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 풀컬러 일러스트 에디션 아르볼 N클래식
제인 오스틴 지음, 앨리스 패툴로 그림, 강수정 옮김 / 아르볼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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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계의 대모 제인 오스틴과 기초 로맨스학을 정복해보자!

 신랄한 풍자와 냉소 섞인 유머는 덤!!

 

네더필크 파크에 새이웃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베넷 부인은 신이 났다. 15세부터 23세에 이르는 미혼의 다섯 딸을 둔 베넷 부인의 유일한 소망이 부유한 남성과 딸의 결혼이기 때문이다. 천사처럼 상냥한 첫째 제인, 똑똑하고 재기 바른 둘째 엘리자베스, 책만 아는 고지식한 셋째 메리, 장교들과의 멋진 연애를 꿈꾸는 철없고 무모한 넷째 캐서린과 다섯째 리디아. 일 년 수입이 4-5천에 달한다는 소문의 새 이웃이 미모의 큰 딸 제인을 보면 틀림없이 탐낼 거란 기대로 베넷 부인은 이웃이 참여할 무도회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아니나 다를까. 잘생기고 부유한 런던의 신사 빙리는 첫눈에 제인에게 반한 눈치다. 제인 또한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하지는 않지만 그에게 푹 빠진 모양이고.

원만한 이들 커플 뒤에 자매와 친구에 대한 애정은 넘치되 그들의 배경에는 남다른 경멸을 품은 남녀가 있었으니 오만군과 편견양. 이 소설의 주인공인 다아시와 엘리자베스다. "참아 줄 만은 하군. 하지만 내 마음을 끌 정도로 예쁘진 않아. 다른 남자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아가씨를 우쭐하게 만들어 줄 기분도 아니고."(p18) 자신과 달리 무도회를 즐기지 못하는 다아시를 위해 빙리는 엘리자베스(이하 리지)와의 춤을 주선하지만 리지를 본 다아시는 단칼에 거절한다. 두 사람의 대화를 고스란히 듣게 된 리지는 호감이란 전무한 상태로 다아시를 마주하고 빙리와 제인의 관계까지 다아시로 인해 파탄에 이르자 그를 더욱 싫어하게 된다. "그 사람하고는 절대 춤을 추지 않겠다고 맹세라도 할 수 있어요."(p27) 오만한 남자 다아시에게 완벽한 철벽을 칠 준비가 된 리지와 기를 쓰고 접근하는 여타의 여인들과 달리 무례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리지에게 자꾸만 눈이 가는 다아시. 뜨겁게 불타오르는 로맨스는 없어도 리지와 다아시의 밀당이 유쾌하고 은은한 캐미에 가슴이 설렌다. 열정이 아닌 상황에 대한 타협으로써 조금씩 가까워지다 끝내 꽉찬 해피엔딩을 이룩하는 커플들이 기특해 책을 덮고도 한참을 웃었다.

(사족) 오만과 편견이 결혼에 안달난 여자들의 이야기라 읽기 싫다는 평에 대한 변명 : 18세기 배경의 고전소설이다. 연애결혼이 아예 없진 않았겠지만 거의 불가능한 시대였고 가정교사 외에는 지주계급 더 넓게는 귀족 여성의 밥벌이가 불가능한 시대였다. 베넷 일가처럼 집안에 아들이 없으면 부친의 재산은 남성친족에게 한정상속 됐는데 가족이 거주하던 집이라 해도 예외가 없었다. 결혼을 못하면 죽을 때까지 부친, 오빠 또는 남동생의 인생에 종속되어 짐짝 같이 살아야했던 시대의 여성들에게 관대한 시선을 가진다면 인물들에 대한 평도 많은 부분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결혼에 안달난 것이 아니라 생존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로, 좋은 남편을 만나 팔자 펴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 삶을 지키고 행복해지기 위해 모험을 감수하는 용기로, 결혼이라는 유일하게 열린 독립의 문을 통과해 존엄을 지키려던 노력이 성공을 맞는 이야기로. 내게는 결혼에 대한 당시 여성들의 갈망이 겨울을 준비하며 먹이감을 찾아나선 사냥꾼의 욕망과 다름없게 느껴져 자주 짠하고 애닮은 마음이 일곤 했다.

