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돌이 푸 이야기 전집 - 디즈니 애니메이션 원작 동화
앨런 알렉산더 밀른 지음, 어니스트 하워드 쉐퍼드 그림,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정말로 가고 싶은 곳이에요.
보고 싶은 친구들이 있잖아요.
엄마, 아빠. 늦잠 자는 일요일 아침.
재미있는 만화 잔치 난 좋아.
항상 착하게 살고 예쁜 얼굴을 만나는 아름답게 살아가는 어린이 친구들. 짠짠짠짠.
우리의 신나는, 우리의 즐거운 만!!!!

곰돌이 푸 이야기 전집을 읽으며 끝도 없이 흥얼흥얼 하게 되는 노래가 곰돌이 푸를 방영해줬던 KBS 디즈니 만화동산의 주제가가 아니라 SBS 만화잔치라는 게 좀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만화잔치 주제가가 푸를 읽는 내 마음을 절묘하게 대변해 줘서 한번 옮겨 써 봤다. 일요일 아침이면 눈을 뜨자마자 비몽사몽한 중에도 티비를 켰었는데 8시면 시작하는 디즈니 만화동산의 다람쥐 특공대나 구피와 친구들, 무엇보다 만화동산의 히어로 곰돌이 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티비 엄금이라는 엄마의 잔소리마저도 쏙 들어간 주말에 동생과 함께 졸린 눈을 부벼가며 세수도 안한 상태로 만화동산과 만화잔치를 연달아 보는 게 얼마나 큰 즐거움이었는지. 토요일인 어제에 이어 일요일인 오늘까지도 찬바람 맞아가며 출근해야 했던 직장인이 되고 보니 그 때 그 시절 연탄불 지피던 지글지글한 방도, 겨울이면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던 엄마의 손도, 이불 속에 푹 파묻혀 감상했던 곰돌이 푸까지도 하나같이 그리워 책장을 넘기며 떠오르는 추억들에 빙긋이 웃다 고드름처럼 삐죽빼죽했던 마음이 한결 따뜻하게 풀어지는 느낌이다.

머리가 솜으로 가득 차 있어 똑똑하진 않지만 시와 노래를 사랑하는 상냥하고 다정한 곰돌이 위니 더 푸. 밖은 콧노래를 부를 것 같은 날씨고, 새들이 노래를 하고, 무엇보다 크리스토퍼 로빈과 피글렛이 있는 행복(p322), 푸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 주는 소소한 감동작고 갸냘픈 몸집에 소심하고 겁이 많지만 아울의 집이 무너졌을 때처럼 꼭 필요한 순간 꼭 필요한만큼은 용감해질 줄 아는 아기 돼지 피글렛을 바라보는 즐거움. 언제나 우울하고 울적하지만 크리스토퍼 로빈이 못으로 박아준 꼬리나 푸와 피글렛이 지어준 작은 집, 터진 풍선, 무엇이든 담아도 되는 꿀단지처럼 작은 것에 만족하고 행복해할 줄 아는 당나귀 이요르에게 느끼는 공감. 잘난척쟁이지만 가족과 친구를 소중히 하고 종종 맞는 말도 하는 토끼 래빗, 그가 이요르에게 해주는 말 "그건 당신 잘못이에요, 이요르. 당신은 우리들 가운데 누구를 만나려고 찾아와 본 적이 없잖아요. 그저 숲 한구석에 쳐박혀서 딴 사람들이 당신을 만나러 찾아오기만 기다렸으니까요. 가끔은 당신이 우리들을 찾아오는 게 어때요?"(p303) 처럼 가슴에 콕 와박히는 말과 함께 드는 반성. 유일하게 화요일을 쓸 줄 아는 소식통이지만 언제나 모든 말을 어렵게만 표현하려고 하는 올빼미 아울과 그러나 그조차도 고돔이 뭔지 분간하지 못하는 5. 래빗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우리는 크리스토퍼 로빈이 아침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되는 이야기들이 주는 유쾌함.  숲속에 갑자기 등장하여 친구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기운 센 꼬마 호랑이 티거와 캥거와 루가 함께 모여 펼쳐지는 모험들. 그리고 무엇보다 크리스토퍼 로빈. 누구보다 나를 감동시킨 크리스토퍼 로빈과의 만남이 있는 작고 귀엽고 근사한 이야기들의 너무나도 짧아 아쉬워지는 향연 속 포근한 동심들. 

