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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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와 함께하는 여름. 뮤직트리 출판사에서 출간된 생뱅 테송의 책 제목입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따라가는 내내 영롱한 빛을 받으며 세상에 뛰어든 것 같고, 짐승과 숲이 애틋해지고, 요컨대 삶이 감미롭게 느껴진다"던 작가의 추천사를 읽으며 저도 생뱅 테송이 보낸 것과 같은 여름을 나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생뱅 테송처럼 그리스령 제도의 어느 섬에 틀어박혀 유유자적 호메로스를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요. 집콕방콕, 휴가 기간 내내 이어진 장마철 빗소리 속에서 영웅들을 만나고 병장기 소리를 듣고 신들의 질투와 다툼과 사랑을 엿보는 대서사시를 읽는 일이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휴가 이즈 뭔들, 책 이즈 뭔들, 올해 제 여름 휴가는 일리아스가 순삭!! ㅋㅋㅋ

"두려워 말고 그대가 아는 대로 신의 뜻을 말하시오. 칼카스여!"(p30) 아킬레우스가 예언자 칼카스를 독려합니다. 제우스의 아홉해가 지난 트로이의 전장. 아카이오이족의 그리스 진영은 신이 쏘아보낸 역병으로 산처럼 쌓여가는 전우의 시체를 태우고 있습니다. 포이보스 아폴론이 아가멤논에게 진노한 까닭입니다. 아폴론의 사제 크뤼세스를 모욕하고 그 딸의 몸값을 거부한 탓에 아카이오이족은 장작더미가 부족할 지경이 되어 예언을 구했으나 이로 인해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에 다툼이 벌어질 줄을 누가 알았을까요. 아가멤논은 크뤼세이스 처녀를 돌려보내는 대신 명예의 선물을 마련하라며 아킬레우스의 전리품 볼이 예쁜 브리세이스를 빼았습니다. 명예에 흠집이 난 아킬레우스는 분노하며 선언합니다. "프티아로 돌아가겠소!". 사과를 해도 부족할 판국에 아가멤논은 제발 도망가라며, 그대 말고도 내 명예를 높여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며 이죽대지요. 치를 떨며 막사로 돌아간 아킬레우스는 여신인 어머니 테티스를 불러 간청합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저를 단명하도록 낳으셨으니, 높은 곳에서 천둥 치는 올륌포스의 제우스께서는 제게 명예라도 주셔야지요."(p43) 아가멤논이 아카이오이족 가장 용감한 용사를 존중하지 않은 대가를 치르도록, 그가 제 어리석음을 땅을 치고 후회하도록, 아가멤논이 자신의 앞에서 굴종하도록, 제우스를 설득해 달라 눈물을 뿌리니 여신이지만 너무나 인간적인 어머니 테티스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올륌포스로 날아오른 그녀는 제우스에게 간청합니다. "명이 짧고 길지 않은 제 아들의 명예를 지켜주세요. 아카이오이족이 아킬레우스를 존중하고 전보다 큰 경의를 표하기 전까진 그들에게 승리를 내리지 말아주세요." 테티스에게 마음이 움직인 제우스는 트로이아인들에게 연전연승의 행운을 날립니다. 거짓된 승리를 약속하는 꿈을 보내어 아가멤논을 전쟁터로 끌어내면서 그의 손발과 같은 영웅들을 죽여버려요. 제우스가 진두지휘하는 전쟁을 일개 인간들이 어떻게 버텨낼까요. 수수단처럼 쓰러지는 아카이오이족의 전사들, 이를 보는 헤라와 아테네 그리고 포세이돈의 마음에 슬픔이 차오릅니다. 그들은 꾀를 내어 제우스를 속이고 아카이오이족에 힘을 실어줍니다. 인간들의 싸움이 어느 새 신들의 싸움이 되어 전장은 하늘 위 올륌포스로까지 확대되고 청동의 병장기 소리는 바다를 건너 2천 8백년 후의 오늘까지 울려퍼져요.

