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잠 세트 - 전2권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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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잠. 알라딘이고 반디고 벌써 베스트셀러 5위권 내에 고이 안착해서 아마 책 좀 읽는다는 분들 중엔 이 책 발간 소식을 모르는 분이 없으실 거에요. 제가 읽으니 더욱 인기를 실감하게 되는 베르나르의 신간을 저는 한 십여 년 만에 다시 잡아보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뭐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무관심의 작가였는지라 작가 스타일도, 성향도, 깜깜이에요. 이 책은 안깜깜해야 할 텐데 걱정을 좀 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책 소개문부터 긴가민가 하더라구요.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리뷰 쓰는데 잘못 해석해서 막 엉뚱한 거 적어놓는 거 아니야? 그러면 창피한데. 책 잡고 잠깐 빌빌댔어요. 작가가 워낙에 상상력이 풍부하잖아요. 저는 상상력이 죽어가는 나이구요. 그러나 걱정 마세요. 다행히 막 쫓아가기 어려운 류의 소설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소재가 아주아주 익숙한 "잠"이니까요.

주인공 자크의 어머니 카롤린이 어느 날 실종됩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요. 그녀는 사회에서 인정받는 유명한 수면연구가이지만 또한 의학이라는 목표 앞에 폭력적인 생리학자이기도 했어요. 흔히 알려진 수면의 5단계를 넘어 6단계 미지의 잠 단계가 있을거라 상정을 하곤 생체실험을 하는데요. 실험에 참가한 인도 요기가 결국 심장마비로 죽고 맙니다. 그녀는 실험실의 연구원들을 반 협박하듯 입을 다물라 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어디에나 한명쯤은 양심있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제보가 들어가 언론에서 대서특필을 해버리죠. 고양이로 동물실험을 일삼던 수면연구가 결국 사람까지 죽여! 매스컴에서 좋아할만한 소재잖아요. 그 하루로 카롤린과 그녀의 아들 자크의 인생이 완벽하게 변해버립니다. 카롤린은 병원에서 권고사직을 당한 후 행방이 묘연. 아들 자크는 엄마와의 분리불안으로 평생에 없던 불면증에 시달리다 여자친구 잘못 사귀어서 약쟁이가 되고 익사체로 발견될 뻔! 했지만 그러면 소설이 안되겠지요? 여친과 뒹굴뒹굴 하던 자크의 꿈 속으로 어떤 남자가 찾아옵니다. 내가 네 애비다~ 는 농담이고 네가 네 미래다~ 라고 말하는 자신과 똑닮은 아저씨가 눈가에 주름을 달고 꿈 속에 나타나 짐 싸서 말레이시아로 떠나라! 거기에 우리 엄마가 있다! 엄마를 살려라! 라고 말하죠. 정말로 자크의 미래인지 무의식의 발로인지 알 수 없는 그 형상에 자크는 잠깐 반항하다 결국 말레이시아로 떠납니다. 언젠가 엄마가 말해줬던 꿈의 부족 세노이를 찾으러 가는 여정이었죠.  여기까지가 1권.