전쟁 같은 신고 기한을 보내며 숫자로 머리가 뱅뱅한 요즘, 책은 정말 한 자도 못 읽을 것 같다고 그냥 눕고만 싶다 했었는데 한번 펼쳐 읽기를 시작하니 즐거운 마음이 무럭무럭 솟았다. 피곤해 죽겠는데 이까짓 책이 뭐라고 라는 생각도 다 읽고 나서는 역시 피곤할 수록 책, 책을 읽어야 한다로 바뀌어졌다. 삽화가 많고 글밥이 적어서 부담없기도 했지만 마지막 페이지쯤 가선 감동적이고 아쉽고 슬퍼 코가 시큰시큰 해지다 괜스레 행복해져 조금 울음이 터졌다. 울적함이 가시니 긴장도 풀어지고 여자처자 기분도 한결 나아져서 그럴 듯 하게 더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원작 동화 2권을 한 권에 모두 담아도 너무 짧아 아쉬움이 컸다. 숲 속 동물들의 아기자기한 모험들도 좋았지만 바빠진 크리스토퍼 로빈, 곰돌이 푸에게 더는 말을 걸지 않는 크리스토퍼 로빈이 무엇보다 마음에 와닿았다. 푸를 사랑해서 기꺼이 먹구름으로 위장해 꿀을 훔치려던 계획에도 동조해주고, 길을 잃은 푸를 찾으러 가고, 푸와 함께 집으로 가서 아주아주 오랫동안 푸를 지켜보고, 푸와 함께 우산을 타고 피글렛을 구하러 달려가던, 푸를 너무나 너무나 사랑했던 로빈이 푸에게 작별을 고하는 유년의 인사가 슬프고 안타까우면서도 참 예뻤다. 크리스토퍼 로빈의 아버지이자 곰돌이 푸의 작가인 알란 알렉산더 밀른 작가 또한 아마도 비슷한 기분이었으리라. 아빠에게 "와서 내가 목욕하는 거 볼래요?"(p139) 라고 묻던 그 어린 아들의 성장이 그에게도 얼마나 아쉬운 일이었겠냐만은 누구나가 언제까지고 아이일 수만은 없는 일이니까. 그래도 어른이 된 로빈이 내가 그랬듯 겨울 어느 한 가운데 자신을 오래오래 들여다보던 아빠와 자신의 방 한켠을 차지하고 있던 푸와 피글렛, 이요르, 래빗, 아울과 티커, 캥거와 루, 따뜻했던 유년을 떠올리며 행복해했을 거라 생각하면 그냥 어쩐지 좀 위로가 된다. 내일의 전쟁도 이 위로 속에서 그냥 무디게, 긍정적으로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오늘 밤 이 동화책을 읽기를 참 잘 한 것 같다.


"둘은 함께 떠났어. 하지만 둘이 어디를 가든지, 가는 길에 어떤 일이 생기든지, 숲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법에 걸린 장소에서는 조그만 남자 아이와 곰 친구가 언제나 장난을 치고 있을 거야."

ㅡ  10. 크리스토퍼 로빈과 푸는 마법에 걸린 장소로 가고, 우리는 거기에서 둘과 헤어진다.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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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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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할아버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내가 아직 어려서, 이 세상에 내가 알아서는 안 될 것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때 내 나이가 일고여덟 살쯤이었다.
"하밀 할아버지, 왜 대답을 안 해주세요?"
"넌 아직 어려.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ㅡ자기 앞의 생, p12-13, 문학동네

모모가 하밀 할아버지에게 사랑을 묻는다. 나는 사랑없이 키워진 아이인 걸까요? 엄마도 아빠도 없지만 모모의 곁에 있어 주었던 로자 아줌마. 오로지 사랑만으로 자신을 키우는 줄로만 알았던 로자 아줌마에게 전해지는 우편환과 그 우편환 속의 돈에 모모는 충격을 받는다. 믿고 있던 로자 아줌마에 대한 배신감으로 하밀 할아버지에게 사랑을 묻지만 그 대답을 믿고 싶지 않다. 사람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을까. 나 또한 궁금해진다.

2. 그것이 이 아이의 첫 발작인가요?

