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다이어리 1
정수현.김영은 지음 / 곁(beside)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사람이 너무 화가 나거나 어이가 없으면 멍청해지는 것이냐?"

ㅡ 한양 다이어리1, p84, 곁

조선의 왕 이태원. 아들의 뒤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대원군에 치여 기를 못쓰는 15세의 어리숙한 왕이다. 형제처럼 자란 을지로의 손에 끌려 방문하게 된 한성 도읍의 구락부 원에서 요망발칙한 계집 청담을 만난다. 천 것 주제에 왕도 못 알아보고 뭐? 다시 보고 싶지 않을 만큼 매력도 관심도 없어? 성정 고약한 한량 같아? 생각하면 할 수록 괘씸한데 미치겠다. 서책을 볼 때에도 연못가를 지날 때도 무수리 얼굴을 볼 때에도 그 아이의 얼굴과 목소리가 들린다. 혼내주고 싶던 계집애의 "도련님은 꽤나 잘생긴 편에 속하십니다(p141)"라는 말에는 온몸에 피가 돈다. 아무래도 나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왕의 사랑도 시작은 그렇게 멍청하더라.

'내가 이 아이를 만나고, 이 아이와 함께하기 위해 하필 사람의 형상으로 태어난 게 아닐까. 숨을 거두는 그때가 언제일지는 몰라도 그 순간까지 이 아이 하나만 품고 살다 가고 싶다..."

ㅡ한양 다이어리1. p94, 곁

왕의 형제 같은 친우 을지로. 조선 최고의 바람둥이에 희대의 방탕아이지만 그에게도 사연은 있었으니 병조판서의 아들이나 기생의 얼자. 천출이니 권력의 배경을 업고 있어도 사방이 막혀있는 것과 같다. 천지에 없는 을(乙)이라는 성을 쓰고 지로라는 이름을 제 스스로 지어 붙인 것은 모진 풍파가 없는 평온하고 평탄한 길을 살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지만 하룻밤의 인연으로 그의 눈에 여자로 박힌 소녀 청담으로 생에 대한 다른 소망을 품게 된다. 비극적 결말을 암시하는 대사로 불안감을 고조시키던 그의 나이 또한 낭랑 18세보다 어린 16세. 그래, 사극이잖아. 옛날 사람이랑 우리랑 같게 생각하면 안 돼. 그 시절엔 16세에 애 셋도 가능했을텐데. 몸도 마음도 성숙한 청년이라고 암시하며 읽으니 매력적인 캐릭터로 변모한 인물이었다. 


"어디에 사시는지, 실제 이름이 무엇인지, 그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런데도 자꾸만 그분이 생각납니다."

ㅡ한양 다이어리1, p312-313, 곁

조실부모하고 사고무탁하여... 은탁이냐? 은탁의 전생이냐? 네 도깨비는 누군데? 하고 질문하고 싶어지는 주인공 신청담. 행수 혜화에게 맡겨져 구락부 원의 식구로 성장했다. 자신조차 모르는 비밀이 많을 것만 같은 미스테리한 인물. 손재주도 좋고 총명하고 미인이고 세상 혼자 사는 것 같은 아이이지만 신통방통 밉지 않고 옹골차다. 그러나 조선의 실세 대원군과 사랑에 빠진 또다른 여인 자영의 눈과 관심이 쏠리는 순간 음모와 함정, 위험이 그녀의 생을 뒤따르기 시작한다.


"빼앗기는 자는 그를 되찾으러 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요, 새로운 물결이 닥쳐오면, 옛것은 묻히고 마는 것이 또한 천리이니 그 자리는 물론 목숨 또한 부지하기 힘들 것이다."

ㅡ 한양 다이어리 1, p342, 곁


단순히 조선판 퓨전 사극 로맨스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허이,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는 어느 정도 고증을 바탕으로 한 사극이었다. 나 이런 거에 좀 약한데. 해를 품은 달처럼 조선은 조선인데 아예 존재치 않던 왕 이훤 같이 차라리 완전 가상 인물이거나 실존인물이 등장은 하되 주변인물로 나오는 거면 몰라도 퓨전 로맨스에 올인한 조선 말기의 고종이라니!!! 영 감정이입이 힘들 것 같은 주인공 설정에 조금 놀랐다. 애들 이름이 신청담에 이태원에 을지로인데 이걸 누가 가장 황폐한 왕, 참당한 왕 고종과 그 주위 인물을 내세운 본격 궁중 로맨스라 상상할 수 있었겠느냐며 잠시 한탄. 인물소개란을 읽으며 민자영을 보면서도 에이 설마 했지 진짜 민자영이 명성황후 그 민자영이고 고종황제의 휘가 이태원이 되어 이태원 로맨스를 찍고 앉았을 줄이야. 생각지 못한 전개가 계속되자 많이 얼떨떨하고 당혹스럽고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고 초반부는 솔직히 조금 힘들었다. 책의 차례 중 영인 '운명의 시작'을 열면서 '조 대비와 이하응이 극비리에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하응의 둘째 아들 재황을 왕으로 등극시킬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p13)'라는 문구를 봤을 때 눈치챘어야 하는 건데. 어쨌든 장르 자체에 대한 거부감으로 미치겠다 발을 동동 굴리면서 페이지를 자꾸만 넘기다 보니 어라? 생각보단 괜찮은데? 읽기가 점점 나아지는 느낌이 들어 안도했다. 흥선대원군, 어린 고종, 어린 민자영 등을 모두 상상 속 허구의 인물이라 가상하고, 인물들의 15, 16세라는 나이도 까맣게 날려보내고, 가상인물 청담과 을지로를 끼얹으며 줄거리에 집중하니 취향극복을 외치진 못해도 무리없이 읽어내릴 수 있을만큼은 되었던 것 같다. 논스톱을 쓴 작가답게 말장난 같은 유머와 해학도 엿보이고 청담과 이태원, 을지로 세 사람의 애틋한 로맨스와 삼각관계도 어여쁘고 대원군이 펼쳐놓은 음모나 철종과 관련한 역모 세력의 등장으로 긴장감 대박! 말미로 갈수록 조여오는 이야기로 두근두근한 와중에 1권의 끝 페이지는 막을 내렸지만 한층 더 흥미진진할 2권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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