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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읽는 남자
안토니오 가리도 지음, 송병선 옮김 / 레드스톤 / 2016년 11월
평점 :
목사관의 앨런 부인을 초대하여 케이크를 만든 날, 앤은 케이크에 바닐라 향신료 대신에 감기약을 넣는 실수를 저지른다. 앤은 매우 실망하고 좌절하지만 곧 희망차게 기운을 차리고 마릴라 아주머니에게 얘기하는 것이다.
"전 같은 실수를 두 번씩 저지르지는 않아요.....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실수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어요. 제가 그 끝까지 간다면 전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정말 편해요."
( 빨간머리 앤, p240, 시공주니어 )
그리고 여기, 앤의 믿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똑같은 실수를 놀랍도록 반복해가며 실수 총량의 법칙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온 몸으로 증명하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이름은 송자, 직업은 시체 판독가. 현대로 치자면 법의학자이나 직업적 이미지인 냉철, 침착, 신중이라는 단어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도 없는 류의 성마른 남자이다. 송 가의 차남으로 머리가 비상하여 매우 똑똑하고 공부를 잘 하지만 대인관계가 약하다. 또한 소심한 듯 대범하여 어느 순간 활화산 같은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므로 분노조절장애가 의심되기도 하며, 갈급한 성격으로 인해 잔실수가 많고 유혹에 약하다. 특히 여자!
재수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를 온몸으로 실천하는 남자의 불운 넘치는 이야기는 그의 나이 스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며 그의 가족이 수도인 린안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며 시작된다. 그의 아버지가 도청 회계원이었고 송자 또한 국자학의 학생인 동시에 저명한 펭판관의 조수로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였지만 송나라 시대의 장례 도의 때문인지 수도에 본적(本籍)이 없는 사람의 한계인지 그들은 집과 직업을 모두 내어놓고 송자의 큰 형 루의 집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일종의 검시청 인턴 대학생이었던 송자는 하루아침에 농부로 내몰리게 되고 익숙치 않은 노동과 형인 루의 학대, 부모님의 무관심으로 고통 받던 중 그의 약혼녀 앵두의 아버지 샹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수도에서부터 인연이 있었던 펭판관과 함께 이 시체를 조사한 끝에 그의 형인 루는 살인자로 참형 당할 위기에 처하고, 그의 가족들은 산사태 속에 파묻히며, 송자 자신은 도둑놈이라는 누명을 쓰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병약한 여동생과 함께 도망자 신세가 된다. 어린 여동생을 책임진 남자치고는 대단히 위기감이 없어서 수도로 도망가는 도중 창녀에게 홀려 자신이 올라탄 배를 강탈 당하고, 자신을 속인 창녀를 살리기 위해 동생의 약값으로나 써야 할 5천 전짜리 어음도 갖다 바치며 (이후 돈 때문에 당한 고난을 생각하면 차라리 버렸다고 말하는 게 옳을 지경;;), 결국 창녀로 인해 동생을 죽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해가면서 어찌저찌 수도에 도착하지만 여기서도 그의 불행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장비의 환생인가 그도 아니면 여포의 숨겨둔 자손인 것인가. 마치 이 둘의 성격을 절묘하게 결합한 듯 마음에 조악한 불덩이를 키우는 송자라는 캐릭터는 무통각증(칼로 가슴을 찔러도 고통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감각이 없는 병) 탓인지 불안감이 솟거나 화가 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므로 허구헌날 싸우고 때리고 엊어터지기를 반복한다. 그 와중에 국자학에서 아버지가 수도에서 다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이유도 알게 되고, 유일한 자산인 책도 도둑 맞고, 있는 돈 다 털어 귀뚜라미 노름판에 꼴아박기도 해가면서 사기꾼 점쟁이, 본업은 무덤파기인 슈에게 코가 꿰이는 등 별의 별 고난을 다 당한다. 