나는 내 엄마가 몸으로 벌어먹고 사는 여자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엄마를 만나기만 했더라면 무조건 사랑했을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은다 아메데 씨처럼 좋은 포주가 되어 엄마를 돌봐주었을 것이다. 로자 아줌마와 사는 것에도 꽤 만족하고 있지만, 누군가 더 좋은 사람, 더 가까운 사람을 하나 더 가질 수 있었더라도 마다하지 않았을 텐데. 빌어먹을, 진짜 엄마를 돌보게 되더라도 로자 아줌마를 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은다씨도 돌보고 있는 여자가 여러 명 아닌가. (p47)

"아줌마, 엄마 얘기는 이제 안 할게요. 대신 개 한 마리 키워도 돼요?" (p26)

ㅡ 자기 앞의 생, 문학동네

모모는 자신이 어떻게 태어난 아이인지를 안다. 이곳 벨빌의 아이들은 모두가 비슷한 사연으로 태어나기에 어린 아이들이라고 해서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몸을 파는 여자가 재깍 위생적인 처리를 하지 않았을 때 생기는 비밀스런 사연이라는 것쯤. 그러나 엄마가 때때로 아주 가끔씩이라도 찾아오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뚜쟁이 아빠라도 몸을 파는 엄마라도 상관없는데 찾아오는 것은 매달의 우편환 뿐.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온전히 감정을 쏟을 대상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래서 그는 쉬페르를 훔쳤고, 팔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장식한 우산 친구 아르튀르와 상상 속에서 찾아와 제 얼굴을 핥아주는 암사자를 만들었다. 여기 안전하지 못한 벨빌,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7층 건물 속에서도 위험을 느끼지 않을 친구들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모모의 행동이 유전으로 인한 발작이 아닐까 두려움을 느끼는 로자 아줌마. 모모의 숨겨진 사연들. 모모의 말처럼 마음에 다리가 달려있다면 내 마음을 보내어 이 어린 철학자를 보듬어 안아주고 싶었다. 황소울음을 우는 제 나이조차 제대로 모르는 어린 소년을.


3.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하밀 할아버지, 하밀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

ㅡ자기 앞의 생, p178, 문학동네

세상 모르는 것이 없는 으뜸가는 기억력으로 모모에게 조상의 언어와 코란을 가르친 사람이었지만 그의 시간 또한 도둑 맞고 있다. 점점 더 비어가는 그의 기억들. 할아버지 나를 불러주세요,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 아니에요. 나는 어떤 식으로 불러도 좋으니 부디 당신을 잊지 마세요. 모모는 기도한다. 하밀이 자밀라 처녀를 그 맹세처럼 죽는 순간까지 기억했을지 궁금해진다. 그도 아니면 그의 친구 빅토르 위고나 또는 모모를.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보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아름답다(p178)는 모모의 말이 서글펐다.


4.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ㅡ자기 앞의 생, p72, 문학동네

시간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모모식 표현대로라면 먹고 살기 위해 엉덩이를 팔아 먹고 살았던 그녀는 이제 창녀의 아이들을 키우며 그 양육비를 받아 가난한 삶을 이어가지만 그 삶에도 한계가 왔다. 언제까지고 7층의 건물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모모에게 소리치고 아이들의 엉덩이를 닦아줄 것 같던 그녀였지만 인생은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참담했다. 유태인이지만 히틀러의 사진을 침대 밑에 숨겨 놓고 사는 여자, 지하에 아무도 모르는 은신처를 만드는 여자. 아이들을 혼내키기 전에 제가 먼저 울음을 터트리는 여자, 너무나 힘이 들어 신경안정제로 천국을 찾는 여자. 모모를 사랑해 아이의 시간까지 늦춰버린 장본인. 그러나 마지막 남은 생의 앞에서 제 존엄성을 지키려는 꽃 같은 사람. 로자 아줌마를 위한 모모의 맹세 카이렘 그리고 로자 아줌마가 유태인 둥지에서 평안히 맞게 된 꽃의 날 블루멘타그. 슬프지만 아름다웠다. 잔인하지만 다행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방법 따위 없다면 나 자신의 죽음만큼은 내가 선택할 수 있도록 의학과 법이 우리에게 친절해지길 빌어본다. 내 남은 삶까지 두려워지지 않도록.

5. 사랑해야 한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필요로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몹시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한다.