동시에 그런 시대에 엘리자베스와 같은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운 제인 오스틴의 선택은 놀랍고도 감탄스럽다. "저는 다만 스스로 판단하기에 제가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행동할 생각이고, 부인이든 누구든 저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의 의견에 좌우되지 않을 겁니다."(p464) 지체 높은 부인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행복을 피력하는 엘리자베스. 생각해보면 샬럿 또한 마찬가지다. 리지에게 구애한 콜린스의 과거를 알고도, 아니 그런 과거를 알기 때문에 콜린스를 잘 유도해 생에 처음으로 청혼을 받아내고 뜻밖의 결혼까지 쟁취한다. 아름답지도 않고 물려받을 재산도 없으며 가족 모두가 노처녀로 살 것을 기정사실화했던 샬럿은 자신의 현실적인 선택 앞에 그 어떤 자기혐오나 자기비하도 없이 만족할만한 새 인생을 꾸려나간다. 속물근성의 끝을 달리는 베넷부인이나 방탕한 위컴과 결혼해 벌써부터 빚을 지는 리디아, 리지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후에도 철판 깔고 관계를 유지하는 빙리양까지도 자기 긍정성이 넘친다. 대체로 만족할만한 삶을 산다. 여성들에게 느끼는 작가의 연민이 그런 식으로 표출됐던 건 아닐까? 마치 판타지처럼? 제인 오스틴은 자신의 작은 세계 속 여성들의 삶을 심도 깊게 관찰하고 애정을 갖고 증언한다. 그들의 허영, 오만, 이중성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존중하며 행복을 빌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새삼 참 좋은 책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고백하건대 나는 오만과 편견이 그리고 제인 오스틴이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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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가 - 일상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파리의 관찰자 클래식 클라우드 24
이연식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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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클라우드 신간 소식에 환호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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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 우화 전집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2
이솝 지음, 아서 래컴 그림,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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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아동용이 아니었던

따뜻함이 1도 없는 잔인한 약육강식의 세계!!

차가운 도시 노예 이솝이 전하는 지혜와 교훈!!

창녀 로도피스는 트라케 출신으로, 사모스 사람인, 헤파이스토폴리스의 아들 이아드몬의 노예였으며, 우화작가 아이소포스의 동료 노예였다. 아이소포스도 이아드몬의 노예였음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델포이인들이 신탁에 따라, 누구든지 아이소포스의 사망 보상금을 수령하기를 원하는 자는 출두하라고 여러 차례 전령을 고지했을 때, 이아드몬과 이름이 같은 아이드몬의 손자 외에는 아무도 출두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소포스가 이아드몬의 노예였음이 입증되었던 것이다.

(헤로도토스 역사/푸른숲/천병희/p241-242)

현대지성 클래식 32번 도서 <이솝 우화 전집>이 출간됐다. 이솝과 아무 인연이 없는 줄만 알았던 나. 책날개를 읽다가 감짝 놀랐다. "트리키아 지방에서 태어나 부유한 사모스 사람이었던 주인을 변호해준 공로로 자유민이 되었고, 그 후에 그리스의 일곱 현인과 어울렸다. 사모스 사람의 외교사절이 되어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와 협상을 벌이고..." 순간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 어? 이 사람이 이솝이야? 어린애도 아닌데 이 사람 내가 안다는, 어딘가에서 읽었다는 자랑을 너무너무 하고 싶어서 얼른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꺼냈다. 그리스 7현 중 한 명인 솔론과 같이 크로이소스를 만났던가? 확인 결과 아닌 걸로 밝혀졌다. 창녀들이 짓는 피라미드 이야기에도 나왔는데 어디쯤인지 기억이 안나 결국 차근차근 찾아나섰다. 2장 아이큅토스의 역사에서 이아드몬의 또다른 노예였다가 시인 사포의 오빠 뮈틸레네의 카락소스에 의해 자유민이 된 창녀 로도피스의 이름 뒤에 아주 잠깐 언급된다. 지금 보니 주석에 아이소포스가 "이솝의 그리스어 이름"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나참 나는 대체 뭘 읽었던건지;;