카롤린과 세노이족을 찾는 와중에 기면증으로 군대를 나와 프리랜서 기자로 뛰고 있는 프랑키를 만나고, 섬으로 피신한 세노이족을 지키기 위해 섬을 차지하려는 악당들과 전투를 치르고, 세노이족의 현몽현녀와 혼인을 하는 등 2권에서도 다이나믹한 모험이 이어지는데요. 사실 2권 찔끔 지나서부터 그러니까 자크가 세노이족과 함께 공부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시간들이 이어질 적엔 마치 페이지는 끝이 아닌데 내용은 꼭 끝인 것만 같고, 결말은 아닌데 꼭 결말인 것만 같고, 남은 페이지는 이 백 도 더 넘는데 왠지 꼭 그만 읽어도 될 것 같은 이상한 느낌으로 발목이 잡히는데 그 느낌을 떨쳐내고 계속 이어 읽으니 다시 긴장감이 쑥쑥 높아지며 재미나는 구간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꼭 1단계에서 5단계까지 오르락내리락 하는 잠의 모습만 같군요. 그래서 6단계 미지의 잠까진 언제 가는 거야? 어떻게 가는 건데? 이대로 포기하는 건가? 하는 순간에 이십여 년 전에 만났던 그 꿈 속의 자크와 다시 꿈 속에서 재회하게 됩니다. 이제는 60이 넘는 할아버지 자크였죠. 자크와 자크의 만남이 있을 때마다 예측이 안되는 현실 자크의 모험이 시작되므로 남은 페이지도 기대해도 좋습니다. 자크와 카롤린의 미지수의 재회. 카롤린의 몽유병과 과거. 이어꾸기와 수면마비, 유도수면, 자각몽, 역설 수면, 꿈 영화과 같은 수면과 숙면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들이 함께 하는 잠 속으로의 여행이 대단히 재미가 있으니까요. 다만 주인공 자크는 너무너무 무매력입니다. 자크의 아내 현몽현녀나 프랑키, 전여자친구 쥐스틴, 샤를로트 모두 마찬가지로 평면적이고 돌출되지 않은 듯한 느낌이에요. 주인공 포스를 풍기는 건 오로지 엄마 카롤린과 "잠" 밖에 없는 듯. 배경이 인물보다 더 뛰어난 느낌으로 주인공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설정의 재미가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잠에 대한 설명문 같은 해설조차 자크와 자크의 짜증나는 대화보단 흥미로우니까요. 때문에 인물 면면의 매력을 중시하는 독자의 입맛에는 좀 맞지 않을 듯도 싶으나 어쨌든 이야기 자체가 제 구미에는 잘 맞았으므로 저는 일단 추천합니다. 강력은 빼고 그냥 추천!!

덧, 침대 밖은 위험하다 보다 더 가슴에 박히는 명언;;을 이 책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모두 방 안에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것, 이 한 가지에서 비롯된다.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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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히하우젠 남작의 모험
루돌프 에리히 라스페 지음, 염정용 옮김 / 로그아웃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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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히하우젠 남작의 모험이라니 이 책을 그냥 봐선 그저 소설 같은데요. 사실은 실존인물이랍니다. 독일에 뮌히하우젠 남작이라는 입담 좋은 귀족이 살았다네요. 18세기에요. 꽤 점잖은 양반이었던 모양이지만 남자들의 군대 모험담, 사냥 모험담엔 시대를 관통하는 뻥이 섞이기 마련이잖아요. 이 귀족 나으리도 익살이 넘치는 재담꾼으로 허세 좀 부려가며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흥청흥청 늘어놓길 좋아했나봐요. 그것이 어쩌다보니 지역내에서 좋은 평판을 얻어 잡지에도 몇 편 실리고 되고, 명성도 얻고, 처음만 해도 나쁘지 않았던 모양인데 아뿔싸!! 저작권과 사생활 보호는 물로 보던 시대이다 보니 본인도 모르는 새에 그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게 된 것 아니겠어요. 라스페라고 고고학 강의도 하고 고대 문화재 카탈로그도 작성하는 등 뭔가 능력은 있었던 모양이지만 제가 보기엔 영판 사기꾼 같은 횡령꾼한테 걸려서 그의 이름과 이야기를 하루아침에 도둑맞게 된 것이지요. 더 과장되고 더 허풍선이가 되어 등장한 책 속 뮌히하우젠 남작은 그야말로 우스꽝스럽고 괴짜에 어떻게 보면 해괴망측하고 미치광이 같기도 하니 사람들의 호기심을 쏙쏙 자극하게 되는데요.