ㅡ자기 앞의 생, p311, 문학동네

종종 너무 좋은 책을 읽고 나면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해질 때가 있다. 생각의 정리가 힘든 탓도 있지만 좋았던 부분, 마음에 남는 글귀들을 옮겨 쓰려니 리뷰를 쓰기 보다 책 한 권을 고스란히 필사하고 싶다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욕망이 불끈 일어서기 때문이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 꼭 그런 책으로 옮겨 쓰고 싶은 마음을 한 번 읽고 또 한 번 읽는 것으로 대신한다. 주인공 모모와 모모의 친구들,  슬프지만 아름다운, 더욱 아름다우리라 희망하고 싶은 모모의 생을 다시 만나 참 반갑다. 소설가 조경란 선생님의 추천사처럼 "슬픈 결말로도 사람들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p362)", "땅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나 얼음조각을 옮기는 일처럼 소설을 읽는 것이 그렇게 무용한 일만은 아님(p363)"을 사랑 또함 그러함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2017년의 첫 책 자기 앞의 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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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다이어리 1
정수현.김영은 지음 / 곁(beside)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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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이 너무 화가 나거나 어이가 없으면 멍청해지는 것이냐?"

ㅡ 한양 다이어리1, p84, 곁

조선의 왕 이태원. 아들의 뒤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대원군에 치여 기를 못쓰는 15세의 어리숙한 왕이다. 형제처럼 자란 을지로의 손에 끌려 방문하게 된 한성 도읍의 구락부 원에서 요망발칙한 계집 청담을 만난다. 천 것 주제에 왕도 못 알아보고 뭐? 다시 보고 싶지 않을 만큼 매력도 관심도 없어? 성정 고약한 한량 같아? 생각하면 할 수록 괘씸한데 미치겠다. 서책을 볼 때에도 연못가를 지날 때도 무수리 얼굴을 볼 때에도 그 아이의 얼굴과 목소리가 들린다. 혼내주고 싶던 계집애의 "도련님은 꽤나 잘생긴 편에 속하십니다(p141)"라는 말에는 온몸에 피가 돈다. 아무래도 나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왕의 사랑도 시작은 그렇게 멍청하더라.

'내가 이 아이를 만나고, 이 아이와 함께하기 위해 하필 사람의 형상으로 태어난 게 아닐까. 숨을 거두는 그때가 언제일지는 몰라도 그 순간까지 이 아이 하나만 품고 살다 가고 싶다..."

ㅡ한양 다이어리1. p94, 곁

왕의 형제 같은 친우 을지로. 조선 최고의 바람둥이에 희대의 방탕아이지만 그에게도 사연은 있었으니 병조판서의 아들이나 기생의 얼자. 천출이니 권력의 배경을 업고 있어도 사방이 막혀있는 것과 같다. 천지에 없는 을(乙)이라는 성을 쓰고 지로라는 이름을 제 스스로 지어 붙인 것은 모진 풍파가 없는 평온하고 평탄한 길을 살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지만 하룻밤의 인연으로 그의 눈에 여자로 박힌 소녀 청담으로 생에 대한 다른 소망을 품게 된다.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는 대사로 불안감을 고조시키던 그의 나이 또한 낭랑 18세보다 어린 16세. 그래, 사극이잖아. 옛날 사람이랑 우리랑 같게 생각하면 안 돼. 그 시절엔 16세에 애 셋도 가능했을텐데. 몸도 마음도 성숙한 청년이라고 암시하며 읽으니 매력적인 캐릭터로 변모한 인물이었다. 


"어디에 사시는지, 실제 이름이 무엇인지, 그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런데도 자꾸만 그분이 생각납니다."

ㅡ한양 다이어리1, p312-313, 곁

조실부모하고 사고무탁하여... 은탁이냐? 은탁의 전생이냐? 네 도깨비는 누군데? 하고 질문하고 싶어지는 주인공 신청담. 행수 혜화에게 맡겨져 구락부 원의 식구로 성장했다. 자신조차 모르는 비밀이 많을 것만 같은 미스테리한 인물. 손재주도 좋고 총명하고 미인이고 세상 혼자 사는 것 같은 아이이지만 신통방통 밉지 않고 옹골차다. 그러나 조선의 실세 대원군과 사랑에 빠진 또다른 여인 자영의 눈과 관심이 쏠리는 순간 음모와 함정, 위험이 그녀의 생을 뒤따르기 시작한다.


