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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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와 함께하는 여름. 뮤직트리 출판사에서 출간된 생뱅 테송의 책 제목입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따라가는 내내 영롱한 빛을 받으며 세상에 뛰어든 것 같고, 짐승과 숲이 애틋해지고, 요컨대 삶이 감미롭게 느껴진다"던 작가의 추천사를 읽으며 저도 생뱅 테송이 보낸 것과 같은 여름을 나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생뱅 테송처럼 그리스령 제도의 어느 섬에 틀어박혀 유유자적 호메로스를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요. 집콕방콕, 휴가 기간 내내 이어진 장마철 빗소리 속에서 영웅들을 만나고 병장기 소리를 듣고 신들의 질투와 다툼과 사랑을 엿보는 대서사시를 읽는 일이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휴가 이즈 뭔들, 책 이즈 뭔들, 올해 제 여름 휴가는 일리아스가 순삭!! ㅋㅋㅋ

"두려워 말고 그대가 아는 대로 신의 뜻을 말하시오. 칼카스여!"(p30) 아킬레우스가 예언자 칼카스를 독려합니다. 제우스의 아홉해가 지난 트로이의 전장. 아카이오이족의 그리스 진영은 신이 쏘아보낸 역병으로 산처럼 쌓여가는 전우의 시체를 태우고 있습니다. 포이보스 아폴론이 아가멤논에게 진노한 까닭입니다. 아폴론의 사제 크뤼세스를 모욕하고 그 딸의 몸값을 거부한 탓에 아카이오이족은 장작더미가 부족할 지경이 되어 예언을 구했으나 이로 인해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에 다툼이 벌어질 줄을 누가 알았을까요. 아가멤논은 크뤼세이스 처녀를 돌려보내는 대신 명예의 선물을 마련하라며 아킬레우스의 전리품 볼이 예쁜 브리세이스를 빼았습니다. 명예에 흠집이 난 아킬레우스는 분노하며 선언합니다. "프티아로 돌아가겠소!". 사과를 해도 부족할 판국에 아가멤논은 제발 도망가라며, 그대 말고도 내 명예를 높여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며 이죽대지요. 치를 떨며 막사로 돌아간 아킬레우스는 여신인 어머니 테티스를 불러 간청합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저를 단명하도록 낳으셨으니, 높은 곳에서 천둥 치는 올륌포스의 제우스께서는 제게 명예라도 주셔야지요."(p43) 아가멤논이 아카이오이족 가장 용감한 용사를 존중하지 않은 대가를 치르도록, 그가 제 어리석음을 땅을 치고 후회하도록, 아가멤논이 자신의 앞에서 굴종하도록, 제우스를 설득해 달라 눈물을 뿌리니 여신이지만 너무나 인간적인 어머니 테티스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올륌포스로 날아오른 그녀는 제우스에게 간청합니다. "명이 짧고 길지 않은 제 아들의 명예를 지켜주세요. 아카이오이족이 아킬레우스를 존중하고 전보다 큰 경의를 표하기 전까진 그들에게 승리를 내리지 말아주세요." 테티스에게 마음이 움직인 제우스는 트로이아인들에게 연전연승의 행운을 날립니다. 거짓된 승리를 약속하는 꿈을 보내어 아가멤논을 전쟁터로 끌어내면서 그의 손발과 같은 영웅들을 죽여버려요. 제우스가 진두지휘하는 전쟁을 일개 인간들이 어떻게 버텨낼까요. 수수단처럼 쓰러지는 아카이오이족의 전사들, 이를 보는 헤라와 아테네 그리고 포세이돈의 마음에 슬픔이 차오릅니다. 그들은 꾀를 내어 제우스를 속이고 아카이오이족에 힘을 실어줍니다. 인간들의 싸움이 어느 새 신들의 싸움이 되어 전장은 하늘 위 올륌포스로까지 확대되고 청동의 병장기 소리는 바다를 건너 2천 8백년 후의 오늘까지 울려퍼져요.