저는 여태 일리아스가 오뒷세이아처럼 어느 영웅의 이름인 줄로만 알았어요. 알고 보니 일리오는 트로이를 이르는 옛 그리스어였더라구요. 일리오의 노래, 트로이 전쟁을 노래하는 서사시인 셈이지요. 이 책은 독자에게 마냥 친절하지만은 않아서 시작부터가 뜬금없습니다. 파리스가 어떻게 헬레네를 납치해 트로이로 도주했는지, 아가멤논과 그의 동생 메넬라오스가 헬레네를 되찾기 위해 연맹의 영웅들을 어떻게 결집시켜 트로이로 출발했는지, 트로이에 당도하기까지의 경위나 아홉해까지의 전투들이 어떤 양상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어 있거든요. 대뜸 말다툼을 벌이는 두 영웅들이 등장할 땐 저 역시도 어찌나 놀랐는지 이거 혹시 파본인가, 일리아스 앞에 다른 책이 있는데 내가 몰랐나 싶었습니다. 그리스로마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익숙한 독자가 아니라면 무척 당황스런 시작일 수 있어서, 어쩌면 펼치자마자 중도포기할 수도 있겠다 싶었기에, 준비 독서를 좀 하신 후에 시작하라고 권유하고 싶어요. 좀 뻔뻔한 말이지만 이윤기의 그리스로마 신화 합본판, 이윤기 번역의 변신 이야기, 매들린 밀러의 아킬레우스의 노래를 읽고 시작한 저는 준비가 좀 만만이었는지 술술 꿀떡꿀떡 호메로스를 삼켰습니다만 이거 뭐죠? 책이 이상한데서 끝이 나서 막판에는 다시 당황했습니다. 아킬레우스의 죽음도 아니요. 트로이의 목마는 더더욱 아니요. 헥토르의 시체를 그 아버지 프리아모스에게 넘겨주고 장례가 끝날 때까진 전쟁을 치르지 않겠다는 아킬레우스의 약속하에 헥토르를 장사 지내는 걸로 깔끔한 마무리. 군더더없기 없이 끝. 진짭니까? 정말루요? 책을 앞뒤로 몇 번을 훑었습니다.

독자들마다 느낀 재미의 요소가 다를텐데요. 저한테는 어리둥절할 정도로 개성적인 엉망진창인 신들이 제일 큰 흥미였어요. 그들은 말도 안되게 강인해서 천둥과 벼락을 내리고 날아가는 활의 방향을 바꾸고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며 상과 벌을 결정하는데요. 또 말도 안되게 허약해서 인간의 병장기에 손을 베이거나 배를 찔려 피를 보고 허겁지겁 달아나 엉엉 울어요. 헤라와 제우스는 부부싸움을 엄청 하는데 헤라는 잔소리를 쏟아내고 제우스는 매맞고 싶지 않으면 조심하라며 헤라를 협박하고 아들인 헤파이스토스는 헤라를 말려요. 제우스는 테티스의 간청으로 트로이의 편을 들겠다 철썩같이 약속하고선 또 한날엔 불쌍하게 죽어가는 그리스 진영의 편을 들어주는 등 줏대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영둥들은 거의가 반신들이에요. 모계는 인간이지만 부계는 올륌포스의 신들. 그 신들이 전쟁터에서 제 자식이 죽어날까 전전긍긍 하며 빼돌려? 말어? 고민을 합니다. 자식이 없는 몇 몇 신들이 주접 떨지 말라며 그런 신들을 타박해요. 자식이 엄청 많은 제우스는 그야 다 무관심. 아르테미스는 새어머니 헤라에게 뺨을 맞고 활을 뺏긴 후 조르르 제우스에게 달려가 고자질을 해서 이미지가 와장창 깨졌습니다. 어떻게 보면요.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의 한심한 면이 똘똘 집약된 존재인 것만 같달까요? 능력치에서 인간의 상위호환적 존재이지 석가모니나 하나님 같이 절대적인 느낌이 전혀 없어 심심할 새가 없어요. 다른 신화책들보다 일리아스에서 신들의 이런 개성이 훨씬 두드러져서 읽는 재미가 말도 못하게 쏠쏠합니다.

