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원은 전쟁
장강명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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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좋은 게 다 한정돼 있잖아. 어차피 그 좋은 걸 모든 사람이 다 누리진 못해. 그런데 한번 가져보라고, 시도는 해보라고 기회를 주는 게 자본주의야. 세상이 사람들한테 다 덤벼봐, 그러는 거야. 얼마나 좋아. 이기면 되잖아. 그 기회를 두 번, 세 번도 줘. 진다고 바로 뒈지는 것도 아니잖아. 세상에 이런 체제가 어디 있나? 사회가 끝없이 싸울 기회를 주겠다는데 난 싸우는 게 싫소. 그러니까 우리 다 같이 싸우지 맙시다. 이게 말이 돼? 끝없이 싸울 기회라는 건 끝없이 이길 기회라는 말인데 말이야. 왜 안 싸워?"

우리의 소원은 전쟁, 최태룡의 자본주의에 대한 숭배가 드러나는 대목, p202-203, 예담


남북한 통일과도정부 시대가 도래했다.
김씨 왕조도 무너지고, 조선인민군도 해체됐다. 한국군 희망부대와 UN 평화유지군이 북한에 주둔하고, 남한의 거대 자본이 물밑듯이 북한으로 밀려 들어가지만 세상은 더욱 더 무법천지가 되었다. 돈이 들어와 움트는 자리부터 야금야금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하는 새세상은 그러나 우스울 정도로 광복 후 한반도 막장 역사의 재상영일 뿐. 이 땅엔 희망도 미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지옥 속에 사람이 산다. 사람들이 있다.


"우린 다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에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어. 그동안은 막연히 그래도 참고 살아야 한다,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명화야, 나는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구나. 이대로는 억이 막혀 살 수가 없어. 나는 내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꼭 진상을 알고 싶어. 그리고 내 아들을 죽인 자들에게 벌을 주고 싶어. "

우리의 소원은 전쟁, 최태룡에 아들을 잃은 어머니 박우희, p348, 예담


장풍이라는 거대한 무대 속. 조폭 우두머리라는 본신 위로 허울 좋은 건설사 사장이라는 거죽을 두른 최태룡은 남한과 연결된 마약 루트와 관련한 '눈호랑이 작전'으로 천민 자본주의 속 승리를 꿈꾼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조약돌 같은 장애물들이 있다. 바로 장풍버거의 하층민들. 신천복수대 출신의 들개 같은 남자 장리철과 죽은 아들의 시체라도 찾고자 하는 강인한 조선 여성의 상징 같은 박우희, 살아 있는 양심과 거친 현실 사이에서 무수히 갈등하는 은명화가 권력과 자본을 등에 업은 태림건설 사장 최태룡에게 복수를 감행하려 하는 것이다. 살인, 강간, 방화가 숨 쉬듯 쉬운 남자 최태룡과 대적해 장풍버거 사람들의 복수가 장풍처럼 시원하게 내쏘아질 수 있을까. 장풍의 조약돌들이 지뢰가 되어 최태룡이 엎은 권력의 발목과 허벅지와 짐승 같은 몸뚱이를 터트릴 수 있을 것인가. 험난한 약육강식, 응답하라 1948 속 같은 세상에서 "다만 그들에게 벌을 주고 싶을 따름(p444)" 이었던 힘없는 사람들이 억을 풀어 가는 삼일밤, 삼일낮을 베어놓은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졌다.

