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션 - 어느 괴짜 과학자의 화성판 어드벤처 생존기
앤디 위어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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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하루동안 마션을 읽었다. 사무실이 텅텅 비어 있었기에 월급 루팡짓을 제대로 했다. 작정하고 책을 들고와 읽기 시작하니 600쪽의 어머어마한 두께에도 퇴근 전까지 거의 마무리가 되었다. 집에 오자마자 씻지도 않고 다시 책을 펴들었다. 정신없이 읽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했다. 유쾌하고 잔잔하고 아름답고 아득했다. 키득키득 웃다가 찔끔찔끔 울다가 마크와 탐사대원들이 재회하는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와, 마션 최고다! 재미있다!! 엄청 재미있다!!! 진짜 끝내준다!!!!

책 면면이 에너지가 넘쳐서 읽는 내내 흥이 났다. 기운 쏙 빠지는 내 일상에 신명을 주었다. 다 읽고 나서 지치는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흥분으로 가득 차 안절부절 못했다. 신이 나서 새벽까지 마크와 화성과 텃밭과 감자와 패스파인더와 핵으로 데운 욕조물과 굴러떨어지는 로버와 분해되는 발사대와 천을 덧댄 채 펄럭펄럭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는 우주선과 븕고 아름다운 화성의 대기와 두 우주인의 손끝이 맞닿는 장면을 상상하느라 잠을 못잤다. 영화를 보지도 않았는데 모든 장면이 영상으로 떠올랐다. 불을 끄고 눈을 감고 자려다 다시 또 큭큭대며 웃고 말았다.  좋은 책이다. 나는 이런 책이 좋다. 그러니까 시작부터 주인공이 "좆됐다"는 그런 얘기 말이다.



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좆됐다. 내 인생 최고의 시간이 될 줄 알았던 한 달이 겨우 엿새 만에 악몽으로 바뀌어버렸다.  ... 공식적인 기록을 위해 밝혀 두자면...... 나는 6화성일째에 죽지 않았다. 다른 대원들은 분명히 내가 6화성일째에 죽은 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 잘못이 아니다. 아마 조만간 나의 국장이 치러질 것이고 위키피디아에서 내 이름을 검색하면 이렇게 나올 것이다. '마크 와트니는 화성에서 사망한 유일한 인간이다'.

                                                                                             ㅡ 마션, p14-15, 알에이치코리아

아레스 3탐사대의 일원으로 괴짜 식물학자이자 기계공학자인 마크 와트니는 홀로 화성에 남겨졌다. 기약없이 사악한 모래폭풍이 일어 위기를 감지한 대원들이 우주선으로 오르는 사이 부러진 안테나가 그의 우주복과 배를 뚫으며 언덕을 굴러 떨어진 탓이다. 모두가 죽었을거라 생각했다. 대장 루이스와 대원들은 마크를 포기한 채 화성 밖 대기로 날아오른다. 마크가 깨어난 건 그 후였다. 지구와의 교신은 끊어졌고, 거주용 막사와 탐사대원들이 먹다 남긴 식량, 다량의 우주복과 로버 2대와 기타 안전장비들과 함께 "나홀로 화성에"를 찍을 일만 남았다. 굶어 죽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나는 열량원을 만들어야 한다. 아레스 4 탐사대가 도착할 때까지 1,387화성일을 버틸 수 있는 칼로리가 필요하다. 아레스 4 탐사대에게 구조되지 못하면 어차피 죽는다. 화성의 하루는 지구의 하루보다 39분이 더 길기 때문에 지구의 일수로 계산하면 1,425일을 버텨야 한다. 그러니까 나의 목표는 1,425일분의 식량을 마련하는 것이다. 

