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의 맛은 사람 사이에 있다 - 혀끝으로 만나는 중국의 음식과 인생 이야기
천샤오칭 지음, 박주은 옮김 / 컴인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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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으로 만나는 중국의 음식과 인생 이야기"라는 표제에 끌렸다. 다큐 <혀끝으로 만나는 중국>은 보지 못했지만 KBS1에서 방영해줬던 이욱정 PD의 <요리인류>를 인상 깊게 봤던지라 비슷한 느낌의 다큐 제작자라는 것도 호기심의 한 몫을 차지했고. 책 속에는 글로만 상상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감의 다양한 음식들이 등장하지만 지루하지는 않다. 오히려 모르는 맛들로 더욱 재미나다. 이유가 뭘까? 

1. 중국스러운 과대과장묘사

"그의 손에 들려진 청무에서는 백옥처럼 빛나는 반투명의 육질 사이로 맑고 신선한 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p79)"라는 무즙 하나도 그저 흐르게 하지 않는 각종 비유들. "누룽지(진주), 배추겉대와 시금치 잎(비취), 삭힌 두부(백옥)이 들어간 요리(p65)"라 하여 음식에 붙인 진주비취백옥탕 등 너무나 어마어머한 명칭들이음을 자아낸다. "내 긴 칼을 품고 찾아왔으나 고기반찬은 통 볼 수가 없구나(p189)" 처럼 여기가 21세기 중국인지 무협지 속 강호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대화들은 또 어떻고. 시종일관 만화 같기만 한 요리와 그 맛과 대화와 상황들을 보고 있노라면 분명 쏘갈치찜을 읽는 중인데도 머릿속에는 주성치가 등장하는 코믹무협 한 편이 흘러가는 것이다. 이런 기이한 체험은 일찍히 츠쯔첸의 <뭇 산들의 꼭대기>에서도 경험한 바 일부 중국 작가들의 과장스럽고 허구적인 비유들이 내게는 신묘한 힘을 발휘하여 상상력을 더욱 북돋는 것 같다.

2. 1965년생 작가가 바라본 음식 속에 담긴 격변하는 중국의 이야기

돼지고기를 끓이는 날이면 떨어져나온 비계덩이를 설탕에 굴려먹고 우리가 김장김치를 담듯이 달걀과 오리알을 염장해 겨우내 반찬 삼아 먹었다는 가난했던 일상, 돌아서면 배고프던 대학 시절 조명판에 끓여먹던 라면과 선배를 따라다니며 얻어 먹은 밥 한 그릇, 민영공장과 상점을 공사합영으로 전환시켜 빠오두 장인을 공장 노동자로 전락시킨 중국의 정책이 엊그제 같은데 21세기 중국은 풍요로운 먹거리 속에 프렌차이즈가 성행하고 짜고 기름기 넘치는 음식은 건강에 나쁘다며 저어하는 세상이 되었다. 깨끗한 거리 조성사업으로 사라지는 좌판들, 프랜차이즈의 성행과 단일화 되는 지역민들의 입맛, 사라지는 향토 음식, 훠궈마저 일인식화 시키는 청결에 대한 강박, 샤오얼(중국식당의 점원)을 아가씨라 부르는 것이 어색해져버린 호칭 등의 문제가 어딘지 익숙해 국경 너머에서도 흥미와 진한 향수를 느끼게 된다.  

