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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의 땅 ㅣ 서던 리치 시리즈 1
제프 밴더미어 지음, 정대단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6월
평점 :
"네 이름을 말해 봐!"
측량사가 악을 썼다.
"네 이름을 말해 봐! 네 빌어먹을 엿 같은 이름을 말해 보라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 (p184)
언젠가 비무장지대의 생태환경에 관련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에 의해 강제로 격리된 민통선이 천혜의 아름다운 온대림 숲과 초지를 일구었다는 글이었다. 사람의 손이 일절 닿지 않았기에 별다른 오염원도, 간섭도, 훼손도 없이 멸종 동물들이 살아 남았고, 각종 식물들이 꽃을 피웠다. 울창한 숲이 만들어졌다.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숲이 신비롭고 감동적인 느낌으로 눈 앞에서 아른아른했다. 통일이 없어도 좋으니 저곳이 영원히 사람의 눈에서 멀어진 자연으로 남게 되기를, 인간이 남긴 지뢰와 화약으로 스스로를 무장하기를, 침입하는 모든 인간들을 격퇴시키기를 초자연적 자아를 판타지처럼 바라게 되었다. 그리고 이 여름, 그런 상상이 고스란히 드러난 소설을 만났다. 서던 리치, 소멸의 땅이다. 이름은 X.
서던 리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생물학자 나의 지극히 좁은 시선 안에서 X의 미스터리를 쫓는 모험물이다. X는 3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되었고, 방벽이 드리워진 채로 방치되었다. 폐쇄 이유는 군사적인 문제로 인한 환경재앙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사실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는 상태로 여성 네 명으로 이루어진 서던 리치의 열두 번재 탐사대가 이곳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화자인 생태학자 나와 심리학자, 인류학자, 측량사로 구성된 이들 탐사대는 지금까지의 모험물에서는 만나보지 못했던 류의 비이상적 집단이다. 여타의 SF 소설 속 탐사대원들을 뽑는 과정을 보자면 그들은 단순히 지식적 재량과 능력으로만 평가되지 않는다. 팀워크와 스트레스에 대한 조절 능력, 원만한 성격, 이타심, 협업은 탐사대원의 가장 필수적인 자질이다. 마션이나 씁니다 우주일지, 인터스텔라에도 그래서 미치광이는 딱 한놈씩 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에 비교하자면 여기 X의 탐사대원들의 선발은 어딘지 기묘하기까지 해서 X라는 폐쇄된 공간뿐만 아니라 여성이라는 이들의 통일적 성별과 비틀린 성격 자체가 엄청나게 높은 긴장감을 가져온다. 생물학자 나는 침묵을 폭력처럼 휘두르는 사람이며, 대장인 심리학자는 대원들과 소통하지 않은 채 필요할 때엔 최면으로 그들을 좌지한다. 측량사는 거의 모든 일의 해석에서 주인공 나와 대적하며, 인류학자는 제 성격을 드러내기도 전에 죽었다. 애초에 탐험이 목적이 아니라 죽으라고 보내진 듯이 그들의 손에 쥐어진 구식 무기와 변변치 않은 훈련, 서로간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게 만든 심리훈련도 이상하다. 본래도 불안감 가득했던 이들 탐사대원들은 원시림의 자연에 더한 초자연적인 존재들로 점점 X의 비밀 속에 매몰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의 울음, 강을 타고 올라와 거의 뭍에까지 오르내리는 인간 같은 눈을 한 돌고래 때, 누군가에게 조종 당하고 있는 듯한 멧돼지와 허물처럼 여기저기 벗겨져 있는 인간의 탈까지. 그러나 그런 자연보다 더 우세한 두려움을 주는 것이 정작 무기를 쥔 상대방이며 인간의, 문명의 흔적이랄 수 있는 미지의 탑과 벽을 빼곡히 채운 저주같은 문구라는 것이 이 소설의 아이러니였다.
이들은 탐사대인가 X에 바쳐지는 재물인가. 서던 리치라는 집단이 숨기고 있는 비밀은 무엇인가. 서던 리치는 어째서 그들에게 자신의 이름조차 명명하지 못하게 만들었나. 인류의 흔적인지 지구상에 뿌리내리려는 또다른 문명의 진원지인지 구분가지 않는 탑과 저주 같은 문구는 또 무엇이었을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생명체들과 매일 매순간 확장되가는 X의 미스터리가 어느 하나 풀리지 않은 채로 1권은 끝이 났다. 그러나 그 수수께끼를 다 알지 못한 상태에서도 소멸의 땅은 단독적인 완결성으로 충분히 매혹적이다. 미지의 생물체에 대한 공포, 생존자들의 탈출에의 욕구, 생물학자 나의 감염과 그녀의 마음 속에서 인간으로서 존재해야 할 이유가 점점 사라지며 X에 동화되는 모습이 공포와 호기심, 두려움을 갖게 만든다. 존재의 이유가 명명하지 못한 이름처럼 바스러져버린 생물학자의 다음 이야기는 또 얼마나 즐거울 것인가. 생존물, 초자연적 미스테리, SF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주저없이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