                                                                                            ㅡ 마션, p40, 알에이치코리아

그래서 만든다, 식량. 기계공학자이자 식물학자인 마크는 손기술도 머리도 엄청나게 좋아 복잡한 계산도 척척, 필요한 것도 척척 만들어 흙 포대라기에는 좀 작고 화단 하나 만들만한 분량의 지구흙과 화성흙과 자신의 발효된 똥을 섞어 거주용 막사 내부에 밭을 만든다. 감자밭이다. 우주인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추수감사절용 생감자를 식량상자에 담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소와 산소를 어찌저찌 결합해 물을 만들고 폭발사고를 겪고 허리가 부서져라 땅을 만들고 밭을 갈아 감자 눈을 심은 그는 완벽하게 농사에 성공한다. 흙속 박테리아가 모든 위기 상황에서도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은 까닭이다. 놀랍도록 끈질긴 마크와 박테리아와 감자의 생이 감동적이었다. 화성에, 붉은 흙더미 위의 막사 안쪽으로 파릇하게 돋아있을 화성 유일 인류의 감자밭을 상상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어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미있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방에 똥을 섞어 감자밭 하나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우웩이지만 나의 고난이 아니라 소설 속 타인의 고난에 유쾌함이 더해지니 화성의 감자밭은 드라마 "도깨비" 속 메밀밭만큼이나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고독하지만 유머러스러한 남자 마크의 남은 생존 여정도 순탄치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글 안팎으로 흐르는 부드럽고 따뜻하고 웃음 나는 기운에 읽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순간순간의 사건사고와 긴장들이 있었지만 공학도 남자에게 환상이 생길 법한 스킬들로 뚝딱뚝딱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만들고, 로버를 고쳐 패스파인더를 찾아오는 여정을 떠나고, 다시 돌아와 결국 지구와 교신하고, 그 교신기가 망가지고, 감자밭이 얼어붙고, 모래폭풍을 뚫고 아레나 4호의 발사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용기와 희망, 삶에 대한 낙관, 긍정성을 전달받는 느낌이었다. 그가 행복으로 깡총깡총 뛸 때는 내 마음도 깡총깡총 뛰며 심장이 다 두근거렸을 정도니까. 마크가 좌절하지 않고 살아내는 이야기가 좋았다. 그의 적이 오로지 화성 뿐인 점도 좋았다. 타인의 목숨을 담보잡는 희생이 없어 더더욱 좋았다. "씁니다, 우주일지"의 맥 매커천이 "아무리 힘이 들고 배고플지라도 유머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처럼 징징거리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타인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를 책임지며 쾌할하게 상황을 인내하고 받아들이는 그 모든 장면들이 인상 깊었다. 생에 대한 낙관성과 긍정, 유머는 어쩌면 모든 우주 주인공들의 덕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글쎄, 다른 우주인들을 더 만나보면 확실해지겠지.

작년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으며 SF의 재미를 깨달았다. 막연히 어려울거라 생각했고 문과생인 나는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과학, 우주, 시간여행(도 SF가 맞나?)이라는 소재들 속 반짝반짝 빛나는 이야기들에 매료되어 더는 SF가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있단들 이제는 그게 큰 문제 같지도 않다. 여타 소설이라고 다 이해하고 읽었던 것도 아니고 재미있으면 됐지 무얼 이라는 생각에 이전이라면 쳐다도 보지 않을 찬호께이의 "S.T.E.P"이나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 배우작가 신동욱씨의 "씁니다, 우주일지" 그리고 어제는 또 "마션"을 읽게 됐다. 마션을 다 읽고나선 르귄의 "바람의 열두 방향"을 주문했고, 그 사이 옥타비아 버틀러와 데이비드 웨버의 작품들을 추천받았으며, 오늘은 아서 클라크의 스페이스 오디세이 완전판을 인터파크 통신사 할인으로 구매할지 알라딘 굿즈랑 구매할지 행복한 고민 중이다.

재미만 있으면 장르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모험심이 부족한 편이지만 장르로 취향을 가르며 선을 딱 자르는 짓은 정말이지 그만두어야겠다. 에세이에도 재미를 느낄 날이 올 것을 기대하며 앤이 위어의 "마션", 위기에 강한 남자 마크의 화성 생존기를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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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가는 문 -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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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문학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하고 인간 존재에 대해 엄격하고 비판적인 문학과는 달리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살아도 된다"라는 응원을 아이들에게 보내려는 마음이 어린이문학이 생겨난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절망을 말하지 마라" 하는 뜻입니다. ... 평소에 니힐리즘이나 데카당스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라도, 눈앞에서 아이의 존재를 본다면 "이 아이들이 태어난 걸 쓸데없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하는 마음이 강하게 작동하는 것입니다.