두 번째 재미는 전쟁터라고는 믿기지 않는 뽀송뽀송함??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쟁터니까 암울하고 질척이고 피와 고름, 고통, 원망, 복수가 난무하며 잔인할 것 같잖아요. 전혀전혀 아니에요. 모든 장면이 전쟁 안같게 매우 심플합니다. 다치고 죽는데, 그것도 턱 옆으로 청동 창이 밀고 들어와 혀가 잘리고 이가 다 부러져 죽거나 내장이 쏟아지며 죽는 일들이 비일비재한데 소설에서는 아무 고통도 안느껴져요. 마치 게임을 보는 느낌? 어떡해, 누구 죽었어, 히잉, 미간을 찌푸리며 울상을 짓는 게 아니라 아싸 한 놈 죽이고! 내지는 게임 오버! 같은 느낌으로다... 죄송합니다. 진짜 설명이 안되요. "전쟁에서 죽은 젊은이에게는 무엇이나 어울리는 법이다. 날카로운 청동에 찢겨 누운 것조차도. 그는 비록 죽었지만 그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다."(p624) 정말 딱 이런 느낌이었다는 것만 말씀드려요. 제우스의 분노와 신들의 내 영웅 내가 구한다 작전 때문에 천둥도 치고 종종 짙은 안개는 낄지언정 비 한 방울 없이 트로이의 하늘은 언제나 맑구요. 별이 총총합니다. 건조한 대기, 공기는 향기롭고, 이리스 여신이 제우스의 전령으로 자주 지상을 오르내리는만큼 무지개도 자주 보였을 것 같아요. (무지개 장면이 등장하진 않지만 이리스가 나타날 때면 자동적으로 하늘에서 지상까지 길게 이어진 무지개가 떠올라요.) 오로라는 남편 곁에 누워있다 제 시간에 칼 같이 일어나 자스민 빛깔의 새벽을 열고, 양 진영이 십 년 가까이 긴 전쟁을 치르면서도 배급에 아무런 차질이 없는지 먹거리는 언제나 풍성합니다. 영웅들은 공평하게 고기를 나눠먹고, 모닥불을 피운 병사들은 여기저기서 배를 채워 배곪는 이는 구경조차 할 수 없고, 포도주로는 흥청망청 불도 끄구요. 장례를 치르면서 레슬링에 권투에 달리기 시합을 벌이며 상품을 내거는데 이거 원 무슨 전쟁이 아니라 축제 같다니까요. 포로로 잡힌 처녀들이 영웅들에게 순종하다 못해 적 장군의 죽음에 오열하고 영웅 중 누구 한명 이 전쟁에 대해 고뇌하는 이도 없으며 고향으로 돌아가고팠던 병사들도 신들이 용감한 마음만 가슴에 심어주면 고향보다 전장인 트로이를 좋다고 느끼는 등 말할 수 없이 굉장한 판타지더라구요. 그것도 2천 8백년 묵은 판타지요.