3. 사람 사이의 맛

어린왕자와 여우도 아니건만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으면 "한두 시간 전에 혼자 훠궈 전문점에 가서 양념이 진한 훠궈의 신선로를 익히기 시작... 천천히 불을 데우며 '그 사람을' 기다리라(p267)"는 중국 미식가의 대인배적 풍모가 감탄스럽다. '배우자는 남의 배우자가 더 잘나 보일지 몰라도 양고기만은 무조건 내 지역 양고기가 최고(p201)"인 향토음식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중국인들의 아웅다웅한 다툼도 재미나고 어린 아들과 함께 하는 천샤오핑의 미식기행도 오손도손 정답다. 어디 입으로 보는 것만 맛이던가. 눈으로 읽으며 삼키는 문화의 맛, 국적은 달라도 도무지 모를 수가 없는 사람 사이의 맛이 더욱 쏠쏠할 수 있음을 이 책으로 하여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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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와 마녀의 꽃
메리 스튜어트 지음, 김영선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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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메리 스미스.
아주아주 평범한 열 살짜리 꼬마 숙녀입니다.
수줍음이 많은 이 소녀는 방학을 수 이모네에서 보낼 생각으로 두근두근 하지만
네 살 사촌 티모시가 독감에 걸리는 바람에 시골에 계신 샬롯 이모 할머니 댁으로 가게 되요.
안그래도 시골인데 거기서 더 외진 곳에 위치한 할머니 댁에 도착하니 메리는 매우 우울해집니다.
함께 놀 친구는 한 명도 없고 주위엔 온통 할머니, 할아버지들 뿐이거든요.
그런 메리의 앞에 등장한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의 검은 고양이 "팁".
팁은 메리를 숲 속으로 인도해 푸른 꽃을 알알이 피우는 "밤비행 꽃"을 꺾게 하고
메리의 체구에 꽃 맞는 빗자루를 만나게 해요.
밤비행 꽃의 즙이 담뿍 묻은 메리의 손이 빗자루에 닿는 순간
소녀의 눈 앞에는 상상도 못한 마법의 세계가 펼쳐지게 되죠. 