ㅡ 책으로 가는 문, p155, 현암사


타인의 서재를 들여다보는 것이 좋다. 좋아하는 작품을 추천받는 것도, 알고 보니 그 작품을 나 또한 좋아하고 있을 때에 갖게 되는 공감대도 모두모두 좋다. 추억을 골라내듯 선별해 들려주는 동화책을 만나는 일은 그 중에서도 최고다. 에세이집을 좋아하지 않는 나조차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매력이 있다. 이 책 <책으로 가는 문>도 그랬다.

미래 소년 코난, 빨강머리 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 마녀 배달부 키키, 붉은 돼지, 원령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귀를 귀울이면, 벼랑 위의 포뇨까지. 당장 더 생각나는 작품은 없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무수한 작품들을 나열해 놓고서 내가 본 작품을 찾으려 하면 아마 대여섯가지쯤은 더 늘어날 것 같다. 책을 읽고 알게 된 거지만 알프스의 하이디도 그가 참여한 작품 중의 하나였으니. 그 정도로 많은 작품들을 만들었고 사랑받았고 또 앞으로도 사랑받을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추천한 동화책들이 있다니, 정확히는 이와나미 소년문고였지만,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상상력, 휴머니즘, 자연에의 회귀, 반전의 메시지가 주는 잔잔한 감동의 근원(바람이 분다, 일본제국주의 미화의 논란으로 이 메시지는 약해져버렸지만)을 조금 더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두근두근, 펼쳐든 책 속 첫 페이지의 문구 "어린이문학이란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 하고 아이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라는 문장에서부터 가슴이 뛰었다. 그가 말하는 그 이유로 어린이문학을, 정확히는 추억속의 내 동화책들을 자꾸만자꾸만 건져올리고 싶어지는걸까. 어쩐지 이 문구 하나로도 위로 받는 기분이 되었다.


1부. 이와나미 소년문고 50권

손바닥만한 추천사와 그가 어릴 적 읽었던 표지 그대로, 구하지 못한 책은 재발간 표지로 이와나미 소년문고 50권을 소개하는 글이었다. 재미있는 건 이 중에 그가 읽지 않은 책도 있다는 것. 그의 아내나 지인들이 "이 책은 절대 빼면 안 돼!" 하고 말해 왔기에 그런가 하고 넣은 책도 있다고 한다. 짧고 간결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훅 다가와서 읽었던 책은 다시 읽고 싶어졌고, 몰랐던 책은 새로이 구하고 싶어졌다.


 

"옛날 이야기인데, 힘도 지혜도 없는 소년이 현명하고 힘차게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어린 시절에 이 책에서 얼마나 큰 격려와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형제에게도 친구에게도 비밀로 하고픈 소중한 책이었습니다."  (p19)



 

"처음으로 다 읽었을 때의 기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말로 내뱉으면 소중한 뭔가가 빠져나가버릴 것만 같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었습니다. 한 번은 읽어야 합니다. 어른이 되면 같은 작가의 <인간의 대지>도 읽어보세요." (p18)



 

"애니메이션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원작은 비할 데 없이 멋진 이야기입니다. 학창 시절 저는 이웃에 사는 여자 친구에게 푸우 이야기를 읽어주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가 기뻐하는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좋은 이야기에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힘이 얼마나 많은가, 책을 쓴다는 건 참 좋은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 했습니다." (p36)


 

 

 

 

"어린 시절에 무척이나 좋아했다며 친구가 이 책을 알려주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아 몇 번이나 읽었는데 정말 재미있었다고요. 이미 어엿한 어른이 되었는데도 친구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그리움으로 아련해지는 듯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읽으면서 온전히 친구의 것인 책을 제가 꼭 훔쳐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다 읽긴 했지만 말이죠." (p42)

 



 

