여성에게로 이어지는 몇 몇 이야기들엔 속이 쓰렸고 인간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고양이들 앞에선 죄스러워 가슴이 아팠다. 세상의 모든 고양이들이 어느 자리에서든 방심하며 살 수 있게 되기를. 최은영, 조남주 등 유명 작가들과 함께 우리의 이웃, 작지만 큰 생명체 고양이들과 친근해지는 시간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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