그리고 이 사흘의 이야기를 나 또한 사흘 밤 꼬박 읽어내렸지만 하룻밤에 한 부씩, 오로지 그만큼 밖엔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페이지 한 장 한 장에 기가 쏙 빨리는 느낌이라 고작 삼일을 이렇게나 긴 호흡으로 풀어낸 작가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책을 덮고도 잠자리가 뒤숭숭했다. 대한민국의 미래 현실을 퍼담은 소설에 머리가 지끈지끈, 두통이 일었다. 안읽으면 그만인데 다음 장의 궁금함을 참을 수 없으니 진퇴양난, 이런 난감함이 또 있을까. 너무너무 재미있는데 너무너무 불편한 이 마음 또한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잭 리처 같이 홀홀단신으로 악당들의 무리를 파괴하는 장리철의 잔인한 무력은 분명 통쾌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동무?" (p434) 라는 말을 내뱉으며 자기 안으로만 침잠해 있던 고독한 군인 장리철이 세상 밖의 가치에 눈을 뜰 때는 감동이 흘렀다. 세상에 다시 없을 악몽으로 두 번이나 군대에 끌려 간 게임 개발자 강민준과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는 꼿꼿한 여성 롱 대위의 커플미가 유머러스해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들이 장리철이 던져놓은 자동차키와 휴대폰과 총과 탄피를 찾아 수쳇구멍과도 같이 더러운 강둑을 헤매고, 김치를 먹는 남북한 공통 민족 식이에 대한 깨달음 앞에 내뱉는 투털거림에는 깔깔 웃으며 즐거워도 했다. 아들과 남편을 잃은 박우희와 문금옥의 눈물에는 비통했고, 현실 지향적이고 용감한 은명화와 연약한 지식인의 상징 같은 은명화의 아버지의 갈등 앞에선 나라고 다를까 반성과 함께 자괴가 몰려왔다. 마약 카르텔의 제왕을 꿈꾸는 최태룡과 그의 잔당들을 보면 분노가 일었고, 그들의 '눈호랑이 작전'은 통일 전 북한에서도 있을 법한 일이 아닌가 두려움이 생겼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일어나는 모든 감정들이 작가가 펼쳐놓는 배경 앞에선 한없이 숙연해지고 말았다. 리얼리티 넘치는 권력의 횡포가 지나치게 현실 같아 우울과 서글픔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에도 잘 갈무리 되지가 않는다. 높은 가독성에 현실 비판, 더불어 오락 같은 재미를 놓치지 않은 소설이지만 마음과 머리가 후벼파이는 듯한 통증 또한 각오해야만 읽을 수 있는 소설 같다.

책을 다 읽고도 한참을 먹먹해서, 작가가 보여주는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허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롯이 허구로만 끝났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오직 한 가지, 장리철 앞에 벌어졌던 전세를 한순간에 뒤집을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그런 일(p480)만큼은 한번쯤 이루어지기를 바래본다.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초월자가 심심풀이로 잔인한 농담(p480) 같은 번개를 권력의 어디쯤인가에 때려부어 주기를. 현실과 소설의 구분이 힘든 지금 대한민국에서 마치 소설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리라 믿어 보고 싶다. 힘든 소설이지만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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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은 과자로 주세요 낭만픽션 5
하타케나카 메구미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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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신입직장인의 이야기라니 어째 소개글부터 웃음이 나는 게 호기심이 무럭무럭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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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6 - 구부의 꿈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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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속에서나마 이토록 카리스마 있고 뜻이 바른 왕들을 만나게 되어 통쾌하고 짜릿하기 그지 없습니다. 우리 현실도 이와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현실만 생각하면 안타깝고 슬퍼 자꾸만 소설속으로 도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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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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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온건한 사이코패스의 이야기.
내가 편의점 인간을 읽고 받은 첫인상이었다.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여동생이 황급히 달래면서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애쓴다.
탁자 위에 케이크를 반으로 자를 때 쓴 작은 칼이 놓여 있는 것을 보면서, 울음을 그치게만 하는 거라면 아주 간단한데, 힘들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여동생은 필사적으로 아기를 부둥켜안고 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케이크 크림이 묻은 입술을 훔쳤다."
                                                                                                            

 편의점 인간, p71, 살림


주인공 후루쿠라 게이코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자, 즉 사이코패스인 여성이다.  시끄러운 싸움을 멈추게 하기 위해 친구의 머리를 삽으로 후려치거나 흥분한 선생님을 진정시킨다는 이유로 스커트와 팬티를 끌어내리는 장면, 타자의 감정에 동조하지 못하는 모습에서야 조금 평범치 못한 아이 내지는 아스퍼거 증후군인가 생각했던 정도였다면 71 페이지의 이 장면을 기점으로 나는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다.  사이코패스. 그녀가 갓난쟁이를 두고 드러내는 무의식적인 폭력성에 소름이 끼쳐 순간 책을 덮었다가 곧장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책장을 넘기면서 생각지 못한 반전에 으스스함을 느꼈다. 처음 책을 펼칠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이 책 <편의점 인간>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일반 루저들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일 것이라 생각했던 탓이었다. 심야식당 같이 24시간 편의점을 들고 나는 손님들의 따뜻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했으므로 주인공 후루쿠라의 이러한 성향은 대단히 충격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이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라는 것을 잊지만 않았어도 착각하지 않았을텐데, 제목이 참으로 평범해서 책도 평범할 줄로만 알았다. 오판이었다.

