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남자 - 2017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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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정은, 웃는 남자

"죽음과는 얇은 금속판 한 겹만을 남겨둔 채 제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 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가난하고 못배우고 정직하지 못한 부모가 나를 먹여 살리는 최소한의 행위조차 거북스러웠던 d. 살고자 하는 인간의 조악한 본능과 비굴함이 경멸스럽던 d의 생에에서 유일한 축복이었던 dd의 죽음. 사물에 깃들여 있는 온기조차 환멸스럽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일상의 부스럭대는 소음조차 구토가 치미는 그의 정신 위로 의도치 않게 가로 흐르는 한반도의 근대사. 6.25, 한강다리 폭발, 산업화와 불황, 이명박과 시위와 세월호까지. 얼음처럼 차가워져 올곧게 환멸만이 가득찬 그의 생이 다시 온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 무의미한 소음으로 가득찬 생의 관을 아름다운 음으로, 의미있는 소리로 채워나갈 수 있을까. 뜨겁게 데워진 그의 엠프 속 진공관에 희망을 가져본다.

2. 김숨, 이혼

"나는 이혼이라는 통과의례가 내게 불행이 아니기를 바라.
당신에게는 더더구나 불행이 아니기를 바라고 바라."

타인의 고통엔 민감하지만 내 가족의 고통에는 무딘 남편과의 이혼. 이혼은 나를 고아로 만드는 것이라는, 내 영혼을 버리는 것이라는 남편의 말이 정말 쓰레기 같았다.

3. 김언수, 존엄의 탄생

"뭔 인간의 존엄이 개에게 훼손된답니까, 다음."

꿈도 없이 희망도 없이 그렇게 노예처럼, 보통의 사람들은 그렇게 산다. 천하장사만 먹을 수 있으면 세상 행복한 동네 똥개가 가끔은 나보다 낫다.

4. 윤고은, 평범해진 처제

"저 남자..... 진짜 못한다."

남자친구와 친구의 섹스 비디오를 보게 된다면, 그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아야 되는 상황이라면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5. 윤성희, 여름방학

"그러지 마요."

내 인생에 갑작스레 닥쳐온 여름방학, 은퇴. 독신녀, 나를 모욕했던 첫사랑의 재림, 가족과의 영원한 결별. 이런 소재를 이렇게 화창한 느낌으로 벌려놓다니. 여름이다, 더 뜨거워져도 뭐 어떤가라는 느낌으로 신이 난다.

6. 이기호, 최미진은 어디로

"이기호/병맛 소설, 갈수록 더 한심해지는, 꼴에 저자 사인본
(4천 원ㅡ그룹 1, 그룹 2에서 다섯 권 구매 시 무료 증정)"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그 느낌 그대로. 중고나라에 이기호의 책이 올라왔다. 판매자 제임스 셔터내려는 천원, 이 천원도 아니고 덤으로 그의 책을 올려놓았다. 꼴에 저자 사인본이라는 문구는 종이가 아깝다에 상응하는 문구겠지. 중고나라 직거래로 삼만원을 들고 달려가는 이기호. 이기호는 웃긴다. 웃는 남자 속에서 유일하게 웃겼다.

그런데 정말 미진씨는 어디로 갔을까?  

7. 편혜영, 개의 밤

"개들이 너무 짖지 않는다... 개가 짖었다고 해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구타 당한 군인,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라는 병들, 그들을 핍박하는 갑과 그 사이에 끼인 을들.
누구라도 좀 짖었으면 좋겠다고 채 열 장 밖에 안되는 단편을 읽으며 바라게 된다. 설령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조차 주지 못할지라도, 그렇다면 물어 뜯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꼬랑지를 말고 도망갈 것이 아니라 으르렁으르렁 짖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왜 우리의 삶은 이다지도 비참한 것인가.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 작품집, 현실이 고스란히 재현된 다양한 서사에 입이 쓰다. 이기호가 좋은 것은, 여전히 이 작품집 안에서도 가장 좋았던 것은 어쨌든 그의 소설 안에는 빨아먹고 싶은 단맛이 남아있기 때문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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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스페셜 에디션)
박민규 지음 / 예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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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속 "나"는 서른 넷, 노르웨이의 숲 속 와타나베는 서른일곱이 되었습니다. 녹슬어버린 상자 속에서 스무살을 꺼내드는 나와 초원의 풍경 속에서 스물을 헤아리는 와타나베의 너무도 닮은 모습은 이들의 청춘에 잃어버린 "그녀"들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언제까지고 나를 잊지 말아달라던 나오코와 나는 언제까지고 잘 지낼테니 안녕히... 안녕히 계시기 바랍니다 하고 이별의 편지를 남긴 파반느의 "그녀"는 너무나 다른 사람인 것만 같지만 본질은 동일합니다. 사람과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하지만 그 소통의 방법을 상실해버린, 소통의 통로를 차단 당한 여리디 여린 소녀들입니다.

