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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들린 목소리들
스티븐 밀하우저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9월
평점 :
나는 어려서부터 신비로운 이야기를 좋아했다. 환상적이고 비밀스럽고 허공에 붕 뜬 저너머의 세상. 그러나 틀림없이 인간 에너지가 담뿍 담겨있는 그런 이야기들. 귀신, 유령, 부적, 도깨비, 고대무속신앙 등이 등장하는 심령소설이나 좀비 등 괴생물체가 등장하는 생존물, 지구 밖으로 떠나는 과학 SF까지 좋아지더니 근래엔 그저 현세의 것이 아닌 듯한 초자연적임만 묻어나도 다 좋다. 밤에 들린 목소리들에 등장하는 열여섯 편의 단편에도 초현실의 비밀스런 매력이 자박자박 깔려있다. 차분하고 으스스해서 나도 모르게 어깨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바람 같은 마력에 탑승해 스티븐 밀하우저의 시야에 잡힌 비일상의 미스터리를 엿본다.
1. 기적의 광택제
"실은 나는 실망강에 짓눌린 남자였다. 한때 꿈꾸었던 대로 삶이 풀리지 않은 남자였다.
자신의 삶에 신중한, 솔직히 말하자면 소심한, 조용한 남자였다." (p25)
거울은 오로지 출근할 때 한번 정도 보게 되는 생활용품일 뿐, 삶에 찌들은 제 모습을 보기 싫어하는 이 남자의 앞에 의문의 외판원이 등장한다. 기적의 광택제, 녹슨 물 같은 끈적끈적한 액체가 거울에 닿는 순간 세상이 달라졌다. 슬픔도 피로도 좌절도 모두 녹여놓는 거울, 거울 밖의 나보다 더 생생한 거울 속의 나. 남자의 세상에 하나 둘 늘어나는 거울들. 이대로 괜찮은걸까?
2. 유령
"다람쥐나 민들레만큼이나 익숙한 존재." (p44)
유령이 사는 마을에 살면서 보고서를 작성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유령은 보고서를 읽고 뭐라고 말할까?
3. 아들과 어머니
긴 시간을 돌아 어머니를 찾아온 아들. 모자의 서먹한 시간 속 땅거미 지는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는데...
어머니는 과연 아들이 가져다 준 평안함에 만족했을까?
4. 인어열풍
해변으로 실려온 아름다운 인어 시체 한 구, 그녀가 박제되어 협회에 전시되면서 마을 사랑들의 마음에 퇴폐적인 열풍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가슴을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하반신을 비늘옷으로 덮은 인어패션에서 시작해 자신의 두 다리를 접붙이는 수술로. 다시 인어의 고향으로 가겠다며 바다에 빠져죽는 이들까지. 기형의 욕망은 어디로부터 기원해 어디까지 나아가게 될까?
5. 아내와 도둑
한밤중에 들려온 아래층의 발소리. 도둑일까? 도둑이겠지? 홀로 잠에서 깨어난 아내는 두려움에 빠진다. 그리고 딱 그만큼 확신하고 싶다. 남편을 깨웠는데 도둑이 아니면 어쩌지? 경찰을 불렀는데 도둑이 아니라 온동네에 신경증 환자로 망신을 당하면 어쩌지? 아내는 조심조심 발소리를 죽이고 홀로 계단을 내려가 본다. 도둑인지 아닌지 내 눈으로 목격한 후 뭘해도 하겠다는거다. 그렇게 1층에 당도한 아내는 과연 무사할 수 있었을까?
6. 우리의 최근 문제에 대한 보고서
어느 마을에 불어닥친 자살 놀이. 어른, 청소년, 아이 할 것 없이 "역동적인 게임으로서의 죽음, 도전으로서의 죽음, 흥미로운 예술 형식으로서의 죽음, 독창성의 표현으로서의 죽음(p156)"에 뛰어든다. 이토록이나 평화롭고 아름답고 찬란하고 안전한 마을에서 도대체 왜?
7. 근일 개업
긴 여행 후 돌아온 내 집이 내 집이 아닌 것 같다.
시간여행? 공간이동? 그도 아님 스티븐 밀하우저 식 장자의 꿈, 한여름의 백일몽일지도.
2차선 도로 아래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출구로 질주해 간 로빈슨은 어느 곳에라도 도착할 수 있었을까?
8. 라푼젤
"그녀가 간파한 게 또 하나 있다. 그녀가 왕자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이다. 그건 좋은 일이다.
그녀는 다시 웃을 것이고, 머리카락을 기를 것이고, 즐겁게 놀 것이다." (p224)
동화의 낭만은 사라지고 시커먼 어둠과 피곤과 현실만이 남은 라푼젤의 세상.
왕자는 마녀와의 싸움 끝에 청춘의 도전과 젊음을 상실했고 라푼젤에겐...... 그녀에겐 장차 무엇이 남게 될 것인가?
