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지성 클래식 32번 도서 <이솝 우화 전집>이 출간됐다. 이솝과 아무 인연이 없는 줄만 알았던 나. 책날개를 읽다가 감짝 놀랐다. "트리키아 지방에서 태어나 부유한 사모스 사람이었던 주인을 변호해준 공로로 자유민이 되었고, 그 후에 그리스의 일곱 현인과 어울렸다. 사모스 사람의 외교사절이 되어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와 협상을 벌이고..." 순간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 어? 이 사람이 이솝이야? 어린애도 아닌데 이 사람 내가 안다는, 어딘가에서 읽었다는 자랑을 너무너무 하고 싶어서 얼른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꺼냈다. 그리스 7현 중 한 명인 솔론과 같이 크로이소스를 만났던가? 확인 결과 아닌 걸로 밝혀졌다. 창녀들이 짓는 피라미드 이야기에도 나왔는데 어디쯤인지 기억이 안나 결국 차근차근 찾아나섰다. 2장 아이큅토스의 역사에서 이아드몬의 또다른 노예였다가 시인 사포의 오빠 뮈틸레네의 카락소스에 의해 자유민이 된 창녀 로도피스의 이름 뒤에 아주 잠깐 언급된다. 지금 보니 주석에 아이소포스가 "이솝의 그리스어 이름"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나참 나는 대체 뭘 읽었던건지;;
토끼와 거북이, 여우와 신포도(원전에서는 덜 익은 포도), 개미와 베짱이(원전에서는 매미), 북풍과 태양, 시골쥐와 도시쥐(원전에서는 들쥐와 집쥐), 양치기 소년, 금도끼와 은도끼(산신령의 정체가 자그마치 헤르메스다), 사자 가죽을 뒤집어 쓴 당나귀 등 이솝의 우화인지도 모르고 소화한 옛날 이야기들이 참 많다. 금도끼와 은도끼는 우리 전래 동화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한국민속대백과 사전에 따르면 개화기 학생들의 교과서에 이솝 우화가 수록되면서 우리 이야기인냥 정착을 한 거라나. 총 358편의 우화 중 제우스와 헤르메스, 아프로티테가 등장하는 몇 편을 제외하고 동물들이 등장하는 우화 절대 다수는 이미 익숙한 이야기였다. 이게 이솝 우화였어? 이것도 이솝 우화라고? 뭐야, 이것도?? 하면서 체크하다 보면 정말 끝이 없다. 이솝 우화가 성서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힌 책이자 꼭 읽어야 할 대중고전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난다. 영미식 편집을 거치며 원전의 느낌이 살짝 퇴색하긴 했지만 덕분에 더욱 많은 독자를 거느린 고전이 되었다는 사실도 놀랍고.
동물 이야기가 다수라 예쁜 삽화와 함께 그림책으로 많이 출간되는데 원전을 보면 이거 절대로 아동용은 아니다. 강한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고 꾀 많은 동물이 어수룩한 동물들을 속여 먹는다. 물론 제 꾀에 제가 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당한 동물을 두고 머리에 아무 것도 안들었다는 식으로 비아냥 댈 때도 많다. 동양 고전의 악인들은 은혜를 받고 감화되어 새사람으로 거듭나지만 이솝우화에서는 도와준 자가 백프로 목숨을 잃는다. 악한 자는 개화되지 않는다. 애가 물에 빠졌는데 쳐다만 보고 있는 남자, 싸움 말리려고 나섰다가 주제도 모르고 나선다고 비웃음 당한 가시나무, 주인에게 예쁨받을 생각에 애교 좀 부렸다가 몰매 맞는 노새, 몸바쳐 열심히 일한 결과로 죽어서도 북이 되어 두들겨지는 당나귀, 내 신이 더 위대하다고 다툰 인간들이 상대 신에게 응징 당해 사망하는 각종의 엄청난 우화들이 있다. 이솝 우화 속에서 불행을 당한 자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이런 일을 당해도 싸지." 악을 두고 손가락질 하며 하는 말이 아니라 착한 일을 했다가 도리어 횡액을 당한 이가 한탄하며 하는 말이다. 이솝의 시선도 '아휴, 안됐다'가 아니라 '가소롭게 누가 누굴 돕는다고' 라는 식이라 깜짝 놀랄 때가 많다. 그리고 이런 이솝의 우화들을 그리스 다수 시민들이 좋아했다. 그리스 시대라고 동정을 모르지는 않았겠으나 동정을 권장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었던 건 확실한 것 같다.
이솝 우화는 거칠고 시니컬하다. 차갑다. 이솝 자신 또한 "독수리와 쇠똥구리" 라는 우화를 전하다가 격노한 델포이인들에게 살해 당했다. 뭣모르고 말랑말랑 따뜻한 동화 정도로 접근하면 큰코 다친다는 얘기다. 동시에 그런 이유로 재미나다. 현실적이고 속시원하고 뜨끔하고 공감간다. 교훈이 덧붙여진 이야기보다 그렇지 않은 이야기들이 훨씬 흥미진진했던 이유기도 하다. 코로나 시대이다 보니 책을 덮고도 제일 생각나는 우화는 제우스와 거북이였는데 자신의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 거북이를 혼쭐 낼 생각으로 제우스는 거북이 등에 집을 얹어준다. 죽을 때까지 집이나 짊어지고 다니라는 얘기다. 당시 거북이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집이 좋아서요. 집이 최고잖아요."(p160) 거북아, 괜찮아, 나도 그래. 코로나 시대에는 거북이 같은 우리가 완전 대세라고. 물론 이 우화의 교훈은 남의 집 진수성찬보다는 내 집 조촐한 밥이 더 좋다는 뜻이라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