리뷰가 또또 길어졌습니다. 고전이 읽기 전엔 참 막연해요. 대강의 줄거리를 아는데 꼭 읽어야 하나 의문도 들고 2천년 전의 이야기라니 지루할 것도 같고 말이죠. 그런데요. 정말로, 정말정말로 신!선!합니다. 신선하다는 표현을 실뱅 테송과 백선희 역자님이 쓰실 적엔 이해를 못했는데 읽고 나니 그 말씀 선명하게 피부에 와닿아요. 옛것이라 낡고 고루한 게 아니라 오늘날의 읽을거리에서 느껴보지 못한 전혀 다른 매력으로 신선. 생생, 쨍하게 재미난 이야기가 넘쳐나요. 의미니 뭐니 다 때려치우고 전 그냥 재미있어서 그리스로마 신화도 변신 이야기도 일리아스도 좋았어요. 읽어봐야 알아요. 리뷰로는 백날 말해도 못느끼실테고 저도 못느꼈고 이건 진짜 읽어야 알 수 있는 그런 맛! 도서출판 숲에서 출간된 천병희 역자님의 일리아스는 서사시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와 번역하셨어요. 소설로 개작하거나 축약된 일리아스랑은 읽는 맛이 아마 다르지 싶은데 다른 일리아스를 안읽어봐서 비교가 안됩니다. 뭣도 모르는 제가 읽기에도 가독성이 좋아서 추천하고파요. 종종 영웅들의 이름이 너무 많이 나열될 땐 깜빡 졸릴 때도 있는데 낭독하며 읽으면 괜찮습니다. 1982년 첫 원전 번역 이후 3차에 걸쳐 개정판을 출간했구요. 라틴어 원전으로 번역 작업을 하는 흔치 않은 역자님이시라고 해요. 해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요거. "현존하는 필사본들은 근래에 출토되기 시작한 파피루스 단편들과 놀라울 만큼 내용이 일치해서, 우리는 현존하는 필사본들이 고대 그리스인들의 필사본과 사실상 같은 것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p776) 2천년도 더 전의 독자들과 내가 같은 이야기를 읽고 있다고 생각하니 말할 수 없이 짜릿합니다. 시간을 달리는 고전, 일리아스를 꺼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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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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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본으로 저를 당황시켰던 네 번째 가가 형사 시리즈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페이지 96쪽에서 사망해 더는 진도를 못나가다가 지난 주 금요일에 교환 도서를 받았습니다. 97쪽이 소생해있는 새책으로 심폐수술 받으며 완독하니 어째 더 재미가 있구요. 파본나 있던 페이지의 끝 단어와 첫 단어 "미안해 새"도 영영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ㅎㅎㅎ



유바 가요코와 소노코는 고등학생 때부터 단짝 친구입니다. 허물없이 속내를 터놓는 두 사람이기에 알고 보니 굉장한 부자였던 지금의 남자친구를 소개하는 일에도 소노코는 망설임이 없어요. 소노코와 연인 준이치, 가요코의 첫만남. 그 자리에서부터 이거 일이 꼬이는구나 싶더군요. 가요코와 헤어져 돌아가는 길 준이치의 입에서는 내내 가요코 멋진 여자, 미인, 신비한 매력, 남자들이 다들 가요코만 쳐다본다는 둥 가요코에 대한 이야기만 쏟아지거든요. 수더분한 외모에 비사교적인 성격의 소노코와 비교하면 연예인 지망생이었던데다 방송국 근무 이력까지 있는 가요코는 눈에 띌 수 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뭣 모르는 제가 봐도 준이치의 칭찬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어요. 게다가 소노코도 알고 있듯이 가요코는 욕심이 많고 화려한 세계에 대한 욕망이 크지만 일찍이 좌절을 맛본 전적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소노코 이 바보 같은 여자가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것 같은 형국을 연인과 친구 모두에게 만들어 버린 셈이었죠.



그뒤로부터는 예견된 수순으로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데이트가 극단적으로 줄고 연락도 없고 먼저 전화를 해도 시큰둥 말이 없는 준이치는 기어이 집으로 찾아와 고백해요. 가요코를 좋아한다구요. 아니 사랑한다구요. 벌써부터 바람이 나서 이 둘 소노코를 배신하고 있었던 거에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일찍부터 타지로 나와 사회생활을 한 소노코는 보기와는 달리 외로움이 많았습니다. 기댈 곳이라곤 남자친구와 단짝 가요코 밖에 없었으니 소노코는 준이치의 말에 발밑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을 거에요. 세상에 남은 유일한 가족인 오빠에게 전화를 한 지난 금요일엔 아무래도 그런 상실감이 더욱 컸던 모양이죠? 배신을 당했다고,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소노코는 기어이 "내가 죽으면 아마 가장 좋을 것 같아"라는 섬뜩한 말을 합니다. 경찰인 소노코의 오빠 이즈미는 아무래도 감이 좋은 편이니까요. 이 전화를 마지막으로 동생에게 연락이 닿지 않자 곧장 소노코의 집을 찾습니다. 동생의 집 문을 여는 순간 예감이 맞았다는 걸 알게 되요. 소노코가 가만히 눈을 감고 죽어있었거든요.