스튜디오 포녹의 애니메이션 <메리와 마녀의 꽃>의 원작 소설입니다.
책 속에 애니메이션의 콘티 스케치 30여컷도 포함되어 읽는 재미가 더욱 컸지 않나 싶어요.
칼라화된 애니메이션 보다 흑백 삽화가 더욱 지브리스럽더라구요.
말괄량이 빗자루와 비밀을 간직한 사역마 팁, 무시무시한 분위기의 마법 대학과 음흉스런 교수들,
용감한 소년 피터와의 만남으로 성장하는 메리의 하룻밤 모험담이 간질간질 합니다.
특히나 비행씬이 이 책의 정수라 할 수 있었는데요.
메리가 처음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으는 장면, 그리고 야간비행 속 교수들과의 추격전이
너무나 근사해서 그 부분만 두 번 세 번 돌아가 다시 볼만큼 멋졌습니다.
비행기 하나로 오대양 육대주를 며칠이면 횡단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빗자루 비행은 언제나 환상적인 감성과 동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
메리와 마녀의 꽃으로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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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체이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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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많이 내리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그걸 즐기지 않으면 손해겠지요.
즐길 수 있는 소설을 쓰지 않는다면 그것도 아깝지요.
그래서 이 소설을 썼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우연에 우연에 또다른 우연을 더하니 살인 용의자가 되어버리더라 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용의자의 이름은 와키사카 다쓰미. 가이게이 대학교에 재학 중이며 열혈 스포츠 맨으로 그 중에서도 스노보드에 환장하는 밝고 활기차고 지나치게 긍정적인 멍뭉이 같은 사내... 라기보다는 어린애입니다. 그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알바로 산책시키던 노견 페로가 자전거에 치였고 미안한 마음에 알바하던 집을 방문한 것이 화근이었어요. 아무도 없는 것이 확인됐을 때 그냥 왔어야 하는 걸 페로만 보고 가자 하며 무단침입한 이것이 1차 우연입니다. 집주인인 후쿠마루 노인이 알려준 가족 밖에 모르는 열쇠가 아직도 있을까란 호기심에 열쇠를 집어보고 제자리로 돌려놓은 것이 2차 우연이었구요. 페로의 산책줄을 추억이라며 가져온 것이 3차 우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우연의 합으로 후쿠마루 노인이 살해됐을 때 경찰은 다쓰미를 가장 유력한 살해용의자로 지목해 버리죠. 친구 나미카와의 집에서 맥주를 마시다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다쓰미는 아무 생각없이 경찰에 가서 무죄를 알리겠다 하지만 경찰서에 들어가는 순간 지옥 같은 조사 레이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을 너무나 잘 아는 법학부 나미카와는 그전에 다쓰미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스키장의 여신을 찾아야 한다며 다쓰미와 함께 사토자와 온천 스키장으로 향합니다. 같은 시각, 관할서 형사 고스기는 본청에 경쟁심을 불태우는 난바라 계장 때문에 다른 경창 딱 한 명만! 살인용의자를 추적하는데 딱 한 명!!의 부하직원을 데리고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스키장으로 가는 피곤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경찰에 쫓기는 와중에도 스노보드 타고 싶다 따위의 생각이나 하고 있는 헐랭한 성격의 다쓰미와 그를 채찍질 하여 어떻게든 알리바이의 증거 사진을 쥐고 있는 스노보드 여신을 찾으려 애쓰는 의리만땅 똘똘이 나미카와, 안되면 되게 하라 외치는 계장 때문에 하루하루가 피곤한 경찰이기 이전에 그냥 참 불쌍한 직장인이었던 고스기 등의 쫓고 쫓기는 눈 속의 추격기! 미스터리나 추리, 스릴러적 성격이 그리 강하진 않습니다. 상당히 평범한 주인공들의 꽤나 안일한 도망과 어찌 보면 평이할 수도 있는 추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재밌다는 것이 함정이랄까요. 특히나 고스기에 감정을 이입해 고스기 불쌍한 녀석, 계장놈 두들겨 패주고 싶다 등의 생각을 하면서 읽다 보니 어느 새 끝이라 아쉬움에 입맛을 쩍쩍 다셨습니다. 이번 눈보라 체이스는 페이지마다 겨울산의 압축된 맑은 공기가 뿜어져나오는 듯이 밝고 명랑하고 무엇보다 활기차서 좋아요. 연휴와 연말에 딱 어울리는 책이랄까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설산 시리즈가 그렇게 재미나다니, 무엇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네즈와 치아키의 전 이야기가 궁금해서 <백은의 잭> <질풍론도>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멋진 책 감사해요 히가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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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루티드
나오미 노빅 지음, 오정아 옮김 / 노블마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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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나는 많은 마녀와 알고 지냈다. 마법당에서 무지개빛 미소를 판매했던 12살 마녀 민트, 도로시에 깔려 죽은 동쪽 마녀와 뽀글뽀글 녹아내린 서쪽 마녀, 검은 고양이 지지와 함께 빵집에서 하숙하던 키키, 꽃미남 마법사 하울에게 마음을 돌려주며 별빛 같은 젊음을 회복했던 소피, 똘똘이 스머프 같았던 헤르미온느, 갖가지 변신도구로 세일러문 이후 거의 처음 내 지갑을 위협했던 오자마녀 도레미, 별빛으로 주운 아기를 젖 먹여 입양 보내던 할머니 마녀 잰, 잰의 가장 사랑스러운 달빛 소녀 루나까지. 그리고 마녀 세계사의 한 페이지에 당당히 입성하게 된 새로운 마녀가 나타났으니 그녀의 이름은 아그니에슈카! 테메레르의 작가 나오미 노빅을 방문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알린 우드의 신삥 마녀이다. 어딘지 도로시의 은색구두를 닮은 어린 소녀가 하루아침에 마녀가 된 이야기 <업루티드>를 만나보자.

