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
폴 비티 지음, 이나경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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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분리? 노예 제도? 이 개새끼 같은 놈아, 네 부모가 널 그렇게 키우진 않았을 거다!
그러니 이놈의 파티를 시작해 보자!" (p40)

파티의 근원은 악이었다. 폭력이었다. 폭행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성장 기폭제였다. 스테미너 물약과도 같았다. 미국이 약을 끊었을지는 몰라도(정말??) 후유증은 계속된다. 흑인이라는 인종에게 되물림된 폭력이 일부 가정으로 확대되었다. 적어도 미의 집에서는 그랬던 듯 하다. 미의 아버지는 행동주의 심리학자다. 살아 생전 흑인의 자유를 누구보다 목청껏 부르짖었던 이 남자는 그러나 가정폭력범이었다. 영혼의 살인범이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 그는 이미 몇 차례나 아들인 미를 살해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역사의 문제가 그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책이라고 생각한다. 페이지를 넘겨 버리면 과거를 잊을수 있다고. 하지만 역사는 그것이 적힌 종이가 아니다. 역사는 기억이며, 기억은 시간과 감정이자 노래다. 역사는 우리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세대의 문제는 그것이다. 역사를 모른다는 것."(p336)

그는 아들 미를 심리학적 이론의 실험체로 사용했다. 도무지 역사를 잊을 수 없었던 이 남자에게 미는 인간쥐였고 때때로 흑인시사상식 문제를 맞추지 못하는 정도로도 전기고문을 했다. 쓰레기 같은 교육의 산 증거로 미는 제 아버지가 교통법규위반이라는 경범죄로 경찰의 총에 사살되었을 때도 그를 안고 울기 보다는 그를 안고 도넛 가게의 흑인 지식인 모임에 참여해 그를 의자에 앉혔다. 그의 아버지가 그런 행동을 훨씬 더 선호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아주 어려서부터 제가 어떻게 클지를 알고 있었다. 흑인으로서 받은 부당한 처우 때문이 아니라 일찍이 그가 노출되었던 폭력들이 그의 현실을 자각케 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역 고등학교에 가게 될 거라고. 반에서 중간 정도 석차로 졸업해, 흔해 빠진 윌리 럼프 럼프(주: 성병 걸린 남자)가 되어 철자법이 다 틀린 여섯 줄짜리 이력서를 들고 직업소개소와 스트립 클럽 주차장과 공무원 시험 교습소를 왔다 갔다 할 것이라고. 내 유일한 사랑, 옆집의 마페사 델리사 도슨과 결혼해서, 섹스하고, 죽이게 될 거다. 애들을 낳을 거다. 애들에게 말 안 들으면 사관학교에 보내 버릴 거라고 협박하고, 체포되면 절대 보석금을 안 내 내줄 거라고 으름장을 놓을 거다. 스트립 클럽에서 당구나 치고 내셔널 대로와 웨스트우드 대로의 트레이더 조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금발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그런 흑인이 될 거다." (p61)

그는 대체로 그가 어릴 적 예상한 그대로로 컸다. 노력하지 않고도 아마 원만하게 내재된 성장지도를 밟았을테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그 날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운명은 비틀렸고 그는 윌리 럼프 럼프가 되지 않고 농부가 되었다. 식물처럼 무해한 남자로 성장했다. 비록 마페사 델리사를 스토킹 하고 노예를 자청하는 노쇠한 전직 아역 스타 호미니의 등짝을 너덜너덜하게 찢어놓긴 했지만. 노예주이자 완벽한 농부이자 더 완벽한 분리주의자로서 인종차별정책에 더더욱 완벽히 찬성하는 입장이기는 해도, 그렇다, 그는 적어도 제 아버지보다는 세상에 무해한 자였다. 흑인의 모든 역사를 알고 그 역사를 아버지로부터 제 몸으로 익힌 남자가 행하는 비폭력 분리주의, 노예부활운동은 누구에게도 아무런 피해도 끼치지 않는다. 그저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안겼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기는 했어도 분리주의 운동은 그저 그렇게 시작됐다 그저 그렇게 저물었다. 대신에 지도상에서 사라졌던 미의 고향 디킨스가 일기예보에 재등장했으며 그는 미 합중국으로부터 고소되어 감방에 갈지 말지 판결을 앞두고 있는 상태이다. 

