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잘해요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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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모른 척 해야 잊혀지는 법이거든" (p215)


최순덕성령충만기에서 시봉은 어른 남자 손바닥만한 호치키스로 사람 머리를 찍고 다니는 건달패였다. 지하철에서 구걸을 하는 패거리의 짱이기도 했고, 건달패 직원으로 입사하기 위해 피씨방에서 이력서를 쓰는 좀 모자라고 서글픈 군상이었다. 사과는 잘해요에 또다시 등장한 시봉은 화자인 "나"와 함께 시설에 감금된 채 두 명의 복지사들에게 두들겨 맞고 있었다. 길을 가다 봉고차에 강제로 실려 시설에 갇힌 시봉과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제 발로 시설에 들어온 나는 어느 새 가장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둘은 적어도 내가 볼 때엔 비슷한 방향으로 함께 미쳐가고 있었다. 미칠 수 밖에 없는 환경이기도 했고. 시설은 내 심장을 쏴라나 강예원이 주연했던 영화 날 보러 와요 속의 정신병원과 비슷한 곳이었다. 시사고발 프로에도 종종 등장하곤 하는 학대와 폭력, 인간 이하의 굴종이 자행되는 곳. 미치광이 원장과 복지사들로 인해 멀쩡한 사람도 심신상실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지옥. 복지사들에게 맞지 않기 위해 시작됐던 사과가 어느 새 일상이 되어 이제는 사과를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어져버린 시봉과 나. 하이에나처럼 사과할 거리를 찾아다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소름끼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을 매일 같이 배식 받고, 짓지 않은 죄를 고백하며, 원장의 변태짓에 동조하고, 살인과 강간의 자리에 함께 하는 일도 있었다. 너무나 쉽게 평범한 이웃, 평범한 가장들을 미치게 만들었으며, 친구인 서로에게 죄를 짓기도 했다. 굉장히 끔찍한 일들이 여럿 벌어진다. 그것이 순진한 듯, 어리숙한 듯, 정상인 듯, 정상이 아닌 듯한 화자 나의 입을 거치면서 우습고도 기괴하게 변모하지만 화를 삭혀주지는 않는다. 사과해야 할 모든 사람들이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세상 속 무구한 이들의 속죄가 부끄럽다.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었다. 한 권도 완독하지 못한 채 네 권을 고스란히 이고 가려니 억울해서 후딱 읽었다. 두 시간도 안되서 다 읽을 거라는 믿을만한 정보통의 입깁에 고민도 안고 선택한 책, 사과는 잘해요. 이기호 작가에게 연이어 맞은 뒤통수가 얼얼하다. 작가에게 사과받고 싶다. 왜 독자를 착각하게 하셨나이까. 유머와 풍자, 해학이 함께 하는 재미난 책일거라 생각했건만! 안그래도 몸이 땅으로 꺼지는 기분이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아주 지하로 땅굴을 파게 된다.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보다는 최순덕성령충만기에 더 가까웠던 책.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책. 웃으려니 찝찝하고 울려고 하니 더 찝찝한 책. 내 스타일은 아닌데 너무 쉽게 읽혀 무안했던 책. 읽고 나면 누구에게라도 사과하고 싶어지는 책. 동시에 절대  누구에게도 사과하지 않고 입 다물고 있는 누구들이 생각나는 책. 또렷하게 생각나는 죄도 없건만 읽는 것만으로도 죄 지은 듯 가슴이 일렁일렁하는데 죄 짓고도 발 뻗고 자는 놈들의 면상은 오늘도 또 뉴스를 탄다. 모르는 척 잊혀지고 있는 수 많은 죄들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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