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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1.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할아버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내가 아직 어려서, 이 세상에 내가 알아서는 안 될 것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때 내 나이가 일고여덟 살쯤이었다.
"하밀 할아버지, 왜 대답을 안 해주세요?"
"넌 아직 어려.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ㅡ자기 앞의 생, p12-13, 문학동네
모모가 하밀 할아버지에게 사랑을 묻는다. 나는 사랑없이 키워진 아이인 걸까요? 엄마도 아빠도 없지만 모모의 곁에 있어 주었던 로자 아줌마. 오로지 사랑만으로 자신을 키우는 줄로만 알았던 로자 아줌마에게 전해지는 우편환과 그 우편환 속의 돈에 모모는 충격을 받는다. 믿고 있던 로자 아줌마에 대한 배신감으로 하밀 할아버지에게 사랑을 묻지만 그 대답을 믿고 싶지 않다. 사람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을까. 나 또한 궁금해진다.
2. 그것이 이 아이의 첫 발작인가요?
나는 내 엄마가 몸으로 벌어먹고 사는 여자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엄마를 만나기만 했더라면 무조건 사랑했을 것이다. 내가 존경하는 은다 아메데 씨처럼 좋은 포주가 되어 엄마를 돌봐주었을 것이다. 로자 아줌마와 사는 것에도 꽤 만족하고 있지만, 누군가 더 좋은 사람, 더 가까운 사람을 하나 더 가질 수 있었더라도 마다하지 않았을 텐데. 빌어먹을, 진짜 엄마를 돌보게 되더라도 로자 아줌마를 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은다씨도 돌보고 있는 여자가 여러 명 아닌가. (p47)
"아줌마, 엄마 얘기는 이제 안 할게요. 대신 개 한 마리 키워도 돼요?" (p26)
ㅡ 자기 앞의 생, 문학동네
모모는 자신이 어떻게 태어난 아이인지를 안다. 이곳 벨빌의 아이들은 모두가 비슷한 사연으로 태어나기에 어린 아이들이라고 해서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몸을 파는 여자가 재깍 위생적인 처리를 하지 않았을 때 생기는 비밀스런 사연이라는 것쯤. 그러나 엄마가 때때로 아주 가끔씩이라도 찾아오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뚜쟁이 아빠라도 몸을 파는 엄마라도 상관없는데 찾아오는 것은 매달의 우편환 뿐.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온전히 감정을 쏟을 대상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래서 그는 쉬페르를 훔쳤고, 팔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장식한 우산 친구 아르튀르와 상상 속에서 찾아와 제 얼굴을 핥아주는 암사자를 만들었다. 여기 안전하지 못한 벨빌,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7층 건물 속에서도 위험을 느끼지 않을 친구들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모모의 행동이 유전으로 인한 발작이 아닐까 두려움을 느끼는 로자 아줌마. 모모의 숨겨진 사연들. 모모의 말처럼 마음에 다리가 달려있다면 내 마음을 보내어 이 어린 철학자를 보듬어 안아주고 싶었다. 황소울음을 우는 제 나이조차 제대로 모르는 어린 소년을.
3.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하밀 할아버지, 하밀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
ㅡ자기 앞의 생, p178, 문학동네
세상 모르는 것이 없는 으뜸가는 기억력으로 모모에게 조상의 언어와 코란을 가르친 사람이었지만 그의 시간 또한 도둑 맞고 있다. 점점 더 비어가는 그의 기억들. 할아버지 나를 불러주세요,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 아니에요. 나는 어떤 식으로 불러도 좋으니 부디 당신을 잊지 마세요. 모모는 기도한다. 하밀이 자밀라 처녀를 그 맹세처럼 죽는 순간까지 기억했을지 궁금해진다. 그도 아니면 그의 친구 빅토르 위고나 또는 모모를.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보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아름답다(p178)는 모모의 말이 서글펐다.
4.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ㅡ자기 앞의 생, p72, 문학동네
시간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모모식 표현대로라면 먹고 살기 위해 엉덩이를 팔아 먹고 살았던 그녀는 이제 창녀의 아이들을 키우며 그 양육비를 받아 가난한 삶을 이어가지만 그 삶에도 한계가 왔다. 언제까지고 7층의 건물을 오르락 내리락하며 모모에게 소리치고 아이들의 엉덩이를 닦아줄 것 같던 그녀였지만 인생은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참담했다. 유태인이지만 히틀러의 사진을 침대 밑에 숨겨 놓고 사는 여자, 지하에 아무도 모르는 은신처를 만드는 여자. 아이들을 혼내키기 전에 제가 먼저 울음을 터트리는 여자, 너무나 힘이 들어 신경안정제로 천국을 찾는 여자. 모모를 사랑해 아이의 시간까지 늦춰버린 장본인. 그러나 마지막 남은 생의 앞에서 제 존엄성을 지키려는 꽃 같은 사람. 로자 아줌마를 위한 모모의 맹세 카이렘 그리고 로자 아줌마가 유태인 둥지에서 평안히 맞게 된 꽃의 날 블루멘타그. 슬프지만 아름다웠다. 잔인하지만 다행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방법 따위 없다면 나 자신의 죽음만큼은 내가 선택할 수 있도록 의학과 법이 우리에게 친절해지길 빌어본다. 내 남은 삶까지 두려워지지 않도록.
5. 사랑해야 한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필요로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몹시 걱정했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한다.
ㅡ자기 앞의 생, p311, 문학동네
종종 너무 좋은 책을 읽고 나면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해질 때가 있다. 생각의 정리가 힘든 탓도 있지만 좋았던 부분, 마음에 남는 글귀들을 옮겨 쓰려니 리뷰를 쓰기 보다 책 한 권을 고스란히 필사하고 싶다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욕망이 불끈 일어서기 때문이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 꼭 그런 책으로 옮겨 쓰고 싶은 마음을 한 번 읽고 또 한 번 읽는 것으로 대신한다. 주인공 모모와 모모의 친구들, 슬프지만 아름다운, 더욱 아름다우리라 희망하고 싶은 모모의 생을 다시 만나 참 반갑다. 소설가 조경란 선생님의 추천사처럼 "슬픈 결말로도 사람들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p362)", "땅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나 얼음조각을 옮기는 일처럼 소설을 읽는 것이 그렇게 무용한 일만은 아님(p363)"을 사랑 또함 그러함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2017년의 첫 책 자기 앞의 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