"그는 그저 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나를 부끄러워할 것이며, 나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내용을 말을 했다.
그리고 그가 옳다. 나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p395)

제목의 배반의 대상은 누구였을까. 흑인 인권운동에 앞장 선 아버지 미, 백인우월주의자가 된 아들 미, 조상이 힘써 흑인노예해방전선을 펼치며 인권을 끌어올렸더니 다시 노예가 되고 싶다며 무릎 꿇는 호미니, 같은 흑인의 아이디어를 훔쳐 주류 백인 사회에 편입한 포이, 역사를 잊어버린 채 현실에 만족하는 흑인, 역사를 잊지 못해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흑인, 역차별 당한다는 생각으로 억울한 백인, 역차별이라며 억울해 하는 백인을 보며 더욱 억울한 흑인,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인권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하는 멕시코나 인디언, 아시안들. 그도 아니면 책을 결말까지 다 읽고도 이 책의 행방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한 독자를 이름일지도. 내가 흑인으로 태어나지 않는 한 열 두번을 읽는단들 이 책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오롯이 그 문화권과 역사권에서 성장한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예시와 은유와 직유가 많아 때때로 책의 3분지 1에 달하는 주석까지 함께 읽어야 한다는 번거로움도 있다. 그렇대도 뿌리에서부터 좀 먹은 채 자란 흑인 남자가 늘어놓는 개소리가 싫지는 않았다. 복숭아 맛이 나는 훌륭한 사과의 아이러니를 대충이나마 알 것 같기도 해서.

무슨 말이냐고? 직접 읽어보시길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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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 이야기 - 르네상스의 주역 현대지성 클래식 14
G.F. 영 지음, 이길상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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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듯하다!!!!

내 맘 속 제 1의 아해도 뿌듯하다고 하고 제 2의 아해도 뿌듯하다고 하고 제 3의 아해도 뿌듯하다고 한다. 뿌듯하다!!!!! ㅋㅋㅋㅋ  책의 내용과 그에 대한 이해나 감상에의 깊이와는 별개로 내가 이 책을 완독했다는 것이 이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작년 겨울에 읽은 역사e 5편(티비 방영의 축약본) 이후로 거의 일년 만에 잡은 역사서인데다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두께였다. 끝맺음 말까지 포함하면 책은 764 페이지에 달한다. 더러 보이는 흑백 삽화로도 위로가 안되는 양인 것이다. 현대에 쓰여진 역사책도 아니었고 설민석 강사의 저서들처럼 유쾌한 풀이가 보장되지도 않았다. 17년에 번역됐다고 15, 16년즈음 출간된 책이겠거니 했던 것은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던가. 저자는 군인 출신이며 이 책을 쓴 것은 1910년도 10월에의 일이었다. 책을 펼치고 머리말을 읽고 다시 작가의 독자 전상서를 읽으며 이미 기가 죽었다. 역사는 그 자체로도 내게 힘든 영역인데 역사서의 고전 같은 책으로 접한다니 더 얼마나 힘이 들텐가. 그나마 내 용기를 북돋은 것은 작가의 말보다도 앞서 등장한 앤드루 랭의 전언이었다. "현실에 파묻혀 지내느라 그 위대한 과거를 구석에 처박아 놓아서는 안 된다." 재미를 포기한 분투하는 독서가 되겠지만 한 해에 한번쯤은 그 위대한 역사를 어느 나라의 것이든 한번은 들이 쉬고 가자 했던 어느 때의 각오가 새삼 치솟았다.