나의 모험담이 허풍같고 의심스럽다 하더라도 진심임을 의심치 말라는 둥, 진실에 대한 증인으로 걸리버와 신밧드와 알라딘을 세워 시청에 가서 증명서를 받겠다는 둥, 나는! 나는!! 나는!!! 진실하다!!!! 고 얼마나 목청 높여 외치는지 책에 목소리가 있었다면 제 귀가 뻥 터졌을지도 몰라요. 그는 달나라도 두 번이나 여행하구요. 북극에도 다녀와요. 돈키호테도 만나고, 수에즈 운하도 건설하고, 무지개다리도 놓고, 사막과 바다를 건너고, 독수리를 타고 하늘을 오르고, 스핑크스를 농락하고 등등등의 갖은 모험을 겪게 되요. 아참 달나라에선 원주민도 만나는군요. 요즘으로 치면 달나라 외계인인 셈인데 이 외계인들은 한 달에 꼭 한 번 꼴로 밖에 밥을 안먹는다는군요. 밥도 입으로 먹는 게 아니고 옆구리를 열어서 음식을 넣는다나 봐요. 일년에 열두 번 밖에 음식 섭취를 안한다니!! 아, 상상하기 싫어라. 

짤막한 이 이야기들로도 그의 모험담에 얼마나 큰 뻥들이 드글들글할지 상상이 되시지요? 뻥이요~ 뻥이요~ 뻥이 풍악을 울릴 지경인데  문제는 이 책이 발간될 당시 뮌히하우젠 남작이 독일 시골 영지에 버젓히 살아있는 상태였다는 거에요. 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책이 공전의 히트까진 아니어도 이래저래 팔리게 되니 어영부영 뮌히하우젠 남작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고향집이 시끌벅적, 말년에 꽤나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더군요. 점잖은 양반이 허풍쟁이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났을까 싶어 제가 더 속상했습니다. 거기다  이야기들이 막 동심 가득한 예쁨이 묻어나는 것도 아니요.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도 아니요. 재미가 빵빵 터지는 것도 아니요. 오로지 뻥의 뻥에 의한 뻥을 위한 이야기로 순 엉터리 같기만 하거든요. 거지도 오백원! 하는 세상에 인세는 라스페놈이 날로 먹고 본인은 거지 같은 평판만 얻어 먹었으니 어이구야. 물론 그 덕분으로 뮌히하우젠 남작의 이름이 이렇게 오래오래 후대에 전해지게 되었지만 제가 남작이라면 화병으로 드러눕고 말았을 거에요. 내가 버찌씨로 사슴 머리에 총을 쐈더니 뿔 대신 버찌나무가 자랐다더라! 그 사슴을 잡아 고기는 구워먹고 버찌는 따서 소스를 만들어 얌냠쩝쩝했다더라!! 이런 소문이 났다고 생각해 보세요. 암만 뻥이래도 이것은 너무 심했습니다. 너무 심했다구요 라스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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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잘해요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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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모른 척 해야 잊혀지는 법이거든" (p215)


최순덕성령충만기에서 시봉은 어른 남자 손바닥만한 호치키스로 사람 머리를 찍고 다니는 건달패였다. 지하철에서 구걸을 하는 패거리의 짱이기도 했고, 건달패 직원으로 입사하기 위해 피씨방에서 이력서를 쓰는 좀 모자라고 서글픈 군상이었다. 사과는 잘해요에 또다시 등장한 시봉은 화자인 "나"와 함께 시설에 감금된 채 두 명의 복지사들에게 두들겨 맞고 있었다. 길을 가다 봉고차에 강제로 실려 시설에 갇힌 시봉과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제 발로 시설에 들어온 나는 어느 새 가장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둘은 적어도 내가 볼 때엔 비슷한 방향으로 함께 미쳐가고 있었다. 미칠 수 밖에 없는 환경이기도 했고. 시설은 내 심장을 쏴라나 강예원이 주연했던 영화 날 보러 와요 속의 정신병원과 비슷한 곳이었다. 시사고발 프로에도 종종 등장하곤 하는 학대와 폭력, 인간 이하의 굴종이 자행되는 곳. 미치광이 원장과 복지사들로 인해 멀쩡한 사람도 심신상실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지옥. 복지사들에게 맞지 않기 위해 시작됐던 사과가 어느 새 일상이 되어 이제는 사과를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어져버린 시봉과 나. 하이에나처럼 사과할 거리를 찾아다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소름끼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을 매일 같이 배식 받고, 짓지 않은 죄를 고백하며, 원장의 변태짓에 동조하고, 살인과 강간의 자리에 함께 하는 일도 있었다. 너무나 쉽게 평범한 이웃, 평범한 가장들을 미치게 만들었으며, 친구인 서로에게 죄를 짓기도 했다. 굉장히 끔찍한 일들이 여럿 벌어진다. 그것이 순진한 듯, 어리숙한 듯, 정상인 듯, 정상이 아닌 듯한 화자 나의 입을 거치면서 우습고도 기괴하게 변모하지만 화를 삭혀주지는 않는다. 사과해야 할 모든 사람들이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세상 속 무구한 이들의 속죄가 부끄럽다.