"빼앗기는 자는 그를 되찾으러 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요, 새로운 물결이 닥쳐오면, 옛것은 묻히고 마는 것이 또한 천리이니 그 자리는 물론 목숨 또한 부지하기 힘들 것이다."

ㅡ 한양 다이어리 1, p342, 곁


단순히 조선판 퓨전 사극 로맨스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허이,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는 어느 정도 고증을 바탕으로 한 사극이었다. 나 이런 거에 좀 약한데. 해를 품은 달처럼 조선은 조선인데 아예 존재치 않던 왕 이훤 같이 차라리 완전 가상 인물이거나 실존인물이 등장은 하되 주변인물로 나오는 거면 몰라도 퓨전 로맨스에 올인한 조선 말기의 고종이라니!!! 영 감정이입이 힘들 것 같은 주인공 설정에 조금 놀랐다. 애들 이름이 신청담에 이태원에 을지로인데 이걸 누가 가장 황폐한 왕, 참당한 왕 고종과 그 주위 인물을 내세운 본격 궁중 로맨스라 상상할 수 있었겠느냐며 잠시 한탄. 인물소개란을 읽으며 민자영을 보면서도 에이 설마 했지 진짜 민자영이 명성황후 그 민자영이고 고종황제의 휘가 이태원이 되어 이태원 로맨스를 찍고 앉았을 줄이야. 생각지 못한 전개가 계속되자 많이 얼떨떨하고 당혹스럽고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고 초반부는 솔직히 조금 힘들었다. 책의 차례 중 영인 '운명의 시작'을 열면서 '조 대비와 이하응이 극비리에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하응의 둘째 아들 재황을 왕으로 등극시킬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p13)'라는 문구를 봤을 때 눈치챘어야 하는 건데. 어쨌든 장르 자체에 대한 거부감으로 미치겠다 발을 동동 굴리면서 페이지를 자꾸만 넘기다 보니 어라? 생각보단 괜찮은데? 읽기가 점점 나아지는 느낌이 들어 안도했다. 흥선대원군, 어린 고종, 어린 민자영 등을 모두 상상 속 허구의 인물이라 가상하고, 인물들의 15, 16세라는 나이도 까맣게 날려보내고, 가상인물 청담과 을지로를 끼얹으며 줄거리에 집중하니 취향극복을 외치진 못해도 무리없이 읽어내릴 수 있을만큼은 되었던 것 같다. 논스톱을 쓴 작가답게 말장난 같은 유머와 해학도 엿보이고 청담과 이태원, 을지로 세 사람의 애틋한 로맨스와 삼각관계도 어여쁘고 대원군이 펼쳐놓은 음모나 철종과 관련한 역모 세력의 등장으로 긴장감 대박! 말미로 갈수록 조여오는 이야기로 두근두근한 와중에 1권의 끝 페이지는 막을 내렸지만 한층 더 흥미진진할 2권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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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이사카 고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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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것이 좋아!"
모 감독과의 불륜설로 열렬한 관심을 받는가 싶더니 이제는 한김 식은 것 같은 배우가 주연했던 영화의 제목이다. 일도, 사랑도, 연애도, 그것도 뜨거운 것이 좋다던 그녀들이 부담스러워 영화는 보다 말았지만 제목만큼은 강렬하게 남아있던 그 영화를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를 보며 떠올리고 말았다. 연애소설집이라니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가 굉장히 핫한가 보지?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내 대답은 '아아니'다. 딱 잘라 아니!도 아니고 강조해서 아니아니!도 아니고 능청스레 말끝을 늘이며 아아니~. 빙글빙글 약 올리듯 아아니~ 아닌데~ 안뜨거운데~ 그래도 재밌는데~ 하는 느낌? 여느 로맨스와는 다르게 툭툭 던져주는 떡밥들이 그게 뭐 발칙한 것도 아니고 당돌한 것도 아니고 확 타오르거나 화들짝 놀라거나 숨죽이거나 하는 것 하나 없이도 뭐가 참 재밌고 뭐가 참 술술 넘어간다. 부분을 봐도 전체를 봐도 평범한 요소요소의 합일 뿐인데 눈 가는 대로 읽어도 지루함 없이 끝 페이지까지 스르르 넘어가는 재미가 있었고 꼼꼼히 읽으면 분석해 코를 걸만한 요소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라 파헤치는 재미가 또 하나 있는, 주는데로 받아 먹는 나 같은 수동적인 독자나 능동적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적극적인 독자 모두를 만족시켜주는 류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나는 이 책이 덜 뜨거워서 좋았는데 맹랑하지 않아서 개성있는 사람들의 튀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막 좋았다. 뜨뜻미지근해서. 맹물같이 밍숭맹숭한데도 그들과 그녀들과 또 그들의 아이들이 잘 살아 왔고, 잘 살고 있고, 잘 살 것 같아서. 그 인생 마냥 행복하다 할 수 없는 요소를 갖추었다 해도, 다이나믹한 모험이 없어도 그냥저냥 이편저편으로 괜찮은 인생을 유지해 나가는 삶 같아서 16년 지는 해 속에서 읽는 책에 안도감을 느꼈달까. 봐, 마냥 뜨겁지 않아도 좋잖아. 화끈하지 않아도 괜찮잖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만족스러움. 이사카 코타로가 내게 들려주는 세레나데의 본질은 관계를 100도씨까지 끓어올리지 않는 편안함이었다.