졸업, 잠자는 숲, 악의와는 달리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는 굉장히 본격적인 추리소설입니다. 수면제 봉지 두 개, 타이머 스위치, 소노코의 몸에 붙어있는 두 줄기 전기코드, 그 밖의 자잘한 증거들이 독자를 자극하고 독려합니다. 머리를 굴려봐,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보라고, 할 수 있어, 얼른얼른. 소노코는 자살일까요 아니면 타살일까요? 타살이라면 범인은 누구일까요? 준이치? 가요코? 아니면 둘 다? 그러나 고작 사귀었다 이별한 이유로 전 여친을, 전 단짝을 죽일 필요까지 있었을까요? 교통계 경찰인 이즈미는 타살을 확신하며 소노코의 죽음을 자살로 위장합니다. 범인에게 법이 아닌 자신의 심판을 받게 할 심산인 거겠죠. 이즈미의 위장을 꿰뚫고 죽음의 행방을 찾아나서야 하는 형사 가가. 마치 형사 콜롬보나 탐정 뭉크 같은 자세로 현장을 샅샅이 뒤지고 이즈미를 의심하며 근방을 배회합니다. 이즈미와 가가가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힌트를, 힌트인 듯 힌트가 아닌 듯이, 너불너불 떠드는데 아이구 두야 끝끝내 진범을 알려주진 않아요. 고민 끝에 봉인된 추리 안내서를 칼로 뜯기로 했죠. 책이 훼손될지언정 이렇게 뒤 안닦은 느낌으로 읽기를 끝낼 순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예리함이라곤 없는 커터칼로 책을 걸레짝으로 만들면서 확인한 범인은........ 에잇!!! 작가님 그리고 출판사 정말 이러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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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 식당 (특별판) 특별한 서재 특별판 시리즈
박현숙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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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는 것보다 더 무서운 그 시간들 저도 만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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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사랑 이탈로 칼비노 전집 8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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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읽어온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시작하는 단편인 어느 군인의 모험을 읽을 때는 정말로 아리송한 느낌이었죠. 애걔, 이야기가 왤쾌 꾀죄죄해? 살짝 불평도 했어요. 기차에서 미망인을 만난 젊은 보병은 안달복달 하며 여성에게 닿기 위해 애를 씁니다. 기차가 흔들릴 때마다 점점 대담해져 가는 보병의 신체 접촉, 제 눈에는 영락없는 추행만 같아 마음이 불편해지려는 찰나 소설이 끝나는데 말미의 장면에서 잠이 화악 달아나며 우스워졌습니다. 잠이 든(척 하는) 미망인을 보며 보병이 주체할 수 없는 욕망으로 몸을 일으키는 순간에 마주치거든요. 부인용 모자 아래로 맑고도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망인의 푸른 두 눈을요. 보병은 더는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서 덜컥 겁을 먹습니다. 거세게 쏟아지는 빗물 소리, 텅텅 비어버린 객차 안, 웬일인지 더는 미망인이 걱정되지 않더군요.