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었다. 한 권도 완독하지 못한 채 네 권을 고스란히 이고 가려니 억울해서 후딱 읽었다. 두 시간도 안되서 다 읽을 거라는 믿을만한 정보통의 입깁에 고민도 안고 선택한 책, 사과는 잘해요. 이기호 작가에게 연이어 맞은 뒤통수가 얼얼하다. 작가에게 사과받고 싶다. 왜 독자를 착각하게 하셨나이까. 유머와 풍자, 해학이 함께 하는 재미난 책일거라 생각했건만! 안그래도 몸이 땅으로 꺼지는 기분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아주 지하로 땅굴을 파게 된다.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보다는 최순덕성령충만기에 더 가까웠던 책.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책. 웃으려니 찝찝하고 울려고 하니 더 찝찝한 책. 내 스타일은 아닌데 너무 쉽게 읽혀 무안했던 책. 읽고 나면 누구에게라도 사과하고 싶어지는 책. 동시에 절대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않고 입 다물고 있는 누구들이 생각나는 책. 또렷하게 생각나는 죄도 없건만 읽는 것만으로도 죄 지은 듯 가슴이 일렁일렁하는데 죄 짓고도 발 뻗고 자는 놈들의 면상은 오늘도 또 뉴스를 탄다. 모르는 척 잊혀지고 있는 수 많은 죄들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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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이웃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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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정권에 부역했던 많은 이들은 악한이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선한이웃과 악한이웃의 구분이 모호해져 버립니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선한이웃들이 만든 지옥 아니 연옥이라고 믿고 싶은 세상으로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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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이웃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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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임을 출판사의 사전 연재로 알고 시작한 책이었습니다. 그 배경에 대한 얼마간의 지식과 선한이웃이라는 제목으로 책의 줄거리를 지나치게 얕게 추측한 게 실책이었어요. 민주주의를 제창하는 학생들의 뜨겁고 격렬한 항쟁의 시위 속에서 민중항쟁 지도부 대장 최민석을 검거하려는 정부 요원들의 땀내 가득한 씬으로 시작하길래 우리 아버지, 우리 삼촌, 우리 형, 평범해 보이기만 하는 우리네 선한이웃들이 맹목적으로 국가에 충성하며 또는 직업인으로서 최선을 다하며 의도치 않게 자행하는 악을 그릴 거라 생각했거든요. 물론 이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의 본질 자체가 뒤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대항마 최민석의 역할이 좀 뜻밖이었습니다. 그는 소설 속에서 거의 등장하지를 않습니다. 민주투사 최민석으로는요. 그러니 최민석을 앞세운 가슴 뜨겁고 눈물나게 아픈 투쟁의 역사라는 예상은 1부 최민석을 지나 2부 이태주에서 곧장 어그러져버렸지요. 연극 연출가 이태주가 만든 줄리어스 시저니 엘렉트라니 하는 것들로요. 저는 좀 의아했고, 이해가 안되는 소재들로 불안했습니다. 최민석으로 의심받고 있는 태주의 극본들, 드라마틱하고 극적인 연극대사들, 아름다움까지 연기하는 듯한 진아와의 사랑, 최민석을 쫓는 정부요원 기준의 질투와 시기심, 열등감 등의 요소들이 주는 재미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의 합으로 이야기 전체의 그림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았거든요.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를 모르겠더군요. 줄리어스 시저까지는 그러려니 했지만 어머니를 죽여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엘렉트라와 선한이웃의 연결점은 머리가 나쁜 탓인지 모두지 찾을 수가 없어서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분량이 적었다면 그냥 넘겼겠지만 1부 최민석을 제외하고 2부에서부터 끝까지 온통 엘렉트라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다 보니 작가가 제게 무얼 말하려고 하는 건지 좀체 파악이 되지 않았고 갖은 수식과 은유, 상징성을 띈 것 같은 문장들 앞에선 맥을 못추었습니다. 

