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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스페셜 에디션)
박민규 지음 / 예담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속 "나"는 서른 넷, 노르웨이의 숲 속 와타나베는 서른일곱이 되었습니다. 녹슬어버린 상자 속에서 스무살을 꺼내드는 나와 초원의 풍경 속에서 스물을 헤아리는 와타나베의 너무도 닮은 모습은 이들의 청춘에 잃어버린 "그녀"들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언제까지고 나를 잊지 말아달라던 나오코와 나는 언제까지고 잘 지낼테니 안녕히... 안녕히 계시기 바랍니다 하고 이별의 편지를 남긴 파반느의 "그녀"는 너무나 다른 사람인 것만 같지만 본질은 동일합니다. 사람과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하지만 그 소통의 방법을 상실해버린, 소통의 통로를 차단 당한 여리디 여린 소녀들입니다.
나오코는 자살한 기즈키를 대신해 와타나베를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다시 세상으로 나가보려 하지만 과거의 사랑이 너무 커서 현재의 사랑은 그 벽에 하릴없이 무너져버립니다. 어쩌면 나오코는 조금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와타나베의 독백이 뼈 아픈 이유였지요. 결국 나오코는 요양을 위해 통보도 없이 와타나베를 떠나버립니다. 요양원에서 온 한통의 편지가 없었다면 와타나베의 삶은 또 어떻게 변했을까요? 그리고 여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속에 또 한 명의 그녀가 있습니다. 나오코만큼이나 큰 상실을 그 이상의 상실을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안고 나온 여성입니다. "그녀"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예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못생겼다고 말할 만한 정도가 아니라 상대로 하여금 문화적인 충격을 줄 정도의 추녀입니다. 책을 읽는 내내 못생긴 그녀를 상상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지만 제 상상의 어려움과는 별개로 그녀는 그 추함으로 인해 매일매일을 세상 속에서 손가락질 받고 농락당합니다. 1985년의 대한민국은, 그리고 현재도 미추에 지적질 하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교양조차 없는 야만적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그런 그녀가 그를 만났습니다. 아름다우나 부덕한 배우자인 아버지를 두어 미모에 현혹되지 않는, 작가라는 꿈의 독특한 감수성을 가진 "나"를요. 나오코가 그랬듯 그녀 또한 "나"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어둠을 밝히는 잠깐의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아름답지 못한 여성의 마음속에 잠재한 두려움과 공포가 너무 컸기로 그녀는 지금의 사랑만을 간직한 채 통보도 없이 나를 떠나가버립니다. 달빛이 비치는 책상에서 그녀가 그를 그리워하지 않았다면, 이별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면, 그에게 보내어진 라벨의 LP와 한 통의 편지가 없었다면 "나"의 삶은 또 어떻게 변화했었을까요?
"서로를 간호하는 느낌으로 걸어가던 길고 긴 골목을 잊을 수 없다. 인간의 골목... 그저 인생이란 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 불과한 인간들의 골목... 모든 인간은 투병 중이며,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누군가를 간호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에서)"
메리 크리스마스, 삶이 병들었다고 느끼는 와중에도, 두 사람 모두 마음 속 어느 한 구석이 절름발이가 되어 다리를 끌면서도, 그가 그녀에게 속삭여주는 그 말이 좋았습니다. 아쉬우니까, 곧 이렇게 가버리니까, 이제 더는 어쩔 수 없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시간 속을 낡아버린 청춘과 함께 우리 모두 지나쳐왔고 지나가는 중이지만,
"메리 크리스마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에서)
모든 오해 속에서도, 모든 불안 속에서도 오늘도 사랑하고 있을 그와 그녀들에게 삶이 크리스마스와 같은 축제이길 바라며. 이 세상의 모든 축제들을 향하여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도 우리 부디 행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