운 좋게 밍교수의 눈에 들어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관리가 될 수 있는, 우리로 치자면 성균관쯤 되는 밍학원에 들어가게 되지만 거기서도 또 똑같은 실수의 반복, 반복. 매번 어떤 선택을 앞에 두면 <이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하고 생각은 하지만 오로지 생각뿐. 행동은 이미 이전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수천번쯤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하고 회환에 빠지지만 이건 뭐 간난신고의 드라마(띠지의 이 말은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ㅠㅠ)는 200 페이지를 넘어가도록 그칠 줄을 모르고 나 같은 독자는 이쯤에서 오기가 치솟는 것이다. 압도적인 역사 추리고 뭐시기고 이 제정신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놈의 코 빠지는 얘기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쉬지 않고 끝까지 두고 보겠다!! 해가면서. 진짜 숨도 코도 안쉬고 몰입했다. 가독성은 어떻게나 좋은지. 원작의 힘인지 송병선 번역가님의 신내린 글발인지 이렇게 정 안가는 캐릭터를 이토록 입체감 있게 표현하다니!! 어릴 적 입은 화상의 여파인지 색(色)에도 약하여 초년에 (어느 새 22세) 세 번이나 여자로 인생 꼴아박을 뻔 한 것을 제외하고도 기타등등 기타등등의 고난이 100 페이지를 더 지속하여 어느 새 300!! 총 페이지가 575인데 벌써 300!! 이쯤되면 놀라움을 넘어 감탄이 나온다고 해야할지 올해 본 중 최악으로 재수가 없는 남자의 멍청함에 살짝 익숙해지려는 찰나, 궁궐에서 자그마치 임금님이 부르신다. 사건이 터졌다. 그것도 연쇄살인사건이다. 이 놈이 궁궐에 가서는 또 어떤 짓을 벌이려나. 안심이 되지 않는다. 그의 선택과 실수에 비해 그가 치뤄야 했던 대가가 언제나 너무 컸으므로 송자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기대를 넘어서 두려움까지 생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초년박복을 재증명하듯 사건은 오리무중, 이제는 송자 주변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데.....
송자의 인생을 구제했으나 남자들의 비역질 그림과 그 밖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밍교수', 연쇄살인범을 잡으라면서도 송자의 조사에 시시콜콜 시비를 걸고 자꾸만 한 여자를 범인으로 지목하며 송자를 내모는 '칸 내상', 신의성실하게 송자를 보필하는 듯 하지만 어쩐지 꿍꿍이속이 있을 것 같은 '보', 밍 학원에서부터 시작된 악연의 룸메이트 '회유', 초선의 환생 같은 유혹의 꽃 '후디에', 송자 가족의 은인이자 송자 인생의 가장 큰 스승 '펭판관'.
문이 하나 열리면 다른 문이 닫히는(p407) 악전고투 속에서 송자는 연쇄살인범을 잡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송자 자신이 거쳤던 모두 고난 속에 파묻혀 있던 진실을 파헤쳐 가족에 대한 믿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파격적이고 흥미로운 소설로, 안토니오 가리도라는 스페인 공대 교수가 바라본 폭력적인 송시대의 일변과 "호랑이나 개 혹은 용 (P328)"을 범인으로 모는 비과학적 세계 속에서 법의학의 정신과 방법을 스스로 정립해 나가며 범인을 파헤치는 송자의 인간 승리와도 같은 결말을 꼭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앗, 참고로 이 책은 송나라 시대 세원집록의 저자 송자의 인생을 재구성한 픽션이다. 어느 정도의 픽션이냐면 <시체 읽는 남자>의 소설 시작 부분에서 돌아가신 송자의 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관직에 나가지 못한 남자로 자신의 아들인 송자가 관직에 오르기를 마음 깊이 염원하는 인물로 표현된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영종 황제의 혜택으로 본인도 과거에 급제하고 송자도 진시에 급제, 그 이후 돌아가신 것으로 나오니 그냥 처음 시작부터 옴팡 지어낸 이야기였다. 인물의 이름과 직업과 시대만 따온 완전한 픽션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은 게 실제 남아 있는 그의 인생에 대한 기록도 30 문단 밖에는 안된다고 하니까 전기적 관점은 아니라는거지. 법의학자가 어떻게 이런 성격일 수 있지 라는 의구심은 그냥 묻어둬도 좋을 것 같다. 어쩐지 안심이 되네.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