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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사랑 ㅣ 이탈로 칼비노 전집 8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6년 2월
평점 :
품절
여태 읽어온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시작하는 단편인 어느 군인의 모험을 읽을 때는 정말로 아리송한 느낌이었죠. 애걔, 이야기가 왤쾌 꾀죄죄해? 살짝 불평도 했어요. 기차에서 미망인을 만난 젊은 보병은 안달복달 하며 여성에게 닿기 위해 애를 씁니다. 기차가 흔들릴 때마다 점점 대담해져 가는 보병의 신체 접촉, 제 눈에는 영락없는 추행만 같아 마음이 불편해지려는 찰나 소설이 끝나는데 말미의 장면에서 잠이 화악 달아나며 우스워졌습니다. 잠이 든(척 하는) 미망인을 보며 보병이 주체할 수 없는 욕망으로 몸을 일으키는 순간에 마주치거든요. 부인용 모자 아래로 맑고도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망인의 푸른 두 눈을요. 보병은 더는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고서 덜컥 겁을 먹습니다. 거세게 쏟아지는 빗물 소리, 텅텅 비어버린 객차 안, 웬일인지 더는 미망인이 걱정되지 않더군요.
전작들과는 달리 힘겨운 사랑 속에는 환상성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습니다. 판타지 같은 맛은 아주 제로에요. 그렇다고 아주 현실 같지도 않은 상황들이 펼쳐집니다. 현실이라면 이보다 더 코미디일 수도 없는 그런 상황들이요. 남편과 함께 잠이 든 창녀의 집으로 도피한 도둑, 그 도둑을 잡으러 온 경찰, 도둑과 경찰 모두에게 아내와 침대를 내어주는 남편. 경찰이 오자 화장실로 숨어버린 도둑은 심심하고 갑갑해서 자수를 하고 남편은 평화롭게 아내 옆자리를 사수하며 잠이 듭니다. 수영을 하다 수영복 하의를 잃어버린 부인은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하고픈데 수치심을 극복하지 못해 둥둥 떠다니다 익사하기 직전에 이르고요. 아름다운 여인과 보낸 하룻밤이 어찌나 꿈결 같던지 신선하고 상쾌한 아침을 부푼 마음으로 나섰던 회사원은 순식간에 현실에 찌들어 간밤 일로 갈아입지 못한 옷을 불평합니다. 도대체가 사람들이 왜 사진을 찍는지 모르겠다던 남자는 사진을 찍으며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그 여인의 사진을 밤낮 찍어대는 일에 집착하다 사정없이 채이게 됩니다. 반할만큼 아름다운 여자를 만났는데 손에는 한참 재미있는 장면으로 넘어간 책이 들려있는 남자의 휴가 이야기가 제일로 취향이었어요. 여인의 유혹은 끈질긴데 책은 읽고 싶고 도무지 어째야 좋을지 알 수 없는 독서광은 끝내 여인을 격정적으로 포옹하지만 한 손으로는 다급히 페이지 사이에 책갈피를 꽂습니다. 다시 책을 읽고 싶은데 읽었던 장면을 찾지 못하는 것만큼 짜증나는 일은 없으니까요.
힘겨운 사랑 속 어느 주인공은요. 어느 날 의문모를 삶의 염증을 느끼게 되요. 영화를 너무너무 좋아했던 사람인데 하루아침에 영화 보기가 시시해져 영화관에도 안가게 됩니다. 배우들 얼굴에서 표정도 특징도 없어졌나다 뭐라나. 영화 따위 이제는 너무너무 지루하고 삶도 따분하다나요? 그런 그에게 의사가 처방을 내립니다. "근시니까 안경을 쓰세요." 주인공은 안경을 쓰는 가벼운 행위만으로 삶이 수백배는 더 흥미로워졌다고 고백해요. 배우들 얼굴에서 사라졌던 감정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세상은 다채로운 색과 선명함으로 가득가득. 암요. 알죠알죠. 안경을 교체할 때마다 어라? 바깥이 원래 이 색깔이었어? 저도 몇 십년 째 한결같이 놀라는걸요. 힘겨운 사랑을 읽으며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도 새 작품을 접하면 그때그때 안경을 갈아써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다른 맛, 또다른 즐거움, 또다른 세상을 선명하게 포착할 수 있도록요. 시작의 실망에 비해 끝으로 갈수록 점점 더 좋아졌던 작품집. 이탈로 칼비노가 참 좋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