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1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p9)

기 롤랑,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 그는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과거를 찾아 방문한 흥신소에서 새이름과 위조신분증, 일자리를 찾는다. 탐정 위트가 말했다. "이제부터 당신 이름은 기 롤랑이오. 기 롤랑씨, 지금부터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시오. 나와 함께 일을 했으면 하는데, 어떻소."(p14) 팔 년. 기는 위트와 팔 년 동안 동거동락하며 사람을 추적하는 일을 배운다. 그리하여 위트가 흥신소를 은퇴하던 날, 그는 드디어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는 일에 나설 수 있었다.

"글자들이 춤을 춘다. 나는 누구일까?"(p109)

기를 처음 알아본 사람은 식당의 점원이었다. "당신만큼 키가 큰 어떤 남자분과 같이 다니곤 했어요."(p22) 코카서스의 노래를 신청하곤 했던 스티오파. 자신을 찾아온 기에게 스티오파는 망명 귀족들의 사진 몇 장을 보여준다. 그루지아 영사관에서 근무한 조르지아제, 미국으로 이민간 조르지아제의 손녀 게이 오를로프,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자신. 기는 줄무늬 모직 양복을 입고 콧수염을 기르고 있는 자신을 가리키며 묻는다. "그가 나하고 비슷하게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p45) 스티오파는 익명의 기를 알아보지 못한다. 기가 사진 속의 그 남자와 닮았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뇨, 왜요?"(p45) 반문하는 스티오파로부터 사진이 담긴 붉은 통을 받아 다음 추적에 나선다. 게이 오를로프가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므로 피아니스트인 그의 전남편을 만난다. 그는 게이가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결혼한 남자의 이름을 기억한다. "프레디 하워드 드 뤼즈." 기는 무직의 프랑스 귀족인 자신을 상상하며 그의 옛집을 찾는다. 황량한 광장을 보며 이곳에 놀았던 기억이 난다고, 어쩌면 할아버지 하워드 드뤼즈가 파리발 기차를 타고 자신을 데리러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하워드 가의 늙은 마굿간지기는 기를 부정한다. 있을거라 예상했던 짧은 추억은 싱겁게 막을 내렸고 대신에 새롭게 거론된 이름을 쫓는다. "페드로" 어떤 사람들에게 기의 얼굴을 환기시켰을지 모를 이름 하나. 그리하여 또다시 새롭게 새롭게, 거듭 거듭, 익명의 나를 추척해가는 이야기였다.

"결국 모든 것이 초콜릿이나 비스킷을 담았던 낡은 상자들 속에서 끝이 나는 것이었다.

혹은 담배 상자 속에서."(p98)

1978년 파트릭 모디아노에게 공쿠르 상을 안긴 작품이다. 2014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작가의 이런 이력 앞에 찬사를 보내는 독자이기 보다 겁먹고 주춤하는 독자인데다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프랑스 이름들에 애를 먹었다. 기의 정체가 좁혀지는 중반부까지만 엉금엉금 기고 나면 결말까지는 우사인 볼트처럼 달려갈 수 있으니 부디 초반에 내팽겨치지 마시라고 다음 독자에게 용기를 드려본다. 기는 부고기사와 붉은 통, 비스킷 상자, 악어가죽 수첩, 두 권의 책, 빛바랜 쪽지, 젊은 여자가 인쇄된 잡지 한 권이라는 파편적이고 보잘 것 없는 힌트로 "페드로 맥케부아"와 "드니즈"라는 이름에까지 다가간다. 기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던 어쩌면 사랑했을 여자와 황혼의 인적 없는 도로에서 손을 흔들며 활짝 웃어보이던 아이, 눈속에 드러눕고만 기의 외딴 아침에 먹먹하고 가슴 벅찼는데 마지막 장면, 사진 속의 여자가 울고 있다는 기의 깨달음 앞에서 기가 기억을 찾았다는 안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다음 페이지가 없다는 사실에 어찌나 망연하던지. 기억의 부재가 불러일으킨 얄팍한 착각이 너무도 많았기에 확고한 결말을 원했지만 슬픔을 가중시키기에 이보다 나은 결말은 없었으리라. 한가지 의문은 기가 어째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억의 부재를 숨겼냐는 것이다. 기억상실증이라고, 나는 모든 기억을 잃었고 예전의 나를 찾아가는 중이라고, 왜 마냥 솔직하지 못했을까. 기는 마지막 시도를 결심한다. 로마에 있는 기의 옛주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찾아가자고. 그곳의 거리는 기의 잃어버린 기억을 어떻게 품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무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위트는 '해변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한 인간을 그 예로 들어 보이곤 했다. 그 남자는 사십 년 동안이나 바닷가나 수영장 가에서 여름 피서객들과 할 일 없는 부자들과 한담을 나누며 보냈다. 수천수만 장의 바캉스 사진들 뒤쪽 한구석에 서서 그는 즐거워하는 사람들 그룹 저 너머에 수용복을 입은 채 찍여 있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며 왜 그가 그곳에 사진 찍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아무도 그가 어느 날 문득 사진들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위트에게 감히 그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해변의 사나이'는 바로 나라고 생각했다. 하기야 그 말을 위트에게 했다 해도 그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해변의 사나이'들이며 '모래는 ㅡ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ㅡ 우리들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밖에 간직하지 않는다'고 위트는 늘 말하곤 했다."(p74-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