저는 여태 일리아스가 오뒷세이아처럼 어느 영웅의 이름인 줄로만 알았어요. 알고 보니 일리오는 트로이를 이르는 옛 그리스어였더라구요. 일리오의 노래, 트로이 전쟁을 노래하는 서사시인 셈이지요. 이 책은 독자에게 마냥 친절하지만은 않아서 시작부터가 뜬금없습니다. 파리스가 어떻게 헬레네를 납치해 트로이로 도주했는지, 아가멤논과 그의 동생 메넬라오스가 헬레네를 되찾기 위해 연맹의 영웅들을 어떻게 결집시켜 트로이로 출발했는지, 트로이에 당도하기까지의 경위나 아홉해까지의 전투들이 어떤 양상이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어 있거든요. 대뜸 말다툼을 벌이는 두 영웅들이 등장할 땐 저 역시도 어찌나 놀랐는지 이거 혹시 파본인가, 일리아스 앞에 다른 책이 있는데 내가 몰랐나 싶었습니다. 그리스로마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익숙한 독자가 아니라면 무척 당황스런 시작일 수 있어서, 어쩌면 펼치자마자 중도포기할 수도 있겠다 싶었기에, 준비 독서를 좀 하신 후에 시작하라고 권유하고 싶어요. 좀 뻔뻔한 말이지만 이윤기의 그리스로마 신화 합본판, 이윤기 번역의 변신 이야기, 매들린 밀러의 아킬레우스의 노래를 읽고 시작한 저는 준비가 좀 만만이었는지 술술 꿀떡꿀떡 호메로스를 삼켰습니다만 이거 뭐죠? 책이 이상한데서 끝이 나서 막판에는 다시 당황했습니다. 아킬레우스의 죽음도 아니요. 트로이의 목마는 더더욱 아니요. 헥토르의 시체를 그 아버지 프리아모스에게 넘겨주고 장례가 끝날 때까진 전쟁을 치르지 않겠다는 아킬레우스의 약속하에 헥토르를 장사 지내는 걸로 깔끔한 마무리. 군더더없기 없이 끝. 진짭니까? 정말루요? 책을 앞뒤로 몇 번을 훑었습니다.

독자들마다 느낀 재미의 요소가 다를텐데요. 저한테는 어리둥절할 정도로 개성적인 엉망진창인 신들이 제일 큰 흥미였어요. 그들은 말도 안되게 강인해서 천둥과 벼락을 내리고 날아가는 활의 방향을 바꾸고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며 상과 벌을 결정하는데요. 또 말도 안되게 허약해서 인간의 병장기에 손을 베이거나 배를 찔려 피를 보고 허겁지겁 달아나 엉엉 울어요. 헤라와 제우스는 부부싸움을 엄청 하는데 헤라는 잔소리를 쏟아내고 제우스는 매맞고 싶지 않으면 조심하라며 헤라를 협박하고 아들인 헤파이스토스는 헤라를 말려요. 제우스는 테티스의 간청으로 트로이의 편을 들겠다 철썩같이 약속하고선 또 한날엔 불쌍하게 죽어가는 그리스 진영의 편을 들어주는 등 줏대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영둥들은 거의가 반신들이에요. 모계는 인간이지만 부계는 올륌포스의 신들. 그 신들이 전쟁터에서 제 자식이 죽어날까 전전긍긍 하며 빼돌려? 말어? 고민을 합니다. 자식이 없는 몇 몇 신들이 주접 떨지 말라며 그런 신들을 타박해요. 자식이 엄청 많은 제우스는 그야 다 무관심. 아르테미스는 새어머니 헤라에게 뺨을 맞고 활을 뺏긴 후 조르르 제우스에게 달려가 고자질을 해서 이미지가 와장창 깨졌습니다. 어떻게 보면요.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의 한심한 면이 똘똘 집약된 존재인 것만 같달까요? 능력치에서 인간의 상위호환적 존재이지 석가모니나 하나님 같이 절대적인 느낌이 전혀 없어 심심할 새가 없어요. 다른 신화책들보다 일리아스에서 신들의 이런 개성이 훨씬 두드러져서 읽는 재미가 말도 못하게 쏠쏠합니다.