나오코는 자살한 기즈키를 대신해 와타나베를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다시 세상으로 나가보려 하지만 과거의 사랑이 너무 커서 현재의 사랑은 그 벽에 하릴없이 무너져버립니다. 어쩌면 나오코는 조금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와타나베의 독백이 뼈 아픈 이유였지요. 결국 나오코는 요양을 위해 통보도 없이 와타나베를 떠나버립니다. 요양원에서 온 한통의 편지가 없었다면 와타나베의 삶은 또 어떻게 변했을까요? 그리고 여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속에 또 한 명의 그녀가 있습니다. 나오코만큼이나 큰 상실을 그 이상의 상실을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안고 나온 여성입니다. "그녀"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예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못생겼다고 말할 만한 정도가 아니라 상대로 하여금 문화적인 충격을 줄 정도의 추녀입니다. 책을 읽는 내내 못생긴 그녀를 상상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지만 제 상상의 어려움과는 별개로 그녀는 그 추함으로 인해 매일매일을 세상 속에서 손가락질 받고 농락당합니다. 1985년의 대한민국은, 그리고 현재도 미추에 지적질 하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교양조차 없는 야만적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그런 그녀가 그를 만났습니다. 아름다우나 부덕한 배우자인 아버지를 두어 미모에 현혹되지 않는, 작가라는 꿈의 독특한 감수성을 가진 "나"를요. 나오코가 그랬듯 그녀 또한 "나"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어둠을 밝히는 잠깐의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아름답지 못한 여성의 마음속에 잠재한 두려움과 공포가 너무 컸기로 그녀는 지금의 사랑만을 간직한 채 통보도 없이 나를 떠나가버립니다. 달빛이 비치는 책상에서 그녀가 그를 그리워하지 않았다면, 이별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면, 그에게 보내어진 라벨의 LP와 한 통의 편지가 없었다면 "나"의 삶은 또 어떻게 변화했었을까요?

"서로를 간호하는 느낌으로 걸어가던 길고 긴 골목을 잊을 수 없다. 인간의 골목... 그저 인생이란 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 불과한 인간들의 골목... 모든 인간은 투병 중이며,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누군가를 간호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에서)"

메리 크리스마스, 삶이 병들었다고 느끼는 와중에도, 두 사람 모두 마음 속 어느 한 구석이 절름발이가 되어 다리를 끌면서도, 그가 그녀에게 속삭여주는 그 말이 좋았습니다. 아쉬우니까, 곧 이렇게 가버리니까, 이제 더는 어쩔 수 없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시간 속을 낡아버린 청춘과 함께 우리 모두 지나쳐왔고 지나가는 중이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에서)

모든 오해 속에서도, 모든 불안 속에서도 오늘도 사랑하고 있을 그와 그녀들에게 삶이 크리스마스와 같은 축제이길 바라며. 이 세상의 모든 축제들을 향하여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도 우리 부디 행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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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말이 있다면 - 이 문장이 당신에게 닿기를
최갑수 지음 / 예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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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리고, 그러나, 그래도.
                                                 ㅡ 최갑수의 사랑을 요약하는 부사들