"이 가문의 역사를 살펴보노라면 노력과 행운이라는 양면에서 극단적인 사례를 많이 보게 된다. 입신 과정이 경이롭고, 숱한 부침이 애처롭고, 인류의 항구적 유익을 위한 사업에 후했던 점에서 위대하고, 그 장도에서 겪은 많은 사건들은 비극적이고, 쇠퇴와 몰락이 비루한(전정기에 버금가는 마지막 한 행동을 제외하고는) 이 가문의 역사는 3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광활한 무대에서 공연된 대 드라마와 같다.(p40)

<메디치 가문 이야기>는 350년에 걸친 메디치 가문의 장자 계열과 차자 계열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다. 중요도에 따라 페이지의 양에 차이는 있지만 그렇다고 유명하거나 재미있는 사연이 많은 1인에 대한 소개로 절반쯤을 짓이기는 류의 구성은 아니었다. 작가가 시작하는 말에 미리 공지했던 데로 가급적 균형있게 분배되었던 것만은 분명해서 각양각색의 메디치 가문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르네상스의 아침을 열었던 시조 조반니 디 비치, 피렌체에 일찌기 없었던 호칭 "국부"의 존대를 받았던 유능한 코시모, 소년시절부터 통풍에 시달려 통풍병자라는 별명을 얻었던 피에로 일 고토소, 휘장 없이 군주의 권력을 행사할 줄 알았던 위대한 자 로렌초와 그가 황금기로 이끌었던 화려한 도시 피렌체의 정경들, 르네상스의 별들이 펼치는 예술의 이야기, 별칭이 불행자일 정도로 맡은 과제마다 죽죽 말아드신 피에트로, 차자 계열의 질투와 모함으로 피렌체에서 추방되어 유럽 일대를 떠올아야 했던 대공위 시대, 서자로 하여 메디치 가를 잇겠다는 욕망으로 유럽 일대를 지옥 끄트머리까지 몰아넣었던 그리하여 메디치 가의 장자 계열을 시원하게 말아잡수신 클레멘스 7세 줄리오(천일의 스캔들 속 헨리 8세와 앤 볼린의 결혼을 막았던 그 교황!), 프랑스의 왕비였으나 정작 프랑스 국민들은 "그 이탈리아 여자"라는 호칭으로 손가락질 했으며 그런 무시와 홀대에도 어찌할 수 없는 애국심과 책임감으로 8차에 걸친 종교 전쟁으로부터 프랑스를 지키려 노력했던 불굴의 중재자 카테리나 데 메디치 (매력이 지나쳐 마녀라 일컬어졌던 디아 드 푸아티에라는 정적과의 사연으로 익히 더 알려졌다), 사자의 심장을 가졌던 여백작 카테리나 스포르차(여기서부터 차자계열), 메디치가가 배출한 유일한 군인 조반니 델레 반데 네레, 철권의 독재자 피렌체 공작 코시모 1세,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수석 수학자로 두었던 코시모 2세와 이후 170년간의 꾸준한 몰락기를 거쳐 메디치 가의 바스라진 영광을 끌어모아 별과도 같은 증여로 모든 사유재산을 피렌체에 안배했던 공주 안나 마리아에 이르기까지.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메디치 가문 전체를 다룬 책은 이 책이 유일하다고 하니 7백여 페이지가 많은 것만은 아니었다. 르네상스의 익히 들어 친숙한 예술과들과의 만남 정도로만 생각했던 책은 피렌체를 시작으로 베네치아 등의 공화국으로 점철된 이탈리아를 휘두르고 다시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스페인(통일 이전과 통일 이후), 영국 등 유럽 전역의 역사까지 뻗쳐간다.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이 그만큼이나 방대했던 것이 새삼 믿기지가 않지만 현재에까지 전해지고 연구되는 한 가문의 영달이 무겁고도 찬란하다는 것만은 알겠다.

