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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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지원 도서입니다


기가 막힌 재독의 맛!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야말로 향기로 구축할 수 있는 소설의 최고봉이 아닐까?

향기를 약탈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 세상 그 어떤 야만인과 세상 그 어떤 문명인에게서도 포착하지 못한 살인의 이유다. 그런데 이 소설 향수는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스물다섯 번이나 살인을 저지르는 남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향수 제조인 도제 장바티스트 그르누이. 그가 묵었던 오두막과 작업실에서 로르 리시의 잠옷과 속옷, 빨간 머리카락이 발견됐고 차례차례 다른 스물네 명의 옷과 머리카락 그리고 그들을 살해한 도구까지 찾아낸다. 없는 죄를 뒤짚어 쓴 일은 결코 없이 모두가 그의 손에 자행된 범죄의 흔적이다. 1766년 4월 15일, 그르누이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사지가 부러질 때까지 쇠몽둥이로 맞은 후 죽을 때까지 십자가에 매달리는 고통스런 형벌이나 그의 손에 죽은 스물다섯 소녀의 목숨값으로는 부족하리라.

범행 동기를 묻는 재판장에게 다만 "소녀들이 필요했다"는 말만 반복하는 그르누이. 살인마의 피를 바라는 그라스 시민들의 분노가 그르누이가 누운 감방까지 넘실대는 가운데 그는 피곤했던 인생에 휴식이라도 주듯이 수마에 빠져든다. 마냥 온순하고 얌전한 태도로 작은 몸을 한뼘 공간에 웅크리고서. 장바티스트 그르누이에게 필요했던 향기는 도대체 뭐였을까. 향기의 무엇이 재물도 권력도 여인의 아름다운 육체도 필요로 하지 않던 무소유한 남자로 하여금 소녀들을 살해하게 했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선 그르누이가 출생한 1738년 7월 17일로 시간을 되돌려야 한다. 프랑스에서도 가장 악취가 심한 파리, 그 안에서도 가히 지옥의 냄새가 풍긴다는 페르 거리와 페론 거리 사이의 이노상 묘지 위, 이제는 식료품 시장이 들어선 자리에서 생선 장사를 하던 그르누이의 어머니를 찾아야 한다. 네 번의 영아 살해 유기 후 다섯 번째 아이 그르누이를 생선 좌판 뒤에서 출산하고 오물 속에 방치한 그 시간 속으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는 1991년 12월 25일 열린책들에서 초판 1쇄가 발행된 이후 2019년 11월 20일까지 총 100쇄가 인쇄되었다. 전세계적으로는 2천만 부 이상이 판매된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의 책이다. 헤세와 릴케, 카프카 이후 독일이 배출한 가장 역량있는 작가일텐데 여태껏 나는 이탈리아 작가인줄로만 알았지 뭔가. 18세기, 향수라는 독특한 소재, 육신은 있으나 체취는 없는 비인간성과 폭력과 살육의 동물성이 혼합된 천재적인 연쇄살인마, 평범한 독자의 머리로는 상상하기 힘든 향기의 세계를 건설하고 군림하는 제왕 그르누이가 만들어내는 환성성에서 도무지 독일을 떠올리지 못한 탓이라고 변명해도 괜찮을까?

독자들의 "다시 읽고 싶은 책", "소장하고 싶은 책"의 욕구에 발맞춰 올초 리뉴얼 시리즈가 출간됐는데 녹색천을 씌운 표지가 보다시피 청량한 양장본이다. 재독을 부르는 리뉴얼 판의 물성에 반하고 다시 봐도 믿기지 않는 작가의 상상력에 거듭 감탄한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내 머리속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편집된 소설의 내용이었다. 결말마저도 내 기억과는 완전히 달랐는데 책을 엉망으로 읽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고 책이 내게 와서 다른 마침표를 찍었다고 이해하고 싶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향수를 읽을 때만큼 실감한 적이 없는데 이 경우로 보면 우리는 같은 책을 두 번 읽을 수 없다로 써야 맞으려나? 십 년도 더 전에 읽은 향수와 코 앞의 향수가 같은 책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고독에 대한 그르누이의 갈망과 어떤 인간의 체취도 느껴지지 않는 산 정상에서 그가 쏟아내던 환호를 나는 몰랐다. 그가 얼어죽으리라 가만히 눈 감던 순간조차 말이다. 읽은 책도 새롭다. 아니, 읽은 책이라 더욱 새롭다. 그 옛날 향수를 읽었던 독자들이 아는 재미라 속단하지 말고 소장 책에 만족하지도 말고 새로운 판형, 새로운 편집, 새로운 기억으로 꼭 한번 향수를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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