불의 마법사인 드래곤 영주가 방어하는 불가사의한 숲 "우드". 매우 정직한 지명을 지닌 이 숲은 현대식으로 보자면 사이코패스 양산소이다. 우드의 것을 먹거나 우드의 바람에 실려온 씨앗이나 꽃가루 등에 노출되면 또는 우드의 몬스터들에게 납치되어 숲에 끌려갔다 요행히 살아 돌아오게 되면 착하고 선량했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무감정한 지능형 몬스터가 되어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와 이웃들을 도륙한다. 활기찬 전염성을 가지고 암처럼 공격적인 우드의 숲은 매해 영역을 확장하려 하는데 그로부터 최전선 방어벽을 구축하는 것이 영지의 수호자 살칸의 임무였다. 때문에 그가 드래곤의 해에 태어난 아가씨들 중 한 명을 십 년에 한번씩 공물로 받아가도 영지민들은 반발하기는커녕 축제를 벌이며 영주를 반긴다. 아그니에슈카는 그런 우드 너머 골짜기에서 살고 있는 소녀로 드래곤의 해에 태어난 몇 안되는 소녀들 중의 한 명이었다. 매우 아름답거나 지적이거나 담대했던 이전의 드래곤 소녀들에 비추어 니에슈카는 지나치게 왈가닥에 말썽꾸러기인지라 그녀도 가족도 평범한 미래를 예견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지만 어쩐 일인지 영주는 아그니에슈카를 성으로 데려간다. 드래곤 영주와 지난 백년간 숱하게 바쳐졌던 소녀들과의 관계에 대한 음흉한 소문이 많았기에 니에슈카는 두려움에 갖가지 실수를 저지르지만 정작 영주는 그녀의 몸에 관심이 없다. 그러기는커녕 밥때 외에는 마주치는 일도 없고 잠깐 만나기라도 하면 이상한 주문만을 가르치며 지적 학대를 일삼는다. 백살이 넘은 할아버지지만 늙지 않기에 겉모습만큼은 아그니에슈카와 별 차이 없어보이는 이 산신령스런 마법사는 성에 박혀 사는 히키코모리인데다 인간혐오가 극심하고 성격도 괴팍하며 삶에 대한 정열이 1도 없다. 거기다 노총각, 연애경험 전무, 유부녀 귀족에게 사십년 전 농락당한 것이 첫사랑이자 끝사랑으로 그간의 소녀들과도 내외를 했던 것이 남아있는 다른 소녀의 일기로 증명되었다. 생활 마법도 잘 다뤄서 딱히 시녀도 필요없는 상태. 그러면 대체 드래곤 영주는 왜 소녀들을 성으로 데려갔던 것일까. 그리고 왜 자신에게만 처음으로 이상한 주문들을 암기하게 하는 것일까를 생각도 해보려 하지 않는 니에슈카는 그냥 공부가 너무너무 싫기만 하다. 숲에서 뛰어놀고 열매를 줍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픈 니에슈카와 본인 기준으로 머리가 너무 나쁜 제자로 인해 삶에 회의를 느끼는 스승 살칸의 아웅다웅은 그러나 곧 왕궁에 침입한 우드의 씨앗으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한다. 세계정복의 야심을 가진 새로운 유형의 악당숲 "우드", 우드로부터 살아돌아온 한나 왕비, 우드의 야욕에 일치하는 욕망으로 왕국을 위험에 빠트리는 마렉 왕자, 우드의 위험을 몸소 체험하지 못한 입만 산 수도권의 마법사들과 대적해 아그니에슈카는 친구 카시아와 가족과 영지민들을 지킬 수 있을까? 

으앜, 어쩜 좋아, 넘 좋아, 가슴이 뛴다. 뾰로롱 꼬마마녀를 시작으로 자라는 내내(이제는 늙어가는 중이지만 큼ㅠㅠ) 마녀는 내가 품을 수 있는 가장 환상적인 동심이었다. 주책없는 어른인 탓에 마녀의 등장을 알리는 소설이 등장하면 여전히 환호성을 내지를 정도. 그런 내게 올 하반기는 두 마녀로 인해 더욱 완벽해졌다. 여름 더위가 한창일 적에 등장했던 달빛 마시는 소녀의 루나와 겨울의 초입에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의 마법사 살칸과 함께 등장한 아그니에슈카! 그녀들의 초대 앞에 넋이 빠진다. 가슴 한복판까지 두근두근해지는 근사한 모험, 소녀들의 눈물 겨운 우정, 마법사와 마녀의 전투적인 사랑, 군침 도는 마법 주문들로  반짝이는 마법서 업루티드. 마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올 해 이 책만큼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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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름을 부른다면
김보현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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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현이라는 작가님의 이름처럼 아주 보들보들한 좀비물입니다. 좀비물과 보드레함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아포칼립스의 지옥 유황불이 끌어오르는 것 같은 멸망의 현세는 저만치 큰 대도시로 물러나 여기 한적한 두수리 마을은 좀비 소동에도 평화롭기만 합니다. 버스가 하루에 다섯 번 밖에 오가지 않는 외진 곳, 긴 터널로 바깥 세상과는 거의 단절되어 있는, 마을 사람들을 다하여도 열 명 남짓한, 그마저도 사람을 물 이조차 없는 틀니를 낀 할머니, 할아버지가 좀비가 된 세상에서 호러는 어불성설 종말이 웬말인가요. 부산행, 레지던트 이블, 월드워Z, 28일후, 새벽의 저주, 워킹데드 뭐 이런 거 상상하심 곤란합니다. 구슬땀을 흘리기는 하는데 농번기 일손이 부족한 중에 주인공 혼자 농사 지어야 해서 그런거구요. 배가 고프면 약탈이 아니라 텃밭에서 오이 따고 가지 따고 고추 따고 옥수수 따고 감자 캐고 그러면 되요. 서바이벌은 서바이벌인데 좀비 서바이벌이 아니라 농경 서바이벌입니다 :)