9. 어딘가 다른 곳에
"오래전, 황혼 녘에 두 팔을 활짝 편 채 거리를 쏘다녔던 시간에 대한, 다른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p248)
일상이 환상으로 활짝 펼쳐지는 시간, 독서와 다름 아닌가?
10. 열세 명의 아내
"왜 아내를 열세 명이나 두었어?"
"오, 좋은 것은 아무리 많아도 괜찮잖아!" (p251
나만 혼자 지옥에 빠질 수 없다. 다 속아 넘어가랏!! 이런 건가?
이 남자가 사는 집에 손님이라도 방문하면 아내를 소개하는 시간만으로도 하루가 다 저물지 않을까?
11. 아르카디아
"평화가 저를 향해 흘러오고 있습니다. 저는 그곳을 향해 걷기만 하면 됩니다." (p292)
6미터 이상 늪지, 해먹에서 멀지 않은 돌우물, 북서쪽의 높은 탑, 가지가 튼튼한 나무들, 고풍스러운 끈상자, 예리한 독일제 스테인리스 칼 세트, 누구도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깊은 협곡. 야생의 자연 속으로 이끄는 샛길들이 구비되어 있는 곳. 고통받고 있는 자여, 평화를 원하는 자여, 해방의 길은 단 하나 뿐입니다, 아르카디아로 오세요 라고 말하는 광고글이 이토록 슬플 줄이야. 누군가는 희망을 질병이라 말한다. 내 희망은 영원히 불치병으로 남을 수 있을까?ㅠㅠㅠㅠㅠㅠ
12. 젊은 가우타마의 쾌락과 고통
"나는 사람이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다. 나는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p312)
가우타마가 석가모니였다. 가우타마 싯다르타. 왕으로부터 인간사 받을 수 있는 모든 쾌락을 물려받은 왕자는 어째서 행복하지 않은가?
13. 플레이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굴처럼 환상과 현실을 잇는 세계가 바로 내 집 뒤편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면 나는 과연 그 세계에 발 들이지 않고 오롯이 현실에 안주할 수 있을까?
14.홈런
9회 말 투아웃, 동정상황. 매클러스키 선수의 끝내기 홈런이 장외를 넘어 하늘로 솟구쳐 성층권을 뚫고 우주로 날아간다. 달, 화성, 소행성을 지나 목성, 토성, 천왕성, 그리고 은하수, 더하여 계속. 관중들은 야구장을 빠져나가고 청소부들이 장내를 청소 중이고, 매클러스키는 어느 새 그 팀의 코치가 됐는데 아나운서는 슈퍼맨이 되어 날아간 공을 언제까지 중계하려는건가? 작가 진심 미친 듯 ㅋㅋㅋㅋ
15.미국의 설화
"일해야지!"(p417)
도끼질 한방에 4헥타르의 삼림을 절단내는 힘센 일꾼, 남들이 세상 모르고 잘 때도 일하는 그는 성실한 폴 버니언이다.
"꿈을 꾸고 있어. 꿈을 꾸고 있을 뿐이야."(p421)
하품하는데만도 엿새가 걸리고 콩 한쪽도 일곱개로 나누어 칠일을 먹는 게으름뱅이 책쟁이 그는 몽상가 제임스 버니언이다.
그리고 이 두 형제가 어느 날 자존심을 건 잠자기 시합을 시작하는데 과연 승리는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환상도 진지한 얘기로만 쓰는 작가인가 했는데 연타로 계속 웃기네?
16. 밤에 들린 목소리
"이보게, 잠 잘 시간이야."(p454)
예순여덟살의 불면증. 그를 불면증에 빠트린 것은 어린 시절에 만난 책 속의 이야기였다. 구약성서와 사무엘과 그를 부른 하나님. 사무엘과 같이 밤에 들린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스트랫퍼드의 어린 아이는 기대를 배신 당하고 신이 아니라 책장의 세계로 눈을 돌린다. 뮤즈를 받드는 작가가 되어 소설을 쓴다. 스티븐 밀하우저, 오늘 밤은 부디 좋은 꿈 꾸시기를요.
"잠의 시간은 끝났다."(p367) 책과 함께 나의 주말도 평화롭게 끝이 났다. 오늘이 금요일 밤이면 얼마나 더 행복했을까. 아직 못읽은 책이 한가득인데ㅠㅠ 밤에 들린 목소리들을 통과해 사차원에 묻힌 시간들을 끌어다 쓸 수 있다면 이 밤을 모쪼록 길게 늘려놓고만 싶다. 그게 안된다면 폴 버니언처럼 "더 잘 자고 더 깊이 자고 더 많이 잘 수 있도록" 일찍 잠자리에나 들어야지. 모쪼록 굿나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