"이 사람의 작품은 모두 보물입니다. 서둘러 읽어서는 안 됩니다. 찬찬히 몇 번이나 읽고, 소리 내서 읽고, 그러고 나서 마음에 울리는 거이나 전해오는 것에 귀를 기울이며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며칠 지난 후에 다시 읽고, 몇 년 지나고 나서도 읽고, 잘 알지도 못하는데 왜 눈물이 나는 것일까 생각이 들고, 어떤 때는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이기도 한데, 그 순간 또 쓱 사라져버립니다. 그런 아름다운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p46)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름방학. 반짝이는 호수에 떠 있는 우리 배. 돛으로 바람을 붙들어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습니다. 잔소리하는 어른들도 없습니다. 자유! 이 얼마나 멋진 여름인가요. 저에게도 이런 여름방학이 있었다면..... 손도 안 댄 방학숙제, 새하얀 그림일기장, 악의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날씨 써넣는 칸( 누가 이런 칸을 만들었을까요). 백일홍이 피고 애매미가 울기 시작하면 여름방학도 끝나는데, 지금도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한숨이 나오네요." (p52)


2부. 소중한 책 한 권만 있으면 된다

      


책에는 효과 같은 게 없습니다. '이제야 되돌아보니 효과가 있었구나' 라고 알 뿐입니다. 그때 그 책이 자신에게 이러저러한 의미가 있었음을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것입니다. ... 책을 읽어야 생각이 깊어진다는 말은 생각하지 말기로 합시다. 책을 읽는다고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독서라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보다는 어렸을 때 "역시 이것"이라 할 만큼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한 권을 만나는 일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ㅡ 책으로 가는 문,  p141, 현암사


"역시 이것"이라 할 만한 책 한 권을 꼽아보려 애썼는데 생각나는 책이 너무 많다. 내게 다정하고 따뜻했던 유년기의 책들, 더는 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버리고 나누고 정리한 그 책들이 시간을 돌고 돌아 서른을 넘은 내 품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는 와중 새삼 또 이렇게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즐거웠다. 그리고 감독님의 그림을 보며 결코 다시 오지 않을 여름방학을 상상해 본다. 탈탈탙 돌아가는 선풍기를 켜두고서 (어른인 지금은 에어컨 없이는 견딜 수 없지만 어릴 때는 어쩐 일인지 선풍기 한 대 만으로도 더위가 감당이 되었다) 한 가득 쌓인 명랑소설과 동화책과 만화책의 탑 속에서 대자리 위에 배 깔고 누워, 나가 놀아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넘긴 채 한 장 또 한 장, 한 권 또 한 권 독파하던 그 재미. 아, 그립다. 그리워 한숨난다는 그 말씀이 이해가 간다.

 

 

 

* 구하기는 어렵겠지만 행운을 빈다!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님의 전언에 생각난 김에 김동화 작가님의 핑크공주를 찾아봤다. 이런, 중고매물에 올라온 책이 있긴 한데 세 권에 자그마치 삼십만원이다. 살 수 있는 추억이 남아있다는 건 좋은데 추억이 너무 비싸다. 재판 좀 해주었으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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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숭이들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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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 없는 작가라는 말이 여상하게 나올 정도로 나는 사실 에쿠니 가오리라는 작가를 잘 알지도 못하고 그의 책을 많이 읽지도 못했다. 워낙 유명한 작품들이 많지만 취향 아님이 한 번 못박히니 관심이 가질 않았다. 십여년, 혹은 그 이상만에 다시 접하게 되어 신간 "벌거숭이들"에 대한 기대감이 적다고는 할 수 없었는데 이것 참 기대만큼이었다고 해야 할지 기대이상이었다고 해야 할지 말하기가 애매해져버렸다. 책을 읽는 와중 문득문득 내가 이걸 왜 읽고 있나, 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하나, 좋아하지도 않는 소재의 책을 무슨 변덕으로 샀을까 라는 생각을 분명 하고 있었는데 무의식 중에 문장을 쫓아가다 보니 벌써 끝이야? 하며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고,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새벽 두 시경. 초저녁부터 꼼짝 않고 읽었다는 것에 스스로도 조금 놀라 버렸다. 책을 읽다 어느 순간부터 시간이 붕 떴다 내려온 느낌, 보통 말하는 시간이 순간 삭제된 딱 그 느낌이라 그 정도로 집중할만한 책은 아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되어버렸나 싶어 아리송했다. 독서에 있어 가독성과 완독 자체에 큰 의미를 두는 편이어서 예나 지금이나 흡인력이랄지 집중력을 확 끌어올린다는 평을 듣는 작가의 역량만큼은 정말 나무랄데 없이 최고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이 작품 "벌거숭이들"이 재미없었다고는 절대 말할 수가 없어져버린 상태.
 