토끼와 거북이, 여우와 신포도(원전에서는 덜 익은 포도), 개미와 베짱이(원전에서는 매미), 북풍과 태양, 시골쥐와 도시쥐(원전에서는 들쥐와 집쥐), 양치기 소년, 금도끼와 은도끼(산신령의 정체가 자그마치 헤르메스다), 사자 가죽을 뒤집어 쓴 당나귀 등 이솝의 우화인지도 모르고 소화한 옛날 이야기들이 참 많다. 금도끼와 은도끼는 우리 전래 동화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한국민속대백과 사전에 따르면 개화기 학생들의 교과서에 이솝 우화가 수록되면서 우리 이야기인냥 정착을 한 거라나. 총 358편의 우화 중 제우스와 헤르메스, 아프로티테가 등장하는 몇 편을 제외하고 동물들이 등장하는 우화 절대 다수는 이미 익숙한 이야기였다. 이게 이솝 우화였어? 이것도 이솝 우화라고? 뭐야, 이것도?? 하면서 체크하다 보면 정말 끝이 없다. 이솝 우화가 성서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힌 책이자 꼭 읽어야 할 대중고전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난다. 영미식 편집을 거치며 원전의 느낌이 살짝 퇴색하긴 했지만 덕분에 더욱 많은 독자를 거느린 고전이 되었다는 사실도 놀랍고.

동물 이야기가 다수라 예쁜 삽화와 함께 그림책으로 많이 출간되는데 원전을 보면 이거 절대로 아동용은 아니다. 강한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고 꾀 많은 동물이 어수룩한 동물들을 속여 먹는다. 물론 제 꾀에 제가 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당한 동물을 두고 머리에 아무 것도 안들었다는 식으로 비아냥 댈 때도 많다. 동양 고전의 악인들은 은혜를 받고 감화되어 새사람으로 거듭나지만 이솝우화에서는 도와준 자가 백프로 목숨을 잃는다. 악한 자는 개화되지 않는다. 애가 물에 빠졌는데 쳐다만 보고 있는 남자, 싸움 말리려고 나섰다가 주제도 모르고 나선다고 비웃음 당한 가시나무, 주인에게 예쁨받을 생각에 애교 좀 부렸다가 몰매 맞는 노새, 몸바쳐 열심히 일한 결과로 죽어서도 북이 되어 두들겨지는 당나귀, 내 신이 더 위대하다고 다툰 인간들이 상대 신에게 응징 당해 사망하는 각종의 엄청난 우화들이 있다. 이솝 우화 속에서 불행을 당한 자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이런 일을 당해도 싸지." 악을 두고 손가락질 하며 하는 말이 아니라 착한 일을 했다가 도리어 횡액을 당한 이가 한탄하며 하는 말이다. 이솝의 시선도 '아휴, 안됐다'가 아니라 '가소롭게 누가 누굴 돕는다고' 라는 식이라 깜짝 놀랄 때가 많다. 그리고 이런 이솝의 우화들을 그리스 다수 시민들이 좋아했다. 그리스 시대라고 동정을 모르지는 않았겠으나 동정을 권장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었던 건 확실한 것 같다.