사랑에 관한 영화와 시와 음악과 소설 속 48개의 아름다운 단락들이 사진과 함께 엮어진 책입니다.
작가가 아끼는 문장들을 엿보며 이 책에 이 영화에 이런 구절들이 있었나 새삼 돌이켜봐도 까만 기억이 점점점. 시인의 감수성이 저와는 달라 가슴에 새겨두는 문장들이 더욱 많은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여행 에세이나 잡문집 같은 장르를 쉽게 소화하지 못하는 취향인데도 (타인의 낭만을 거북스럽게 느끼는 성격 탓인 것 같습니다) 상대가 시인이기에 관용이 생깁니다. 곽재구 시인의 포구기행이 생각나기도 하는 보드라운 결들을 저항없이 읽으며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고(류시화)" "당신 생각을 켜두고 잠이 들던(함만복)" 지나간 밤들을 헤아려 봅니다. 시인의 말처럼 되돌아보면 언제나 허탈하고 허무했던 사랑들. 결실이 없는 사랑이라 제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나간 사랑을 생각하면 어두운 방구석에 나무 상자를 하나 두고 그 속에 들어가 몇 시간이고 쭈그리고 앉아 있고 싶어집니다" 책 속 많은 문구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입니다. 어쩐지 책을 읽는 내내 외로워져서 혼자 먹는 밥도 더디게 줄고 마음이 참 울적했습니다. 다시금 시작할 사랑이 너무 눈부셔 지금 잠깐 눈을 감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며 시인의 사랑을 음미하는 시간들. 시인의 아내는 이런 대우를 받는구나 문장 가득 부러워도 지는 아침. 이 책에서 발견한 사랑보다도 더 사랑한다는 말을 미래의 당신에게도 들려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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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우나는 JTBC 안 봐요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박생강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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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 우리는 여기서 을이 아닙니다. 그냥 병이에요. 자, 찌푸리지 말고 얼른 스마일" (p30)

작가 박생강은 실제로 사우나에서 일했다. 거의 일년쯤, 글이 아니라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서, 주머니 사정이 빈한해서, 기타 여러 이유의 결합으로 어찌저찌 가서 일한 곳이 대한민국 1퍼센트의 부자들이나 이용할 수 있는 멤버쉽 회원제 사우나였다. 부자들 등짝에 로션도 발라줘가며 세탁물도 나르고 운동복도 정리하는 시간이 끝이 난 후 쓰기 시작한 소설이 "살기좋은나라?"였다. 출판사에서 새마을운동 하던 시절도 아닌데 제목 좀 바꾸자 해서 변경된 것이 지금의 매력 넘치는 "우리 사우나는 JTBC 안봐요"라고 하니 담당자분이 누구신지 칭찬 스티커 한 오백개 붙여 드려야 할 듯. 위대한 개츠비의 처음 제목도 "쓰레기더미와 백만장자들 사이에서"였다는데 둘 다 첫 제목 그대로 달고 나왔으면 난 이 책들 쳐다도 안봤을테니까.