문제는 소재에서 느끼게 되는 나 자신의 거북함이 상당했다는 거다. 여지 없는 남녀상열지사의 거품처럼 불거지는 불륜 믹스. 여기가 무슨 불륜 월드도 아닐텐데 방대하다 싶을 정도의 불륜을 지향해서 이야기의 포문을 여는 장례식장 속 장의의 주인공 카즈에와 야마구치의 불륜을 시작으로 중심인물인 모모와 사바사키와 이시왓치의 삼각관계, 카즈에의 딸이자 하야토의 아내이며 모모의 친구인 히비키와 사바사키의 불륜, 모모의 언니인 요우와 사바사키의 상사인 나라하시의 불륜 등 여기도 불륜 저기도 불륜, 모녀가 불륜, 친구도 불륜, 자매도 불륜. 세계 속 모든 커플이 오로지 불륜만을 벌이는 것 같은 연속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거기다 막장이면 좀 막장 같은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너무 산뜻하게 우아를 떤달까. 이 불륜들이 쿨하달지 지저분한 면이 한점도 보이지 않고 주인공들 이로울 데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게 좀 불편한? 공평치 못한? 기분이 들었다. 사건 중심의 전개가 아니라 편편히 흘러가는 인물들의 일상, 감정선, 정확히는 소소하고 낯부끄럽고 공감하고 싶지 않은 류의 비도덕적 연애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 되다 보니 읽고 나서 내가 뭘 읽은건지도 모르겠고,  공감하기 싫은데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끔 작가가 끌어가는 이야기에 내가 의식적으로라도 반감을 가져야겠다 싶게 만들기도 하고, 재미있으면서도 껄끄럽고, 껄끄러우면서도 잘 읽혀 못내 찜찜한 복잡한 심경이었다. 
 
물론 작가가 오롯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불륜에의 성찰만은 아닐 것이라 벌거숭이라는 제목과 여타의 서술로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나로서는 복잡한 불륜 관계가 머릿속에 딱 박혀버려서 그 밖의 요지를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다. 책에서 재미 이외의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는 편임에도 막상 상상할 건덕지도 없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내용으로 나열돼 있는 소설을 읽고 보니 완독의 뿌듯함도 적었고, 책을 다 읽고 나서 느끼는 시원스런 소회도 없다는 게 아쉬웠다. 이런 류의 키치한?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일본 소설을 멀리했던 이유를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달까. '재미는 있지만 싫어, 재미를 느끼고 싶지 않아' 라고 말하면 되려나. 하지만 싫어하는 소재들, 불륜 뿐만이 아니라 백설공주 원작을 읽었을 때 느꼈던 것과 동일한 류의 꺼림칙함을 느끼게 하는 모모와 요우, 어머니 유키의 비정상정적인 관계라던지, 많은 등장 인물들의 애매모호한 감정선, 다양한 화자 등을 두루 갖추었음에도 평소라면 중반도 못가 덮어버릴 종류의 책을 어찌됐든 끝까지 읽게 만드는 작가의 힘만큼은 대단하다고 평하고 싶다. 그 힘에 이끌려 결국 "다들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하려나"(p323) 라는 내 처음의 감상이 책의 끝에선 "사람과 사람 간의 모든 관계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이름이 그렇게 중요한 걸까."(p68)로 바뀌어 모모가 책에서 보여주는 생각에 어느 정도는 공감하게 되었으므로. 별 다섯 개짜리 반짝반짝한 추천책이냐고 묻는다면 대략 난감이지만 아주 가끔은 손 놓고 있던 작가의 작품도 주섬주섬 집어보고 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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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꼬마 거인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36
로알드 달 지음, 퀜틴 블레이크 그림, 지혜연 옮김 / 시공주니어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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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이 환하게 쏟아지는 밤. 세상의 모든 아이와 어른들이 깊은 잠에 빠지고 시커먼 어둠의 존재들이 우글우글 세상 밖으로 쓸려나오는 마법의 시간. 오로지 소피 혼자만이 잠들지 못한 채 창 밖을 들여다보다 그만 무섭게 생긴 거인에게 납치를 당하고 만다. 7미터나 되는 키에 대문짝만한 귀, 주름투성이 얼굴에 이 하나하나가 마치 식빵같이 커다란 이 거인에게 소피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곧 어리숙하고 마음씨 고운 거인과 친구가 되어 개구리 껍질 맛이 나는 킁킁오이도 함께 먹고 보글보글 쏟아져 나오는 방귀 가스에 천장까지 껑충 뛰어오르게 되는 후롭스코틀도 마셔 가며 즐거운 추억을 쌓는다. 다른 거인들은 영국과 터키와 스웨덴과 호주를 돌며 콩알인간들을 잡아먹지만 이름부터가 선량한 꼬마 거인(이하 선꼬거)는 맛없음을 꾹꾹 참아가며 킁킁오이만을 먹는 탓에 키도 작고 덩치도 작아 힘센 거인들에게 무시 당하며 두들겨 맞기 일쑤. 콩알인간을 먹지 않으면 혼내주겠다는 으름장에 온몸이 떨릴만큼 겁도 나지만 두려움을 참아가며 선꼬거는 오늘도 꿈나라로 달려간다. 아주아주 오랜 옛날부터 그에게 있어 행복은 오로지 예쁜 꿈들을 잡아 트럼펫 같은 나팔로 아이들에게 근사한 꿈을 불어 넣어 주는 것 뿐이었기에. 적어도 소피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코끼리를 타고 무화과와 맛있는 과일을 먹는 날만을 고대하던 선꼬거의 귓속으로 들려온 동동동 소피의 심장 소리. 그 소리에 이끌려 그녀를 납치한 선꼬거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신나는 모험들.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해요! 나를 빨리 주머니에 넣고 거인들을 뒤쫓아가서 영국 사람 모두한테 거인들이 오고 있다고 알려 줘요."