이솝 우화는 거칠고 시니컬하다. 차갑다. 이솝 자신 또한 "독수리와 쇠똥구리" 라는 우화를 전하다가 격노한 델포이인들에게 살해 당했다. 뭣모르고 말랑말랑 따뜻한 동화 정도로 접근하면 큰코 다친다는 얘기다. 동시에 그런 이유로 재미나다. 현실적이고 속시원하고 뜨끔하고 공감간다. 교훈이 덧붙여진 이야기보다 그렇지 않은 이야기들이 훨씬 흥미진진했던 이유기도 하다. 코로나 시대이다 보니 책을 덮고도 제일 생각나는 우화는 제우스와 거북이였는데 자신의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 거북이를 혼쭐 낼 생각으로 제우스는 거북이 등에 집을 얹어준다. 죽을 때까지 집이나 짊어지고 다니라는 얘기다. 당시 거북이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집이 좋아서요. 집이 최고잖아요."(p160) 거북아, 괜찮아, 나도 그래. 코로나 시대에는 거북이 같은 우리가 완전 대세라고. 물론 이 우화의 교훈은 남의 집 진수성찬보다는 내 집 조촐한 밥이 더 좋다는 뜻이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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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개의 달 시화집 가을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윤동주 외 지음, 카미유 피사로 외 그림 / 저녁달고양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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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영 어려운 독자 중의 한 명이다.

어디가 어떻게 좋은 줄을 도통 몰라서 연중 행사로,

특히 가을을 기점으로 하여 기억할만한 시집을 꼭 한 권은 읽어 보려 애쓴다.

올해 내가 선택한 책은 저녁달 이야기에서 출간된 <열두 개의 달 시화집 가을편>이다.

작년에 동주와 스페셜 에디션으로 처음 만나 귀한 만듬새로 책을 출간하는 곳인 줄을 알게 했던 곳.

올해도 역시나 양장의 제본이 어여쁜 시집을 출간했다.

9월의 카미유 피사로, 10월의 빈센트 반 고흐, 11월의 모리스 위트릴로.

위대한 화가들의 그림과 함께 시가 놓였다.

윤동주와 백석, 김소월, 정지용, 김영랑, 노천명, 릴케, 프란시스 잠, 오시마 료타 등

총 35명이나 되는 시인들의 아름다운 글들이다.

"오래간만에 내 마음은"이라는 부제가 붙은 11월, 그중에서도 5일인 오늘은 오장환 시인의 <첫겨울>

감나무 상가지 / 하나 남은 연시를 /가마귀가 / 찍어 가더니

오늘은 된서리가 내렸네/ 후라딱딱 훠이/ 무서리가 내렸네

가을 아닌 듯이 추워서 오들오들 떨며 집으로 뛰어와 된서리 내린 시인의 첫겨울을 읽고 나니

그래도 나 있는 여기는 아직 가을이 한창이구나,

첫겨울 오기 전에 낙엽을 더 많이 밟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라딱딱 훠이, 다음엔 가마귀도 한번 이렇게 쫓아볼까?

(시집은 시인 고유의 필치를 살리기 위해 여러 맞춤법과 표기가 초판본에 맞춰져 있다.)

1일, 2일, 3일 등으로 날짜를 표시해 매일매일 읽으라고 독려하는 책인데

성격 급한 나는 100미터 달리기 하듯 시도 그림도 후다닥 감상해버리고 말았다.

그런 내가 부끄럽고 책에 미안해서 이 가을 다 가도록 매일 같이 다시 읽으리라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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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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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막힌 재독의 맛!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야말로 향기로 구축할 수 있는 소설의 최고봉이 아닐까?

향기를 약탈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 세상 그 어떤 야만인과 세상 그 어떤 문명인에게서도 포착하지 못한 살인의 이유다. 그런데 이 소설 향수는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스물다섯 번이나 살인을 저지르는 남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향수 제조인 도제 장바티스트 그르누이. 그가 묵었던 오두막과 작업실에서 로르 리시의 잠옷과 속옷, 빨간 머리카락이 발견됐고 차례차례 다른 스물네 명의 옷과 머리카락 그리고 그들을 살해한 도구까지 찾아낸다. 없는 죄를 뒤짚어 쓴 일은 결코 없이 모두가 그의 손에 자행된 범죄의 흔적이다. 1766년 4월 15일, 그르누이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사지가 부러질 때까지 쇠몽둥이로 맞은 후 죽을 때까지 십자가에 매달리는 고통스런 형벌이나 그의 손에 죽은 스물다섯 소녀의 목숨값으로는 부족하리라.

