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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ㅣ 일본환상문학선집 1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처음 책을 만났을 때 천마총 천마도 같은 표지다 생각했어요. 신간인데도 어느 무덤 안에서 긴 긴 시간 파묻혀 자리를 지키며 녹슬고 바스라졌던 유물이 제 손에 들어온 느낌이었거든요. 일본에서만도 1600만부 넘게 책이 팔린 유명 작가이지만 제게는 문학상으로 더 가깝게 각인된 분인데다 굉장히 옛날옛날 사람 같은 느낌이 있어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알고 보니 우리나라 을미사변 딱 일 년 전에 태어난 작가시더군요. 1894년생. 생각했던만큼의 고대(?) 사람은 아니어서 실망했지만 책이 주는 느낌만큼은 처음과 다르지 않아 유물을 안고서 꼭 누군가의 무덤을 유람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다수 주인공들이 죽거나 미치거나 해서요. 제 무덤 파는 남자들을 관조하는 환상소설로 간만에 으슬으슬한 밤이었어요. 아, 참고로 이번 에도가와 란포 선집엔 추리, 미스터리 등의 초기 작품은 실려있지 않습니다. 작가가 환상문학에 심취하셨을 때 작성된 단편들의 모음집이라 자기 욕망에 충실한 남자들의 공포 우화 같은 느낌이 더 컸어요. 아래 6편의 단편을 짧게 소개해 봅니다.
1. 압화와 여행하는 남자
압화 속 미모의 여성에게 반한 청년이 망원경으로 마법을 발휘하여 그 압화 속으로 들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망원경을 거꾸로 보았더니 형이 작아지며 휘리릭 사라졌다? 부모조차 믿지 못할 이야기를 가슴에 안고 형이 생생이 살아있는 압화를 구입해 평생을 책임졌을 동생의 모습이 안타까웠어요. 처음부터 그림이었던 여성과 달리 어찌됐든 인간이라 홀로 늙어가는 형을 위로하고자 압화를 들고 여행하는 동생의 우애 앞에선 할 말을 잃기도 했습니다만 그런 애정도 있는거겠죠? (압화가 뭔지 몰라 검색해 봤는데요. 우리말로 하면 누름꽃이라는데 꽃을 말려 붙인 예술품을 이르는 말이었더군요. 작품 속의 압화는 이것과는 달라서 그림 속의 남녀가 압화세공으로 튀어나와 있는 것을 그냥 압화라고 했나봅니다.)
2. 메라 박사의 이상한 범죄
귀신 들린 집마냥 자꾸만 자꾸만 누군가가 자살하는 집이 있습니다. 다른 밤엔 다 괜찮다가 만월의 달빛이 짙은 밤에만 일어나는 자살들. 똑같은 느낌의 쌍둥이 건물과 마치 거울인양 은빛으로 세계를 물들이는 달과 메라 박사가 구입한 양복의 비밀은? 약간의 추리와 달밤의 환상이 뒤섞인 재미나고도 기괴한 이야기입니다.
3. 파노라마 섬 기담
쌍둥이 같이 닮았던 동창생. 그러나 입장은 전혀 달라 한쪽은 거대 유산을 물려받은 도련님이고 한쪽은 실패한 작가로 가난뱅이입니다.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 이야기를 닮았습니다. 약간의 차이점이라면 도령이 이미 죽은 상태에서 바꿔치기 된다는 것과 거지가 왕자의 재산을 아주 아낌없이 펑펑 써재낀다는 건데요. 주지육림을 연못과 숲 정도가 아니라 해저터널과 섬 단위로 펼쳐보이며 본인이 꿈꾸던 파라다이스를 이룩한 남자의 욕망이 징그럽게 꿈틀댑니다.
4. 일인이역
바람둥이인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남편은 아내에게 내연남을 만들어 줍니다. 그 내연남의 정체는 콧수염을 붙인 바로 그 자신이었는데요. 정숙한 여자인줄로만 알았던 아내가 다른 자신에게 반하는 모습에 질투심을 느끼는 남편, 다른 자신에게 반한 아내의 정열에 사랑을 느끼는 남편, 콧수염 하나 붙이고서 아내와의 첫사랑에 홀랑 빠져버린 이 남자의 선택은? 6편의 단편 중 유일하게 사랑스럽다고 말할 만한 이야기였습니다. 유일한 해피엔딩이기도 했구요. 그래서일까요. 남편도 아내도 그저 귀엽네요~♡
5. 목마는 돈다.
첫째 딸이 12살인데 그보다 6살이 많은 18살 처녀애에게 반해 버린 남자.
그리고 그 처녀가 갖고 싶어하는 값비싼 스카프 한장.
남자의 손에 들어온 소매치기 당한 돈봉투.
집에는 늙은 아내와 밥 짓는 딸과 세살배기 코흘리개가 기다리고 있고
눈 앞에는 복숭가 같이 탐스러운 아가씨가 웃고 있으니 욕망과 죄책감 사이에서 목마는 돌고 돌 밖에요.
6. 거울 지옥
대망의 6편, 마지막 단편은 단편 안에서도 유독 짧고 유독 기괴합니다.
유리에 집착한 남자가 자신이 설계한 유리공 안에서 미쳐가는 이야기거든요.
돈 많은 집돌이가 세상과 담 쌓고 유리 덕질을 하다 인생 파멸하는 글을 보고 나니 많이 반성이 됩니다.
나도 좀 나가 놀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