후루쿠라 게이코는 사이코패스이지만 악인(惡人)은 아니다. 순간 순간 소름이 돋는 이상 생각을 드러내긴 해도 살인 같은 극단적인 범죄 성향을 표출하진 않는다. 온건한 가정과 체계화 된 교육의 일환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녀가 다른 모든 일들 앞에서 흔히 생각했듯이 그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이 아닐까 싶었다. 어찌됐든 그녀는 마치 영혼의 일부가 사라진 듯 어떤 류의 감정들이 날 때부터 잘려져 있었고, 부모님과 선생님의 "고쳐야 한다"는 계속된 주지와 일종의 눈치로 스스로에게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녀가 고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그 결핍에 대해, 그러나 어떤 메꿀 방법을 찾은 것은 그녀의 스무 살,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 다른 세계에 잘못 들어와버린 듯한 감각에 사로잡힌 채(P20) 발견한 편의점 속 세계는 그녀가 여지껏 앵무새 흉내를 내듯 따라했던 평범한 인간들의 모습을 타자에게 들키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 컨베이너 벨트 같은 곳이었다.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자신 앞으로 돌아 오는 나사를 조이는 것 뿐인 "모던 타임즈" 속 공장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 인간성이나 타인에 대한 관심이나 감정은 없다. 거대한 세계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하며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연기해내는 것은 힘들지만 편의점이라는 작은 어항 속에서라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연기할 수 있으므로 그곳은 일종의 안전공간, 패닉 룸이 되는 것이다. 편의점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바코드를 찍고, 매대를 정리하고, 행사 상품을 내걸고, 하다 못해 손님을 접대하는 모든 인사와 응대의 말까지도 지극히 메뉴얼화 되어 있어 그녀 같은 결핍 인간도 순식간에 점원이라는 인간으로 부품화가 가능하다. 함께 하는 직원들, 점장이나 기타 알바생들도 시간 시간 들고 나며 그녀가 18년을 한 매장에서 일하는 동안 끊임없이 바뀌어 그녀의 비인간적 모습을 들킬 염려가 없었고, 그들이 바뀔 때마다 후루쿠라는 그들의 행동을 복사하여 평범한 인간 흉내를 내며 살아올 수 있었다. 찰리 채플린과 같은 류의 사람은 기계화, 부속화 되는 노동자의 삶을 비판하고 개탄하지만 후루쿠라 게이코 같은 사람에게는 오로지 그런 기계화 된 사회에서만 소속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재미있는 한편 슬프고 무서운 동시에 좀 가여웠다. 인간과는 동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가 편의점이라는 공간에 대해 그 자신과 유사한 동족적 동질감, 생물에의 가치를 느낀다는 것이 의아하기도 했고 말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인 탓인지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배타된 타자로서의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마치 어항 앞에서 눈 한 번 깜짝이지 말고 후루쿠라 게이코라는 물고기의 생태를 보고 있으라 명령받은 관람객 같은 기분이랄까. 동시에 무기물인 편의점을 유기체로 간주하여 자신의 손과 발, 고막으로 들어오는 소리와 숨, 몸을 구성하는 수분까지도 그에 맞춰 분화 내지 동화시켜가는 후루쿠라라는 처음 보는 배아세포를 발견한 생물학자가 된 기분이기도 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류의 세포분열을 목격한 학자가 느낄 법한 혼란스러움이 내 마음 곳곳에서 일어났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후루쿠라라는 사이코패스의 내면을 면밀히 알 게 되는 것이 썩 유쾌하진 않은데 도저히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도 없었다. 나는 후루쿠라의 이상 생각에 동요하는 여동생에게만 한 순간 감정이입이 되었을 뿐, 지극히 관조적인 입장에서 책을 읽을 수 밖에 없었고, 그녀의 생각에 소름끼쳐 하면서도 책장은 순식간에 넘어가 두어시간 남짓만에 끝 페이지를 밟아버렸다. 그 흔한 작가의 말이나 옮긴이의 말도 없이 간결한 이 소설은 대단히 희귀하고 평범치 못하여 이백도 못 채우는 페이지의 짦음이 아쉬운 동시에 너무나도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재미있고도 기묘한 소설이다. 그렇게밖엔 표현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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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읽는 남자
안토니오 가리도 지음, 송병선 옮김 / 레드스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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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관의 앨런 부인을 초대하여 케이크를 만든 날, 앤은 케이크에 바닐라 향신료 대신에 감기약을 넣는 실수를 저지른다. 앤은 매우 실망하고 좌절하지만 곧 희망차게 기운을 차리고  마릴라 아주머니에게 얘기하는 것이다.