두 번째 재미는 전쟁터라고는 믿기지 않는 뽀송뽀송함??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쟁터니까 암울하고 질척이고 피와 고름, 고통, 원망, 복수가 난무하며 잔인할 것 같잖아요. 전혀전혀 아니에요. 모든 장면이 전쟁 안같게 매우 심플합니다. 다치고 죽는데, 그것도 턱 옆으로 청동 창이 밀고 들어와 혀가 잘리고 이가 다 부러져 죽거나 내장이 쏟아지며 죽는 일들이 비일비재한데 소설에서는 아무 고통도 안느껴져요. 마치 게임을 보는 느낌? 어떡해, 누구 죽었어, 히잉, 미간을 찌푸리며 울상을 짓는 게 아니라 아싸 한 놈 죽이고! 내지는 게임 오버! 같은 느낌으로다... 죄송합니다. 진짜 설명이 안되요. "전쟁에서 죽은 젊은이에게는 무엇이나 어울리는 법이다. 날카로운 청동에 찢겨 누운 것조차도. 그는 비록 죽었지만 그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다."(p624) 정말 딱 이런 느낌이었다는 것만 말씀드려요. 제우스의 분노와 신들의 내 영웅 내가 구한다 작전 때문에 천둥도 치고 종종 짙은 안개는 낄지언정 비 한 방울 없이 트로이의 하늘은 언제나 맑구요. 별이 총총합니다. 건조한 대기, 공기는 향기롭고, 이리스 여신이 제우스의 전령으로 자주 지상을 오르내리는만큼 무지개도 자주 보였을 것 같아요. (무지개 장면이 등장하진 않지만 이리스가 나타날 때면 자동적으로 하늘에서 지상까지 길게 이어진 무지개가 떠올라요.) 오로라는 남편 곁에 누워있다 제 시간에 칼 같이 일어나 자스민 빛깔의 새벽을 열고, 양 진영이 십 년 가까이 긴 전쟁을 치르면서도 배급에 아무런 차질이 없는지 먹거리는 언제나 풍성합니다. 영웅들은 공평하게 고기를 나눠먹고, 모닥불을 피운 병사들은 여기저기서 배를 채워 배곪는 이는 구경조차 할 수 없고, 포도주로는 흥청망청 불도 끄구요. 장례를 치르면서 레슬링에 권투에 달리기 시합을 벌이며 상품을 내거는데 이거 원 무슨 전쟁이 아니라 축제 같다니까요. 포로로 잡힌 처녀들이 영웅들에게 순종하다 못해 적 장군의 죽음에 오열하고 영웅 중 누구 한명 이 전쟁에 대해 고뇌하는 이도 없으며 고향으로 돌아가고팠던 병사들도 신들이 용감한 마음만 가슴에 심어주면 고향보다 전장인 트로이를 좋다고 느끼는 등 말할 수 없이 굉장한 판타지더라구요. 그것도 2천 8백년 묵은 판타지요.

리뷰가 또또 길어졌습니다. 고전이 읽기 전엔 참 막연해요. 대강의 줄거리를 아는데 꼭 읽어야 하나 의문도 들고 2천년 전의 이야기라니 지루할 것도 같고 말이죠. 그런데요. 정말로, 정말정말로 신!선!합니다. 신선하다는 표현을 실뱅 테송과 백선희 역자님이 쓰실 적엔 이해를 못했는데 읽고 나니 그 말씀 선명하게 피부에 와닿아요. 옛것이라 낡고 고루한 게 아니라 오늘날의 읽을거리에서 느껴보지 못한 전혀 다른 매력으로 신선. 생생, 쨍하게 재미난 이야기가 넘쳐나요. 의미니 뭐니 다 때려치우고 전 그냥 재미있어서 그리스로마 신화도 변신 이야기도 일리아스도 좋았어요. 읽어봐야 알아요. 리뷰로는 백날 말해도 못느끼실테고 저도 못느꼈고 이건 진짜 읽어야 알 수 있는 그런 맛! 도서출판 숲에서 출간된 천병희 역자님의 일리아스는 서사시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와 번역하셨어요. 소설로 개작하거나 축약된 일리아스랑은 읽는 맛이 아마 다르지 싶은데 다른 일리아스를 안읽어봐서 비교가 안됩니다. 뭣도 모르는 제가 읽기에도 가독성이 좋아서 추천하고파요. 종종 영웅들의 이름이 너무 많이 나열될 땐 깜빡 졸릴 때도 있는데 낭독하며 읽으면 괜찮습니다. 1982년 첫 원전 번역 이후 3차에 걸쳐 개정판을 출간했구요. 라틴어 원전으로 번역 작업을 하는 흔치 않은 역자님이시라고 해요. 해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요거. "현존하는 필사본들은 근래에 출토되기 시작한 파피루스 단편들과 놀라울 만큼 내용이 일치해서, 우리는 현존하는 필사본들이 고대 그리스인들의 필사본과 사실상 같은 것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p776) 2천년도 더 전의 독자들과 내가 같은 이야기를 읽고 있다고 생각하니 말할 수 없이 짜릿합니다. 시간을 달리는 고전, 일리아스를 꺼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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