범행 동기를 묻는 재판장에게 다만 "소녀들이 필요했다"는 말만 반복하는 그르누이. 살인마의 피를 바라는 그라스 시민들의 분노가 그르누이가 누운 감방까지 넘실대는 가운데 그는 피곤했던 인생에 휴식이라도 주듯이 수마에 빠져든다. 마냥 온순하고 얌전한 태도로 작은 몸을 한뼘 공간에 웅크리고서. 장바티스트 그르누이에게 필요했던 향기는 도대체 뭐였을까. 향기의 무엇이 재물도 권력도 여인의 아름다운 육체도 필요로 하지 않던 무소유한 남자로 하여금 소녀들을 살해하게 했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선 그르누이가 출생한 1738년 7월 17일로 시간을 되돌려야 한다. 프랑스에서도 가장 악취가 심한 파리, 그 안에서도 가히 지옥의 냄새가 풍긴다는 페르 거리와 페론 거리 사이의 이노상 묘지 위, 이제는 식료품 시장이 들어선 자리에서 생선 장사를 하던 그르누이의 어머니를 찾아야 한다. 네 번의 영아 살해 유기 후 다섯 번째 아이 그르누이를 생선 좌판 뒤에서 출산하고 오물 속에 방치한 그 시간 속으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는 1991년 12월 25일 열린책들에서 초판 1쇄가 발행된 이후 2019년 11월 20일까지 총 100쇄가 인쇄되었다. 전세계적으로는 2천만 부 이상이 판매된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의 책이다. 헤세와 릴케, 카프카 이후 독일이 배출한 가장 역량있는 작가일텐데 여태껏 나는 이탈리아 작가인줄로만 알았지 뭔가. 18세기, 향수라는 독특한 소재, 육신은 있으나 체취는 없는 비인간성과 폭력과 살육의 동물성이 혼합된 천재적인 연쇄살인마, 평범한 독자의 머리로는 상상하기 힘든 향기의 세계를 건설하고 군림하는 제왕 그르누이가 만들어내는 환성성에서 도무지 독일을 떠올리지 못한 탓이라고 변명해도 괜찮을까?

독자들의 "다시 읽고 싶은 책", "소장하고 싶은 책"의 욕구에 발맞춰 올초 리뉴얼 시리즈가 출간됐는데 녹색천을 씌운 표지가 보다시피 청량한 양장본이다. 재독을 부르는 리뉴얼 판의 물성에 반하고 다시 봐도 믿기지 않는 작가의 상상력에 거듭 감탄한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내 머리속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편집된 소설의 내용이었다. 결말마저도 내 기억과는 완전히 달랐는데 책을 엉망으로 읽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고 책이 내게 와서 다른 마침표를 찍었다고 이해하고 싶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향수를 읽을 때만큼 실감한 적이 없는데 이 경우로 보면 우리는 같은 책을 두 번 읽을 수 없다로 써야 맞으려나? 십 년도 더 전에 읽은 향수와 코 앞의 향수가 같은 책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고독에 대한 그르누이의 갈망과 어떤 인간의 체취도 느껴지지 않는 산 정상에서 그가 쏟아내던 환호를 나는 몰랐다. 그가 얼어죽으리라 가만히 눈 감던 순간조차 말이다. 읽은 책도 새롭다. 아니, 읽은 책이라 더욱 새롭다. 그 옛날 향수를 읽었던 독자들이 아는 재미라 속단하지 말고 소장 책에 만족하지도 말고 새로운 판형, 새로운 편집, 새로운 기억으로 꼭 한번 향수를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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