"전 같은 실수를 두 번씩 저지르지는 않아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실수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어요. 제가 그 끝까지 간다면 전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정말 편해요."

                                                     ( 빨간머리 앤, p240, 시공주니어 )


그리고 여기, 앤의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똑같은 실수를 놀랍도록 반복해가며 실수 총량의 법칙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온 몸으로 증명하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이름은 송자, 직업은 시체 판독가. 현대로 치자면 법의학자이나 직업적 이미지인 냉철, 침착, 신중이라는 단어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도 없는 류의 성마른 남자이다. 송 가의 차남으로 머리가 비상하여 매우 똑똑하고 공부를 잘 하지만 대인관계가 약하다. 또한 소심한 듯 대범하여 어느 순간 활화산 같은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므로 분노조절장애가 의심되기도 하며, 갈급한 성격으로 인해 잔실수가 많고 유혹에 약하다. 특히 여자!  

재수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를 온몸으로 실천하는 남자의 불운 넘치는 이야기는 그의 나이 스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며 그의 가족이 수도인 린안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며 시작된다. 그의 아버지가 도청 회계원이었고 송자 또한 국자학의 학생인 동시에 저명한 펭판관의 조수로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였지만 송나라 시대의 장례 도의 때문인지 수도에 본적(本籍)이 없는 사람의 한계인지 그들은 집과 직업을 모두 내어놓고 송자의 큰 형 루의 집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일종의 검시청 인턴 대학생이었던 송자는 하루아침에 농부로 내몰리게 되고 익숙치 않은 노동과 형인 루의 학대, 부모님의 무관심으로 고통 받던 중 그의 약혼녀 앵두의 아버지 샹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수도에서부터 인연이 있었던 펭판관과 함께 이 시체를 조사한 끝에 그의 형인 루는 살인자로 참형 당할 위기에 처하고, 그의 가족들은 산사태 속에 파묻히며, 송자 자신은 도둑놈이라는 누명을 쓰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병약한 여동생과 함께 도망자 신세가 된다. 어린 여동생을 책임진 남자치고는 대단히 위기감이 없어서 수도로 도망가는 도중 창녀에게 홀려 자신이 올라탄 배를 강탈 당하고, 자신을 속인 창녀를 살리기 위해 동생의 약값으로나 써야 할 5천 전짜리 어음도 갖다 바치며 (이후 돈 때문에 당한 고난을 생각하면 차라리 버렸다고 말하는 게 옳을 지경;;), 결국 창녀로 인해 동생을 죽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해가면서 어찌저찌 수도에 도착하지만 여기서도 그의 불행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장비의 환생인가 그도 아니면 여포의 숨겨둔 자손인 것인가. 마치 이 둘의 성격을 절묘하게 결합한 듯 마음에 조악한 불덩이를 키우는 송자라는 캐릭터는 무통각증(칼로 가슴을 찔러도 고통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감각이 없는 병) 탓인지 불안감이 솟거나 화가 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므로 허구헌날 싸우고 때리고 엊어터지기를 반복한다. 그 와중에 국자학에서 아버지가 수도에서 다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이유도 알게 되고, 유일한 자산인 책도 도둑 맞고, 있는 돈 다 털어 귀뚜라미 노름판에 꼴아박기도 해가면서 사기꾼 점쟁이, 본업은 무덤파기인 슈에게 코가 꿰이는 등 별의 별 고난을 다 당한다. 운 좋게  밍교수의 눈에 들어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관리가 될 수 있는, 우리로 치자면 성균관쯤 되는 밍학원에 들어가게 되지만 거기서도 또 똑같은 실수의 반복, 반복. 매번 어떤 선택을 앞에 두면 <이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하고 생각은 하지만 오로지 생각뿐. 행동은 이미 이전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수천번쯤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고 회환에 빠지지만 이건 뭐  간난신고의 드라마(띠지의 이 말은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ㅠㅠ)는 200 페이지를 넘어가도록 그칠 줄을 모르고 나 같은 독자는 이쯤에서 오기가 치솟는 것이다. 압도적인 역사 추리고 뭐시기고 이 제정신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놈의 코 빠지는 얘기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쉬지 않고 끝까지 두고 보겠다!! 해가면서. 진짜 숨도 코도 안쉬고 몰입했다. 가독성은 어떻게나 좋은지. 원작의 힘인지 송병선 번역가님의 신내린 글발인지 이렇게 정 안가는 캐릭터를 이토록 입체감 있게 표현하다니!! 어릴 적 입은 화상의 여파인지 색(色)에도 약하여 초년에 (어느 새 22세) 세 번이나 여자로 인생 꼴아박을 뻔 한 것을 제외하고도 기타등등 기타등등의 고난이 100 페이지를 더 지속하여 어느 새 300!! 총 페이지가 575인데 벌써 300!! 이쯤되면 놀라움을 넘어 감탄이 나온다고 해야할지 올해 본 중 최악으로 재수가 없는 남자의 멍청함에 살짝 익숙해지려는 찰나, 궁궐에서 자그마치 임금님이 부르신다. 사건이 터졌다. 그것도 연쇄살인사건이다. 이 놈이 궁궐에 가서는 또 어떤 짓을 벌이려나. 안심이 되지 않는다. 그의 선택과 실수에 비해 그가 치뤄야 했던 대가가 언제나 너무 컸으므로 송자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기대를 넘어서 두려움까지 생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초년박복을 재증명하듯 사건은 오리무중, 이제는 송자 주변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데.....