"어떤 그림이든 나름대로 할 말을 갖고 있다.
작품이 조야하든 조야하지 않든 예술의 참 즐거움은 작품을 꿰뚫어 그 너머를 바라보고,
"활활 타오르는 메시지"ㅡ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ㅡ 를 해독하는데 있다." (p134)

그간 내가 써온 리뷰는 거의 언제나 재미있다, 재미없다라는 작품에 대한 나의 기호로 쓰여질 때가 많았다. 그것이 내가 책을 읽는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고 리뷰를 쓰기도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런 분류를 하지 않으려 한다.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이 유럽 일대를 종횡무진하며 업적을 쌓고 승리하고 다투어 물러나고 강탈하고 찬탈당하고 쇠퇴하여 끝끝내 문을 닫는 그 장구한 역사의 축약이 내 속에서 단순하게 재미있다 없다로 구분되지도 않을 뿐더러 있는 힘껏 열과 성을 다한 지금의 읽기에 별을 매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내 노력이 가상해서 ㅎㅎㅎ 완독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책에 대한 애정이 솟는 대단히 전투적이었던 독서를 끝마친다. 작가 G.F.영의 활활 타오르는 메시지를 다 꿰뚫어 볼 능력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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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로 읽는 세상
김일선 지음 / 김영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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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를 위시로 한 과학책들이 많이 나와 요즘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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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쓰여 있었다 - 어렸을 적이라는 말은 아직 쓰고 싶지 않아, 일기에는…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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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일기장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p86)

"뭔데 하고 싶은 말이."
"나, 너를 계속 좋아했어."
끝없이 이어지는, 자기 좋을 대로의 일방적인 대화들....
처분하는 수밖에 도저히 다른 선택지는 없어 보였다.

독립하여 이사나올 적에 대대적으로 방을 뒤집어 엎으며 갖은 잡동사니를 없애버렸다. 주택이라 집에 20 리터 쓰레기 봉투를 묶음으로 상비했는데도 또!! 봉투가 부족해 마트로 달려가는 등 뒤로 식구 중 누군가가 50 리터 묶음으로 사오라고 소리치던 것이 잊히지를 않는다. 한 집에서 이십여 년을 살며 쌓아온 유년의 추억들이 한순간에 치워버려야 할 쓰레기로 전락한 때였는데 그 때의 기억은 또다시 후련한 추억으로 남았으니 추억이란 놈의 아이러니함이란;;; 게중엔 막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 쓴 일기와 마찬가지로 막 대학생이 되어 기숙사에 들어갔을 즈음의 일기도 있었는데 첫 알바 때와 첫 취직 때도 다이어리를 쓰다 말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도 뭔가 습관 같은 것일까. 노트의 절반을 채우기도 전에 멈춤한 일기들. 그 자체로도 누더기 같은 면모였지만 감수성 폭주하던 시절의 흔적들은 뜨악하다 못해 처참할 지경이라 누가 볼새라 얼른 찢어 버렸다. 어느 한 부분쯤 귀여운 면모가 있지 않았겠는가 싶기도 한데 꼼꼼히 자세히 읽을 요량도 없었지만 꿈에 나올까봐 무서워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마스마 미리의 말처럼 "처분하는 수밖에 도저히 다른 선택지는 없어 보였다(p86)". 상자에 고이 모셔두고 여전히 버리지 못한 것은 고딩 시절의 일기뿐으로 이것도 거의 공포소설 급이지만 누가 본다고 죽고 싶을 정도의 수치는 아닌데다 (앞서의 것들은 수치사가 가능하다ㅠㅠ) 한 권 한 권이 꽉 차게 완료되어 뿌듯하고 흐뭇해 도무지 버릴 수가 없었다. 한두권쯤은 아마 뒤에 빈종이가 몇 장 있었을텐데 노트를 다 쓴 것처럼 보이려고 티 안나게 뜯어냈다. 아무도 내 일기를 안보는데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이런 짓을 한 것일까? 모를 일이다. 하여튼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런 것을 썼던 때가. 그런 때를 생각나게 해주는 책을 만나고 보니 나도 작가와 함께 그 시절을 참 잘 버렸다 싶다. 너무 볼품없는 추억이기도 하고 추억보단 공간의 값어치가 더 큰 탓도 있어서 이고지고 살고 싶지 않기도 하고. 뭣보다 어떻게 쓰여 있는지 안궁금해, 안궁금하다고! 그냥 그런 때도 있었지.. 하고 머릿속에만 남겨두는 편이 나의 장수를 돕는 일이다. 오래 살 것을 생각하다니, 정말로 어른 다되었지 않나? ㅎㅎㅎ 