   
   

1. 아이네 클라이네

"결국 만남이란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런 게 뭔데?"
"그때는 뭔지 몰라서, 그냥 바람 소리인가 생각했지만, 나중에 깨닫게 되는 거. 아, 그러고 보니 그게 계기였구나, 하고. 이거다, 이게 만남이다, 딱 그 순간에 느끼는 게 아니라, 나중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거."
"작은 밤의 음악처럼?"
"맞아, 그거"

ㅡ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p35, 현대문학

얼굴 예쁘고, 성격도 나랑 맞고, 나이도 적당히 어리고, 그런데도 남자 친구가 없는 여자가 네 앞에 짠, 하고 나타나지(p28) 않아서 연애를 못하고 있다고 폄하 당하는 남자 사토. 친구 가즈마의 인연론엔 성가셔 대꾸도 하기 싫지만 주제도 모른다는 말엔 가슴이 뜨끔뜨끔.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설문지 작성녀 '버즈라이트이어'. 시간이 지나 사토 또한 '그때 거기 있던 사람이 그 사람이라 정말 다행이었다(p30)'며 행운에 감사하게 될까? 봉사 코끼리 만지듯 더듬더듬 상상해 보게 되는 연애담.

2. 라이트헤비

"옛날에 그런 얘기 했던 거 기억나? 복싱 시합 결과에 따라 고백할지 안 할지 정하기로 했다는 사람이 있었다고 했잖아. (...) 오늘 세계 헤비급 챔피언전이 열리는데, 저기.....(...) 그 시합에서 도전자가 이기면 마나부가 자기한테 고백한대."
"네?"

ㅡ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p92-93, 현대문학 

네? 뭐라구요? 자기 인생의 결정권을 왜 타인에게 맞기죠?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남자라며 욕을 한 바가지 퍼붙지는 않아도 그런 남자 얘기를 들으면 정말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내 썸남이 지금 그러고 앉았다. 왠지 싫은데 어느 새 챔피언전의 도전자를 응원하고 있는 미나코. 미나코가 무사히 고백 받아 연애를 할 수 있을까? 나도 그런 남자는 싫지만 그래도 라이트헤비 챔피언쉽의 도전자 윈스턴 오노, 그대를 응원합니다. 하나 정도는 있어도 되잖아요 본격 로맨스.

3. 도쿠멘타

"그까짓 가위 좀 안 치웠다고 집을 나갔다고? 자네 와이프, 정말 예민한가 보군."
"아뇨, 그게 아닙니다. (...) 그런 사소한 일들이 쌓이고 쌓인 거죠. 나쁜 쪽으로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정말 그런 일들이 일상다반사거든요. 매사에 건성이고 대충대충, 물건도 잘 잃어버리고 방심했다가 실수를 저지른 적이 하도 많아서, 집사람도 그런 저에 대한 불만이 쌓였을 겁니다."