펜싱 소녀 원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닭들에게 모이를 주고요. 엄마 좀비, 감독님 좀비, 사모님 좀비, 치복 할아버지 좀비, 신애순애 자매 할머니 좀비 등을 볕이 잘 드는 곳에 몰아 넣고 서둘러 감자 순을 뜯고 퇴비를 만들고 종자를 뿌리고 밭을 갑니다. 하루종일 할 일이 어찌나 많은지 아무리 부지런을 떨어도 일이 태산같이 쌓이는 곳이 시골인가 봅니다. 그러다 비 오면 좀비 가족들 양떼처럼 이리저리 모아 비 피하게 하우스에 넣어야하죠. 때때로 마을로 나가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 애들 좀비들을 좀 둘러본 뒤 포스트잇을 돈 대신으로 장도 봐야하구요.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와 자글자글 끓인 된장국에 버섯을 넣어 향이 좋은 뜨순 밥 좀 지어먹고 나면 뭐겠어요 밤이지. 잠자면 또 아침입니다. 원나가 외롭고 무섭고 힘들어 하진 않냐구요? 등교길에 이따위 세상 멸망해버려라 하고 저주를 퍼부을 정도로 아픔이 많았던 아이인데 신기하게도 종말의 세계가 현실로 닥치고 나서는 외려 긍정적이고 활기찬 사람이 되어 세상이 무너졌다는 것을 믿지도 않을 테세입니다. 언젠가는 라디오방송에서 떠들듯이 정부가 백신 개발에 성공해 가족들을, 이웃들을 구해줄테니까요. 그때까진 절망도 NO! 눈물도 NO! 강원도 오지에서 6.25가 터진 줄도 몰랐던 웰컴투 동막골의 사람들처럼 오늘도 원기충만하게 두순리 마을을 지키고 있는 원나. 그런 원나의 앞에 등장한 살결이 곱고 뽀얀 서울 머스매 영균과의 첫사랑은 더욱 배꼽을 잡습니다. 원나는 옥수수가 알알이 여물기 전까지 영균을 두순리 마을회관에 발을 묶어놓을 수 있었을까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한 스페인 침략자들과도 같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정화를 위해 두순리를 방문했다는 기독교 집단으로부터 엄마와 마을 어른들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화마로 아버지를 잃고 얼굴과 목에 남은 화상 자욱의 상처로 세상과 등진 채 살아가는 원나, 그런 원나를 어떻게든 세상에 끓어내려는 모친 미라와 의로운 외팔이 펜싱 감독 철종, 열살이 넘는 나이 차와 필리핀이라는 국적 때문에 자주 오해도 사지만 밤마다 벽을 타고 오르며 사랑을 나눴다는 뜨거운 연애사를 안고 철종과 결혼한 원나보다 더 주인공 같던 용감한 철종의 아내 마리아, 데뷔를 앞두고 터져버린 좀비 바이러스로 멤버를 잃고 떠도는 영균이 만들어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따뜻하고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간질간질한 고운 좀비물을 만나보세요. 절정에 다달아 등장하는 개독의 개소리는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두순리의 풍경 속에서 자체 정화 가능한 대한민국식 무공해 청정 좀비물!! 그 기적의 일상을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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