주인공 손태권. 제1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우리의 남극 탐험기(김근우 작)" 속 "나"처럼 등단은 했는데 인기는 없는 무명작가다. 연극하는 애인이 있고, 논술학원 강사를 뛰다가 백수가 된 뒤 헬라홀이라는 별칭의 사우나에 매니저로 취업한다. 별스러울 정도로 유유자적하고, 자의식 강하고, 게으르고, 남 눈치 안보는 성격 등은 김근우 작가가 만든 "나"와 비슷한데 남극탐험기의 환성적인 느낌이나 판타지적 요소들이 완전히 배제된 채 지극히 현실적인 심심함과 지루함에 더하여 지각과 맨틀 사이 모호로비치치불연속면 같이 끼인 부자 남자들의 별 거 없는 얘기가  탄탄하게(?) 반영한 소설이 "우리 사우나"라고 하면 이거 말이 되나 안되나. 사우나만큼이나 덥고 습한 여름이라 생각이 어렵다. 남극과 사우나라는 하늘과 땅만큼 다른 배경의 이야기지만 읽는 내내 어쩐지 우리의 남극 탐험기가 자꾸만 생각이 났다. 남극은 실패도 성공이라고 부르짖고 사우나는 인생 별 거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주제의식에 차이가 있긴 한데 주인공들이 다 작가라 그런가, "우리는 그냥 살아간다"는 기본 골자가 비슷해서 그런가. 어쨌든 계절상 남극쪽이 좀 더 낫긴 하다. 거긴 상상하면 시원해지니까. 남다른 직업 탓인지 태권은 보잘 것 없게 느껴지는 사우나 매니저 일에도 깜찍한 교훈을 달고 퇴직을 한다. "보험 없는 삶이지만 내가 사는 삶이니 타인의 눈치를 보지 말자", 잘난 부자놈들도 벗겨놓으면 너나 할 것 없이 그 놈이 그 놈이고, 나이 들면 불쌍한 거 똑같고, 여기서 갑질하던 놈 저기 가선 을 되는 것도 비슷하고. 그러나 보수이기에 결코 JTBC는 안보고, 채널은 아예 삭제돼 있고 기타등등. 근데 모르겠다. 책을 읽어도 사는 게 비슷한 게 맞는 건지, 타인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있는건지. 갑질하는 그들과 다르게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로 종업원을 부르는 태권의 모습이 애인과 헤어지고 다시 백수가 되는 모습에 나는 왜  울적해지기만 하는건지. 남탕을 너무 오래 쳐다본 후유증인걸까. 텁텁하고 지저분한 인생살이 이야기들이 녹아있어 그런가 비위도 상하고 머릿속이 미식미식한다. 입맛이 되게 쓰다 이런 건 아닌데, 재미도 있는데, 여름밤에 읽기엔 사우나 천장 곰팡이를 들이키 듯 콤콤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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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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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버전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만났다. 어쩌면 하루키 버전 위대한 개츠비와의 짬뽕이라고 해야할지도. 제 1권 현현하는 이데아, 제 2권 전이하는 메타포. 이들 소제목을 보며 이게 무슨 뜻이야 하며 짜증난다고 생각했던 독자가 나뿐은 아닐 것이라 추측하며, 그러나 책은 이 뜻 모를 제목처럼 무한정으로 현학적이거나 재미없지는 않았다. 엘리스가 떨어지는 토끼 굴, 그 속에서 펼쳐졌던 환상적인 이야기가 좀 더 기괴하고 좀 더 오싹하고 그러나 크게 공포스럽지 않은 동양적인 느낌으로 하루키의 손에서 재탄생 했다고 하면 딱일 것 같은데 문제는 리뷰 쓰기가 너무 어렵다는 거. 몇 몇 내용은 다 읽고 나서도 의아하고 이해가 안되어서 설명을 못하겠고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은 차근차근하게 나열이 안된다. 결국 등장인물 소개로 짤막짤막 짚고 넘어가는 걸로 대신해야 할 것 같다.

1. 주인공 나

결혼 후 가장으로서 가족(이래봤자 아내 한 명) 부양을 위해 생계형 초상화 화가가 된 나는 그러나 지금 그 초상화에서 손을 놓을 생각을 하고 있다. 아내가 바람났다. 이혼을 원한다. 눈치 채지 못한 자신이 등신 같지만 별 분풀이도 없이 간단히 짐을 꾸려 집을 벗어난다. 그로부터 시작된 정처없는 발걸음. 곧이라도 멈춰설 것 같은 낡은 자동차를 타고  동일본대지진이 있었던 그곳, 아직은 참화가 번지지 않았던 그 시기에 도호쿠 지방을 여행하다 전설적인 일본화가 아마다 도모히코의 집에 기거하게 된다. 나가 집안을 정리하다 발견한 도모히코의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 새벽녘 울려퍼지기 시작한 숲속의 방울 소리. 방울 소리를 쫓아 발견한 공터의 밀실 개방. 혼 내지는 이데아랄 수 있는 기사단장의 방문. 자신과 딸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나를 찾아오는 이웃의 미스테리한 남자 멘시키. 생령으로 자신의 화실에 나타난 거장 아마다 도모히코에 얽힌 역사. 초상화를 부탁하는 또다른 얼굴없는남자. 난징대학살. 오스트리아의 나치 등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각 권 600 페이지에 가까운 두꺼운 양장본 속에서 주인공 나와 연결되어 있다. 아내를 잊기 위한 몸부림이라기에도 좀 민망한 침대 위의 각종 불륜을 양념 삼아 아마다 도모히코의 집에서 벌어지는 현실과 비현실의 범람 속에서 묵직하게 졸여지는 토마토 소스처럼 "나"는 차근차근 깊어지고 여물어간다.