송자의 인생을 구제했으나 남자들의 비역질 그림과 그 밖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밍교수', 연쇄살인범을 잡으라면서도 송자의 조사에 시시콜콜 시비를 걸고 자꾸만 한 여자를 범인으로 지목하며 송자를 내모는 '칸 내상', 신의성실하게 송자를 보필하는 듯 하지만 어쩐지 꿍꿍이속이 있을 것 같은 '보', 밍 학원에서부터 시작된 악연의 룸메이트 '회유', 초선의 환생 같은 유혹의 꽃 '후디에', 송자 가족의 은인이자 송자 인생의 가장 큰 스승 '펭판관'.

문이 하나 열리면 다른 문이 닫히는(p407) 악전고투 속에서 송자는 연쇄살인범을 잡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송자 자신이 거쳤던 모두 고난 속에 파묻혀 있던 진실을 파헤쳐 가족에 대한 믿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파격적이고 흥미로운 소설로, 안토니오 가리도라는 스페인 공대 교수가 바라본 폭력적인 송시대의 일변과 "호랑이나 개 혹은 용 (P328)"을 범인으로 모는 비과학적 세계 속에서 법의학의 정신과 방법을 스스로 정립해 나가며 범인을 파헤치는 송자의 인간 승리와도 같은 결말을 꼭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앗, 참고로 이 책은 송나라 시대 세원집록의 저자 송자의 인생을 재구성한 픽션이다. 어느 정도의 픽션이냐면 <시체 읽는 남자>의 소설 시작 부분에서 돌아가신 송자의 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관직에 나가지 못한 남자로 자신의 아들인 송자가 관직에 오르기를 마음 깊이 염원하는 인물로 표현된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영종 황제의 혜택으로 본인도 과거에 급제하고 송자도 진시에 급제, 그 이후 돌아가신 것으로 나오니 그냥 처음 시작부터 옴팡 지어낸 이야기였다. 인물의 이름과 직업과 시대만 따온 완전한 픽션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은 게 실제 남아 있는 그의 인생에 대한 기록도 30 문단 밖에는 안된다고 하니까 전기적 관점은 아니라는거지. 법의학자가 어떻게 이런 성격일 수 있지 라는 의구심은 그냥 묻어둬도 좋을 것 같다. 어쩐지 안심이 되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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