ㅡ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p118, 현대문학

통장 정리도 제때 못해서 은행 CD기에서 기장을 하면 압축기장이 되어 내용 확인조차 안되는 남자 후지마. (인터넷뱅킹, 폰뱅킹 일본 친구들 이런 거 모르나요?) 그런 후지마의 아내가 집을 나갔다. 내 잘못을 알고 있는데, 반성도 하고 있는데, 용서도 구하고 싶은데 이전과 같은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만남의 행운과 그런 요행을 따라주지 못하는 현실, 사람과의 거리와 결말의 해피 언해피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되는 숙성된 어른의 로맨스.

4. 룩스라이크

"예전에 사귈 때부터 난 당신이 분명 가슴 큰 여자를 좋아한다고 의심했거든."
"20년의 시공을 지나서 또 그 얘기야?"
"헤어질 때도 어차피 가슴 큰 여자랑 결혼하겠지 했어."

ㅡ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p192, 현대문학

저기, 지금 전부 들리거든요(p192), 아들 가즈토가 창피함으로 아버지 구니히코와 선생님의 대화를 말린다. 사회의 때에 절어 꾀죄죄한 아버지 구니히코. 그런 아버지가 우리 선생님을 만나더니 대학생 사촌형이 된 것만 같은 활기를 띄는데. "저기, 혹시 오랜만에 만났더니 예전처럼 가슴이 뛴다거나, 그러지는 않으시죠?(p191)" 우리 엄마 있거든요, 막장 드라마 안되거든요! 가슴 큰 여자를 넋을 놓고 쳐다봤던 소싯적 구니히코는 어떤 여자와 결혼했을까? 그리고 그 아들 가즈토와 짝궁 미오의 자전거 소동의 결말은?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겪게 되는 '이분이 어느 댁 따님인지 아십니까' 작전이 폐부를 찌르는 흘러간 로맨스와 이제 막 시작되는 이야기.

5. 메이크업

미움받는 놈은 발 뻗고 잔다.
"미움받는 놈이 왕따 당하는 아이를 말하는 걸로 착각했었어."
"거기서 말하는 미움받는 놈은 죄 지은 쪽, 왕따를 하는 쪽이지. 당한 사람은 잊지 못하지만, 왕따 가해자는 아무 생각 없이 당당하게 잘 산다는 뜻 아냐? 나도 예전에 왕따 당했거든."

ㅡ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p196, 현대문학 

이제는 번듯한 화장품 회사의 명실공히 인정 받는 직원이지만 유이에게도 왕따라는 아픈 상처가 있다. 그리고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소싯적 원수 고쿠보 아키. 이제는 내가 갑이고 네가 을인데 유이는 왕따의 상처를 씻을만한 복수를 할 수 있을까. 이게 왜 로맨스인지는 이 얘기만 봐서는 몰라 알쏭달쏭하다. 알고 나면 설렌다, 허를 찌르는 로맨스.  

6. 나흐트무지크

'마음은 무엇으로 움직이는 걸까. 어떻게 단련해야 할까. 슬픔은 날려 버려. 곧 네 차례가 올 거야. 곧 네 차례가 올 거야.'
밤거리에 깔린 공기를 쉼 없이 휘젓던 노랫소리는 "'기준은 사랑이야'라고 말하던 너의 눈동자"란 노랫말을 끝으로 멎었다.

ㅡ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p300, 현대문학

그러고보니 소설 속 가장 중요한 복선을 깔아주는 사이토 아저씨에 대한 얘기를 빼먹었구나. 인물들의 감정과 결정과 현재와 미래를 암시하는 가수 사이토의 노래를 틀어주는 신비로운 사이토 아저씨. 그가 다시 나타났다! 1편부터 5편까지 이야기 속의 모든 주요 인물들이 쏟아져 들어와 벌어지는 가족 드라마의 결말 같은 버라이어티 속에서 꼭 내게 하는 것처럼도 들렸던 가사들. 100엔을 지불하진 않았지만 리뷰로 복채를 대신한다. 감사해요 사이토. 감사해요 이사카 코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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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다름 아닌 스티븐 킹의 신간!! 거기다 본연의 장르로 돌아가 공포를 내보이고 있다니 엄청 기대됩니다. 표지도 근사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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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12-30 2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부터 펼쳐보고 싶게 만드는 책입니다.

캔디캔디 2016-12-30 21:50   좋아요 0 | URL
표지가 오싹오싹하니 더 기대되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