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가는 문 -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린이문학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하고 인간 존재에 대해 엄격하고 비판적인 문학과는 달리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살아도 된다"라는 응원을 아이들에게 보내려는 마음이 어린이문학이 생겨난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절망을 말하지 마라" 하는 뜻입니다. ... 평소에 니힐리즘이나 데카당스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라도, 눈앞에서 아이의 존재를 본다면 "이 아이들이 태어난 걸 쓸데없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하는 마음이 강하게 작동하는 것입니다.

ㅡ 책으로 가는 문, p155, 현암사


타인의 서재를 들여다보는 것이 좋다. 좋아하는 작품을 추천받는 것도, 알고 보니 그 작품을 나 또한 좋아하고 있을 때에 갖게 되는 공감대도 모두모두 좋다. 추억을 골라내듯 선별해 들려주는 동화책을 만나는 일은 그 중에서도 최고다. 에세이집을 좋아하지 않는 나조차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매력이 있다. 이 책 <책으로 가는 문>도 그랬다.

미래 소년 코난, 빨강머리 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 마녀 배달부 키키, 붉은 돼지, 원령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귀를 귀울이면, 벼랑 위의 포뇨까지. 당장 더 생각나는 작품은 없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무수한 작품들을 나열해 놓고서 내가 본 작품을 찾으려 하면 아마 대여섯가지쯤은 더 늘어날 것 같다. 책을 읽고 알게 된 거지만 알프스의 하이디도 그가 참여한 작품 중의 하나였으니. 그 정도로 많은 작품들을 만들었고 사랑받았고 또 앞으로도 사랑받을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추천한 동화책들이 있다니, 정확히는 이와나미 소년문고였지만,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상상력, 휴머니즘, 자연에의 회귀, 반전의 메시지가 주는 잔잔한 감동의 근원(바람이 분다, 일본제국주의 미화의 논란으로 이 메시지는 약해져버렸지만)을 조금 더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두근두근, 펼쳐든 책 속 첫 페이지의 문구 "어린이문학이란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 하고 아이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라는 문장에서부터 가슴이 뛰었다. 그가 말하는 그 이유로 어린이문학을, 정확히는 추억속의 내 동화책들을 자꾸만자꾸만 건져올리고 싶어지는걸까. 어쩐지 이 문구 하나로도 위로 받는 기분이 되었다.


1부. 이와나미 소년문고 50권

손바닥만한 추천사와 그가 어릴 적 읽었던 표지 그대로, 구하지 못한 책은 재발간 표지로 이와나미 소년문고 50권을 소개하는 글이었다. 재미있는 건 이 중에 그가 읽지 않은 책도 있다는 것. 그의 아내나 지인들이 "이 책은 절대 빼면 안 돼!" 하고 말해 왔기에 그런가 하고 넣은 책도 있다고 한다. 짧고 간결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훅 다가와서 읽었던 책은 다시 읽고 싶어졌고, 몰랐던 책은 새로이 구하고 싶어졌다.


 

"옛날 이야기인데, 힘도 지혜도 없는 소년이 현명하고 힘차게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어린 시절에 이 책에서 얼마나 큰 격려와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형제에게도 친구에게도 비밀로 하고픈 소중한 책이었습니다."  (p19)



 

"처음으로 다 읽었을 때의 기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말로 내뱉으면 소중한 뭔가가 빠져나가버릴 것만 같아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었습니다. 한 번은 읽어야 합니다. 어른이 되면 같은 작가의 <인간의 대지>도 읽어보세요." (p18)



 

"애니메이션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원작은 비할 데 없이 멋진 이야기입니다. 학창 시절 저는 이웃에 사는 여자 친구에게 푸우 이야기를 읽어주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가 기뻐하는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좋은 이야기에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힘이 얼마나 많은가, 책을 쓴다는 건 참 좋은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 했습니다." (p36)


 

 

 

 

"어린 시절에 무척이나 좋아했다며 친구가 이 책을 알려주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아 몇 번이나 읽었는데 정말 재미있었다고요. 이미 어엿한 어른이 되었는데도 친구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그리움으로 아련해지는 듯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읽으면서 온전히 친구의 것인 책을 제가 꼭 훔쳐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다 읽긴 했지만 말이죠." (p42)

 



 

"이 사람의 작품은 모두 보물입니다. 서둘러 읽어서는 안 됩니다. 찬찬히 몇 번이나 읽고, 소리 내서 읽고, 그러고 나서 마음에 울리는 거이나 전해오는 것에 귀를 기울이며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며칠 지난 후에 다시 읽고, 몇 년 지나고 나서도 읽고, 잘 알지도 못하는데 왜 눈물이 나는 것일까 생각이 들고, 어떤 때는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이기도 한데, 그 순간 또 쓱 사라져버립니다. 그런 아름다운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p46)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름방학. 반짝이는 호수에 떠 있는 우리 배. 돛으로 바람을 붙들어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습니다. 잔소리하는 어른들도 없습니다. 자유! 이 얼마나 멋진 여름인가요. 저에게도 이런 여름방학이 있었다면..... 손도 안 댄 방학숙제, 새하얀 그림일기장, 악의로밖에 생각되지 않는 날씨 써넣는 칸( 누가 이런 칸을 만들었을까요). 백일홍이 피고 애매미가 울기 시작하면 여름방학도 끝나는데, 지금도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 한숨이 나오네요." (p52)


2부. 소중한 책 한 권만 있으면 된다

      


책에는 효과 같은 게 없습니다. '이제야 되돌아보니 효과가 있었구나' 라고 알 뿐입니다. 그때 그 책이 자신에게 이러저러한 의미가 있었음을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것입니다. ... 책을 읽어야 생각이 깊어진다는 말은 생각하지 말기로 합시다. 책을 읽는다고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독서라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보다는 어렸을 때 "역시 이것"이라 할 만큼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한 권을 만나는 일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ㅡ 책으로 가는 문,  p141, 현암사


"역시 이것"이라 할 만한 책 한 권을 꼽아보려 애썼는데 생각나는 책이 너무 많다. 내게 다정하고 따뜻했던 유년기의 책들, 더는 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버리고 나누고 정리한 그 책들이 시간을 돌고 돌아 서른을 넘은 내 품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는 와중 새삼 또 이렇게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즐거웠다. 그리고 감독님의 그림을 보며 결코 다시 오지 않을 여름방학을 상상해 본다. 탈탈탙 돌아가는 선풍기를 켜두고서 (어른인 지금은 에어컨 없이는 견딜 수 없지만 어릴 때는 어쩐 일인지 선풍기 한 대 만으로도 더위가 감당이 되었다) 한 가득 쌓인 명랑소설과 동화책과 만화책의 탑 속에서 대자리 위에 배 깔고 누워, 나가 놀아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넘긴 채 한 장 또 한 장, 한 권 또 한 권 독파하던 그 재미. 아, 그립다. 그리워 한숨난다는 그 말씀이 이해가 간다.

 

 

 

* 구하기는 어렵겠지만 행운을 빈다!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님의 전언에 생각난 김에 김동화 작가님의 핑크공주를 찾아봤다. 이런, 중고매물에 올라온 책이 있긴 한데 세 권에 자그마치 삼십만원이다. 살 수 있는 추억이 남아있다는 건 좋은데 추억이 너무 비싸다. 재판 좀 해주었으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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