전작들과는 달리 힘겨운 사랑 속에는 환상성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습니다. 판타지 같은 맛은 아주 제로에요. 그렇다고 아주 현실 같지도 않은 상황들이 펼쳐집니다. 현실이라면 이보다 더 코미디일 수도 없는 그런 상황들이요. 남편과 함께 잠이 든 창녀의 집으로 도피한 도둑, 그 도둑을 잡으러 온 경찰, 도둑과 경찰 모두에게 아내와 침대를 내어주는 남편. 경찰이 오자 화장실로 숨어버린 도둑은 심심하고 갑갑해서 자수를 하고 남편은 평화롭게 아내 옆자리를 사수하며 잠이 듭니다. 수영을 하다 수영복 하의를 잃어버린 부인은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하고픈데 수치심을 극복하지 못해 둥둥 떠다니다 익사하기 직전에 이르고요. 아름다운 여인과 보낸 하룻밤이 어찌나 꿈결 같던지 신선하고 상쾌한 아침을 부푼 마음으로 나섰던 회사원은 순식간에 현실에 찌들어 간밤 일로 갈아입지 못한 옷을 불평합니다. 도대체가 사람들이 왜 사진을 찍는지 모르겠다던 남자는 사진을 찍으며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그 여인의 사진을 밤낮 찍어대는 일에 집착하다 사정없이 채이게 됩니다. 반할만큼 아름다운 여자를 만났는데 손에는 한참 재미있는 장면으로 넘어간 책이 들려있는 남자의 휴가 이야기가 제일로 취향이었어요. 여인의 유혹은 끈질긴데 책은 읽고 싶고 도무지 어째야 좋을지 알 수 없는 독서광은 끝내 여인을 격정적으로 포옹하지만 한 손으로는 다급히 페이지 사이에 책갈피를 꽂습니다. 다시 책을 읽고 싶은데 읽었던 장면을 찾지 못하는 것만큼 짜증나는 일은 없으니까요.

힘겨운 사랑 속 어느 주인공은요. 어느 날 의문모를 삶의 염증을 느끼게 되요. 영화를 너무너무 좋아했던 사람인데 하루아침에 영화 보기가 시시해져 영화관에도 안가게 됩니다. 배우들 얼굴에서 표정도 특징도 없어졌나다 뭐라나. 영화 따위 이제는 너무너무 지루하고 삶도 따분하다나요? 그런 그에게 의사가 처방을 내립니다. "근시니까 안경을 쓰세요." 주인공은 안경을 쓰는 가벼운 행위만으로 삶이 수백배는 더 흥미로워졌다고 고백해요. 배우들 얼굴에서 사라졌던 감정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세상은 다채로운 색과 선명함으로 가득가득. 암요. 알죠알죠. 안경을 교체할 때마다 어라? 바깥이 원래 이 색깔이었어? 저도 몇 십년 째 한결같이 놀라는걸요. 힘겨운 사랑을 읽으며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도 새 작품을 접하면 그때그때 안경을 갈아써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다른 맛, 또다른 즐거움, 또다른 세상을 선명하게 포착할 수 있도록요. 시작의 실망에 비해 끝으로 갈수록 점점 더 좋아졌던 작품집. 이탈로 칼비노가 참 좋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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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범한 밥상 - 박완서 대표중단편선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3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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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작가가 말했다. 박완서 소설가는 한국어로 소설을 읽는 사람이 남아 있는 한, 언제까지고 읽힐 것이라고. 언제고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던 작가님의 소설들을 문학동네 박완서 대표중단편선으로 만나며 정세랑 작가의 말을 실감한다. 시대가 변한대도 작가님이 차려낸 이 대범한 밥상을 받으면 그저 물릴 독자는 없으리라고. 때때옷을 갈아입고 등장하기만 하면 넙죽 몸을 일으켜 감사히 상을 받을 독자가 숱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대범한 밥상을 차지한 열 편의 찬은 아래와 같다. 부처님 근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 그 가을의 사흘 동안, 엄마의 말뚝 2 (1편도 있습니까?), 아저씨의 훈장,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너무도 쓸쓸한 당신, 대범한 밥상. 작가정신에서 출간된 단편선 "나의 아름다운 이웃"과는 또다른 맛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맛의 찬들이다. 나의 아름다운 이웃이 콩트를 지향하며 우습고 따뜻하고 그래서 얼핏 좀 하찮아도 보이는 70년대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재미있게 맛봬기 한다면 대범한 밥상은 주요 배경이 6.25이다 보니 글의 무게 자체가 나의 아름다운 이웃들과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한 숟갈 한 숟갈이 맘 편히 떠먹기에는 알알이 거칠고 입에도 쓰고 혀는 따갑고 목 매이는 구석이 많은 한 많은 어머니들의 삶이 골자였던 것이다.