2. 멘시키

주인공 보다 더 주인공 같이 각인된 남자. 부유하고, 똑똑하고, 올바른 매너와 기이한 정직함과 절제된 생활과 반전의 비틀린 욕망을 갖춘 매력적이지만 위함한 남자.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마치 기사단장 죽이기 속에서 비극없이 되살아난 느낌이었다. 개츠비가 사랑하는 여자의 이웃한 집을 구매하여 자신의 선착장에서 애인의 집을 밝힌 초록 불빛을 건너다보았듯 멘시키는 떠나간 여자가 낳은 딸이 제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깊은 산속 혼자만의 성전을 구축한다. 발코니에 서서 손을 뻗으면 잡힐 듯이 가깝게 느껴지는 이웃한 딸의 방을 군사용 망원경으로 훔쳐보며 비틀린 매혹 속에 매몰되던 그는 급기야 주인공 나로 하여금 딸 마리에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초상화라도 그의 성전에 가두기 위해. 기사단장을 보진 못하지만 밀실에서 그를 풀어준 장본인.

3. 아마다 도모히코

일본화의 거장. 2차세계대전의 피해자. 강제징용으로 중일 전쟁에 참여한 그의 동생은 난징대학살의 충격으로 자살, 빈에서 만난 애인은 게슈타포에 저항하다 처형, 혼자 살아남은 충격으로 그림에만 몰두하다 그의 혼을 가득 담은 명작 기사단장 죽이기를 잉태하나 현재는 치매로 요양원에서 치료 중이다. 난징대학살 소재 때문에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길래 얼마나 대대적인 내용이려나 기대를 했는데 좀 많이 실망스러웠다. 짧고 간단하고 별 내용이 없다.

4. 기사단장

이데아. 육신이 없는 초월적인 존재. 내 기준에선 이거 뭐 귀신이나 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 이데아라니 그런가 보다 한다. 방울을 매개체로 주인공 나의 집과 멘시키의 집을 오가며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나에게 조언한다. 스스로를 희생하여 도모히코를 구원하고 마리에를 살리는 정의로운 존재.

5. 마리에

멘시키의 데이지. 멘시키의 낭만. 멘시키의 좌절. 본능적으로 멘시키의 접근에서 어떤 목적성이 있음을 느껴 그를 꺼려한다. 고모와 멘시키의 육체적 관계를 알고 난 후 그를 의심하여 성전으로 숨어들었다 사흘간 의도치 않은 실종자가 된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주인공 나와는 제 작은 가슴을 두고 불평할만큼 허물없는(?) 사이. 침묵할 줄 알고, 총명하며, 의지가 굳건한 소녀. 주인공 나와 마찬가지로 기사단장을 만나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

6. 유즈

주인공 나의 아내. 불륜으로 이혼하나 정작 불륜남과의 관계에서 임신이 된 후엔 그와 헤어져 혼자 출산을 하려 결심한다. 남편과 헤어진 것은 8개월 전, 임신은 7개월 차이니 그럴 리 없음에도 어쩐지 뱃속의 아이를 불륜남의 아이로 생각할 수가 없다. 나로 하여금 죽은 여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기폭제.

그 밖에 각종 불륜녀들은 생략. 집을 제공한 친구이자 도모히코의 아들인 아마다 마사히코는 유즈 불륜남의 직장동료이기도 하다. 멘시키의 이름에는 강을 건너다라는 뜻이 들어있다. 그 이름에 힌트를 얻어  주인공 나는 이공간에서 배를 발견해 강을 건넌다. 멘시키는 죽은 애인의 속옷을 비닐봉지에 래핑해 보관 중이다. 나가 잠자리를 가졌던 SM 취향의 여성을 쫓아왔던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가 악령이든 뭐든 조금 더 역할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 아쉬웠다. 기사단장 이데아에 긴 얼굴의 메타포도 있는데 무시무시한 악령 하나 덧붙여져도 좋지 않았을까. 한번 읽은 걸로는 다 정리가 안된다. 언제쯤 재독이 가능할까. 이틀 남은 휴가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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