그리고 6월 6일, 현충일 사이렌 소리와 함께 시작한 아침 묵념과 함께 남은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날에 맞는 의미있는 독서를 하고 싶었거든요. 마음가짐이 달라져서인가요. 재미가 있었습니다. 앞서 쭉 불평불만을 나열하고서 할 말은 아니지만 한번 흐름을 타니 인물간의 얽힘과 전개가 아주 흥미진진하더군요. 1부의 최민석에 이어 5부의 엘렉트라, 6부의 관리관, 7부의 최민석에서 발견하게 되는 잇따른 반전들과 긴장감이 이정명 작가의 명성을 알게 했습니다. 대신에 문장과 행간을 두고 의미를 찾거나 해석을 하려는 그 어떠한 시도는 모두 배제했습니다. 셰익스피어와 그리스의 비극들, 신화 같은 역사, 엘렉트라와 클리타임네스트라, 아가멤논과 트로이 전쟁, 아킬레우스가 전해줄지도 모를 깊은 의의는 읽는 즉시 책 속에 고이 묻었습니다. 제 한계를 인정하니 독서도 한층 수월하게 느껴지더군요. 민주화 운동의 세력들을 본진에서부터 괴멸시키려는 관리관의 궁극적인 목적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벌려놓은 이중삼중의 공작들이 지나치게 드라마틱하게 느껴졌고 좀 현실 같지 않다? (소설인데) 소설 쓰고 있네? 싶은 괴리감도 적잖았습니다. 그러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작가의 말에선 현실이 더 소설 같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참고로 선한이웃은 1984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에서 착안한 글입니다. 정부가 공작원을 학생으로 위장시켜 운동권 정보를 빼낸 일이 빌미가 되어 학생회가 민간인을 요원으로 의심, 감금, 폭행한 사건이었죠. 관련자로 유시민 작가님도 계셨고 이 사건으로 실형도 사셨다고 하는데 평범한 학생들이 하루아침에 범죄자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이 고스란히 선한이웃에도 나타납니다. 김기준과 이태주, 최민석, 이진아, 관리관이라는 인물 면면의 성격과 개인적, 정치적 고뇌가 묵직하고 독재정권에 부역했던 이들을 분노없이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줍니다. 증오를 불태우고 저주를 퍼붓게 되는 류의 소설은 아니었던 셈이죠. 그럼에도 퍽 몰입감이 높은 소설인데다 정치와 미디어, 영웅에 관한 메시지가 또렷해 맘에 들었습니다. 거대한 권력의 손길에 쓸려나가는 80년대 개인의 인권이 굉장히 드문 소재와 방식으로 표현된 점도 신선했고, 최루탄과 화염병으로 불 붙은 거리가 아니라 연극판 위에서 벌어지는 요원들의 공작을 다루고 있다는 점도 새로웠어요. 선한이웃을 구분 지을 수 없다는 점.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의 대립이 실상은 대립이 아닌 공생이었다는 결말도 오싹 소름 돋게 합니다. 상투적이지만 희망적인 결말에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군요. 끝이 허무한 소설만큼 시시한 건 없으니까요.

쉽고, 간결하고, 적당히 통속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 이정명! 이라는 세간의 평과는 많이 다른 책입니다. 되게 있어보이는 남자들의 이야기였죠. 80년대 우리 현대사를 한번 더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기도 했구요. 저는 그 점에 높은 의의를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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