ㅡ 내 친구 꼬마 거인, p151, 시공주니어

어른 거인들은 막을 수 없는 존재라고만 생각했던 그에게, 그래서 콩알인간들이 잡아먹히는 걸 보고도 모르는 척 외면만 하고 있었던 선꼬거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소피. 소피의 깜찍한 계획에 동참해 영국 여왕님의 꿈속에 아홉 거인에 대한 악몽을 불어 넣으려는 선꼬거의 작전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영국 여왕님과 그의 군대가 과연 꼬마 거인을 믿고 아홉 거인들을 생포할 수 있을까?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끝 페이지까지 한 달음에 달려가게 되는 로알드 달의 동화책 "내 친구 꼬마 거인"이었다.  


아주 특별한 한밤, "창"이라는 통로를 통해 소피와 선량한 꼬마 거인은 요술 같은 만남을 이루어낸다. 마법의 시간 속 밤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건너다 본 창문 밖 세상에서 상대방의 심장소리를 듣고 서로의 눈을 마주하며 고아 아이 소피와 선량한 꼬마 거인은 친구가 되었고. 영국 여왕의 창으로 밀어넣은 꿈으로 현실의 악몽을 깨트리려 노력한 소피와 선량한 꼬마 거인은 여왕의 창틀 위에서 봄처럼 살랑대는 행복을 맞이한다. 아이들의 방에 꿈을 불어넣기 위해 수 년 동안 수천 개의 창을 열어 왔던 선량한 꼬마 거인의 행동은 그 자체로 힘든 삶에 대한 자기 위안이자 긍정이자 새로운 만남에 대한 노력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며 우울하고 울적하고 기분 나쁜 밤, 한번쯤 집안의 온갖 창을 열어놓으면 어떨가 라는 겁도 없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선량한 꼬마 거인은 만나지 못하더라도 꼬마 거인이 창으로 불어 주는 금빛 꿈 하나는 건지게 될런지도 모른다며, 소녀 같은 상상력에 깡총 웃게 되는 예쁜 동화책 "내 친구 꼬마 거인"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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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사 헤리엇의 개 이야기 수의사 헤리엇의 이야기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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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판 주문해 놓았는데 언제쯤 올까요.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빨리 도착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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