86세의 노모가 저승사자라도 보는 줄 알고 덜컥 겁을 먹었던 딸은 "이노옴, 게 섯거라. 이노옴, 나도 죽이고 가거라 이노옴."(p212) 소리를 지르는 모습에 가슴이 무너진다. 틀니를 빼 쭈글쭈글해진 잇속으로 벅벅 이를 가는 시늉을 하며 피눈물을 흘리는 모친의 눈앞에서 그녀의 오빠가 죽어 가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인민군에 있다가 도주한 후 빨갱이로 몰려 갖은 고초를 겪었고 시민권이 없어 피난도 옳케 가지 못한 오빠는 반병신이 되어 보위부 군관의 총에 맞아 죽는다. 모녀는 핏줄을 땅에 묻지 않았다. 한줌의 가루로 바닷가에 훨훨 날려보냈다. 운명에 순응해서가 아니요 한을 품고 삭이기 위해서도 아니요 분단에 대한 도전으로써 감내한 선택이었다. 어머니는 아들과 똑같은 끝을 맞게 해달라 딸에게 유언한다. 친아들은 북한에 아내와 함께 남겨놓고 형님의 아들을 지게에 짊어진 채 피난길에 오른 남자의 종말, 제딸을 양갈보시키지 못해 안달난 어머니의 등쌀과 어머니의 나이쯤 되어 어느덧 그 어머니처럼 부끄러움을 잊고 살았음을 깨닫게 된 딸, 숫총각이 가장 먼저 총 맞아죽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들 같은 군인에게 하룻밤을 내어준 노파의 웃음띈 얼굴, 전쟁통에 남자들이 모두 떠나간 마을에 들이쳐 양색시를 찾는 미군들과 그들에게 답싹 안겨간 또다른 노파의 밤, 13평 아파트를 받기로 하고 영감의 후처로 들어가 똥오줌을 다 받다가 아파트는 커녕 달랑무 꼭지로 눈칫밥만 먹고 집을 나오게 된 부인의 엉덩이 들썩들썩해지는 걸음, 6.25 동란 중에 서울 변두리에서 산부인과를 개업해 평생을 소파수술에 전염한 여의사가 병원 문을 닫기 전 꼭 한번 받기를 희망했던 생명, 빨갱이로 죽은 남편과 아들을 전쟁통에 실종된 것으로 묻어두고 산 모녀가 그들을 부처님 전에 모신 어느 하루. 어느 한 가지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어서 밥상도 그냥 밥상이 아니라 대범한 밥상을 차려야 했는가 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범한 밥상 위의 단편 속에는 구수하거나 정답거나 단정하거나 다정하거나 따뜻한 찬 같은 것은 아예 없다.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갑거나 땀으로 눈물로 바글바글 끓여 소태 같거나 뗏국물이 자글자글 한 것에 그 만들어진 모습을 다 보고 나니 정말로 먹고 싶지가 않아져 눈 딱 감고 삼켜야 했던 찬들이 다다. 단편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여성인 주인공들은 눈시울 붉히게 하는 모성과 동시에 찔찔하거나 얌체 같아 불편한 속물근성을 안팎으로 숨기지를 않는데 그 모습이 안타깝고 창피하고 몰골이 송연해지는 맛을 느끼게 한다. 동시에 쨍하다. 울적한 이야기들에 틀림없는데 왜 이토록 눅눅함 없이 카랑카랑한지, 이것이 모두 문장 때문인지 뭔지 이유를 모르겠다. 같은 여성으로서 자기 비하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어쩐지 뱃심을 키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까닭도 영 알지 못한다. 모르면서도 든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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