사족이 길었는데 ( 마스다 미리의 작품을 만나면 유독 번외의 말이 많아진다. 쓰잘데기 없이. 에잉;) 그녀의 이번 신간 에세이 <그렇게 쓰여 있었다>도 지금까지의 작품들과 비슷비슷한 느낌이다. 한가롭고 수다스럽고 친근하다. 대신 유년의 에피소드가 전편들 보다는 몇 개쯤 더 들어있는 정도? 라고 말하려고 보니 비교대상이 마땅치 않네. 내가 이제까지 읽어왔던 건 그녀의 만화들이라. 어쨌든 좋다. 그냥 내 일상 같고 그대 일상 같고 하여서. 그런 점이 참 좋아서 그녀의 다른 책들과 비슷할 줄 알면서도 읽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가족과 친구와 편집실 사람들과의 하루, 여행, 대화, 목표, 과거의 어느 날들과 무엇보다 달콤한 디저트들이 함께 하는 충만한 40대 미스의 삶의 기쁨들에 공감공감. 책 한 권에 나의 공감을 일백개쯤 찍고 보니 분홍색 띠지가 그대로 하트 같아 보인다. 작가의 모습이 곧 다가올 내 중년과 한참 후에 다시 그리워 할 내 젊은 날과 비슷하기를 바래본다. 그래서 4, 50대의 내 일상에도 매일 좋아요를 찍을 수 있기를. 어른의 나날들에 그래도 가끔은 수치사하고픈 정열의 흔적 또한 남길 수 있기를. 하트 콕콕의 기쁨을 먼 미래까지 예약하며 오늘 독서의 마침표를 찍는다. 내내 행복하세요 마스다 미리~♡

있잖아, 우리 다음에...

"이 근처에 맛있는 포르투칼 요리 레스토랑이 있는데."
"보고 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빗속을 뚫고 굳이 그 식당을 찾아가 명함을 받아온다.
"있잖아. 우리 다음에는 예약하고 오자."
이렇게 날마다 계속해서 쌓여가는 '있잖아, 우리 다음에......"
쌓인 것을 다 쓰지 못한 채 우리의 인생은 끝나겠지만, 그래도 쌓을 수 있을 만큼 쌓아두고 싶다.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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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일본환상문학선집 1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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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을 만났을 때 천마총 천마도 같은 표지다 생각했어요. 신간인데도 어느 무덤 안에서 긴 긴 시간 파묻혀 자리를 지키며 녹슬고 바스라졌던 유물이 제 손에 들어온 느낌이었거든요. 일본에서만도 1600만부 넘게 책이 팔린 유명 작가이지만 제게는 문학상으로 더 가깝게 각인된 분인데다 굉장히 옛날옛날 사람 같은 느낌이 있어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알고 보니 우리나라 을미사변 딱 일 년 전에 태어난 작가시더군요. 1894년생. 생각했던만큼의 고대(?) 사람은 아니어서 실망했지만 책이 주는 느낌만큼은 처음과 다르지 않아 유물을 안고서 꼭 누군가의 무덤을 유람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다수 주인공들이 죽거나 미치거나 해서요. 제 무덤 파는 남자들을 관조하는 환상소설로 간만에 으슬으슬한 밤이었어요. 아, 참고로 이번 에도가와 란포 선집엔 추리, 미스터리 등의 초기 작품은 실려있지 않습니다. 작가가 환상문학에 심취하셨을 때 작성된 단편들의 모음집이라 자기 욕망에 충실한 남자들의 공포 우화 같은 느낌이 더 컸어요. 아래 6편의 단편을 짧게 소개해 봅니다.

1. 압화와 여행하는 남자

압화 속 미모의 여성에게 반한 청년이 망원경으로 마법을 발휘하여 그 압화 속으로 들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망원경을 거꾸로 보았더니 형이 작아지며 휘리릭 사라졌다? 부모조차 믿지 못할 이야기를 가슴에 안고 형이 생생이 살아있는 압화를 구입해 평생을 책임졌을 동생의 모습이 안타까웠어요. 처음부터 그림이었던 여성과 달리 어찌됐든 인간이라 홀로 늙어가는 형을 위로하고자 압화를 들고 여행하는 동생의 우애 앞에선 할 말을 잃기도 했습니다만 그런 애정도 있는거겠죠? (압화가 뭔지 몰라 검색해 봤는데요. 우리말로 하면 누름꽃이라는데 꽃을 말려 붙인 예술품을 이르는 말이었더군요. 작품 속의 압화는 이것과는 달라서 그림 속의 남녀가 압화세공으로 튀어나와 있는 것을 그냥 압화라고 했나봅니다.)  

2. 메라 박사의 이상한 범죄

귀신 들린 집마냥 자꾸만 자꾸만 누군가가 자살하는 집이 있습니다. 다른 밤엔 다 괜찮다가 만월의 달빛이 짙은 밤에만 일어나는 자살들. 똑같은 느낌의 쌍둥이 건물과 마치 거울인양 은빛으로 세계를 물들이는 달과 메라 박사가 구입한 양복의 비밀은? 약간의 추리와 달밤의 환상이 뒤섞인 재미나고도 기괴한 이야기입니다.

3. 파노라마 섬 기담

쌍둥이 같이 닮았던 동창생. 그러나 입장은 전혀 달라 한쪽은 거대 유산을 물려받은 도련님이고 한쪽은 실패한 작가로 가난뱅이입니다.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 이야기를 닮았습니다. 약간의 차이점이라면 도령이 이미 죽은 상태에서 바꿔치기 된다는 것과 거지가 왕자의 재산을 아주 아낌없이 펑펑 써재낀다는 건데요. 주지육림을  연못과 숲 정도가 아니라 해저터널과 섬 단위로 펼쳐보이며 본인이 꿈꾸던 파라다이스를 이룩한 남자의 욕망이 징그럽게 꿈틀댑니다. 

4. 일인이역

바람둥이인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남편은 아내에게 내연남을 만들어 줍니다. 그 내연남의 정체는 콧수염을 붙인 바로 그 자신이었는데요. 정숙한 여자인줄로만 알았던 아내가 다른 자신에게 반하는 모습에 질투심을 느끼는 남편, 다른 자신에게 반한 아내의 정열에 사랑을 느끼는 남편, 콧수염 하나 붙이고서 아내와의 첫사랑에 홀랑 빠져버린 이 남자의 선택은? 6편의 단편 중 유일하게 사랑스럽다고 말할 만한 이야기였습니다. 유일한 해피엔딩이기도 했구요. 그래서일까요. 남편도 아내도 그저 귀엽네요~♡ 

5. 목마는 돈다.

첫째 딸이 12살인데 그보다 6살이 많은 18살 처녀애에게 반해 버린 남자.
그리고 그 처녀가 갖고 싶어하는 값비싼 스카프 한장.
남자의 손에 들어온 소매치기 당한 돈봉투.
집에는 늙은 아내와 밥 짓는 딸과 세살배기 코흘리개가 기다리고 있고
눈 앞에는 복숭가 같이 탐스러운 아가씨가 웃고 있으니 욕망과 죄책감 사이에서 목마는 돌고 돌 밖에요.

6. 거울 지옥

대망의 6편, 마지막 단편은 단편 안에서도 유독 짧고 유독 기괴합니다.
유리에 집착한 남자가 자신이 설계한 유리공 안에서 미쳐가는 이야기거든요.
돈 많은 집돌이가 세상과 담 쌓고 유리 덕질을 하다 인생 파멸하는 글을 보고 나니 많이 반성이 됩니다.
나도 좀 나가 놀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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