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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름을 부른다면
김보현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2월
평점 :
김보현이라는 작가님의 이름처럼 아주 보들보들한 좀비물입니다. 좀비물과 보드레함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아포칼립스의 지옥 유황불이 끌어오르는 것 같은 멸망의 현세는 저만치 큰 대도시로 물러나 여기 한적한 두수리 마을은 좀비 소동에도 평화롭기만 합니다. 버스가 하루에 다섯 번 밖에 오가지 않는 외진 곳, 긴 터널로 바깥 세상과는 거의 단절되어 있는, 마을 사람들을 다하여도 열 명 남짓한, 그마저도 사람을 물 이조차 없는 틀니를 낀 할머니, 할아버지가 좀비가 된 세상에서 호러는 어불성설 종말이 웬말인가요. 부산행, 레지던트 이블, 월드워Z, 28일후, 새벽의 저주, 워킹데드 뭐 이런 거 상상하심 곤란합니다. 구슬땀을 흘리기는 하는데 농번기 일손이 부족한 중에 주인공 혼자 농사 지어야 해서 그런거구요. 배가 고프면 약탈이 아니라 텃밭에서 오이 따고 가지 따고 고추 따고 옥수수 따고 감자 캐고 그러면 되요. 서바이벌은 서바이벌인데 좀비 서바이벌이 아니라 농경 서바이벌입니다 :)
펜싱 소녀 원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닭들에게 모이를 주고요. 엄마 좀비, 감독님 좀비, 사모님 좀비, 치복 할아버지 좀비, 신애순애 자매 할머니 좀비 등을 볕이 잘 드는 곳에 몰아 넣고 서둘러 감자 순을 뜯고 퇴비를 만들고 종자를 뿌리고 밭을 갑니다. 하루종일 할 일이 어찌나 많은지 아무리 부지런을 떨어도 일이 태산같이 쌓이는 곳이 시골인가 봅니다. 그러다 비 오면 좀비 가족들 양떼처럼 이리저리 모아 비 피하게 하우스에 넣어야하죠. 때때로 마을로 나가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 애들 좀비들을 좀 둘러본 뒤 포스트잇을 돈 대신으로 장도 봐야하구요.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와 자글자글 끓인 된장국에 버섯을 넣어 향이 좋은 뜨순 밥 좀 지어먹고 나면 뭐겠어요 밤이지. 잠자면 또 아침입니다. 원나가 외롭고 무섭고 힘들어 하진 않냐구요? 등교길에 이따위 세상 멸망해버려라 하고 저주를 퍼부을 정도로 아픔이 많았던 아이인데 신기하게도 종말의 세계가 현실로 닥치고 나서는 외려 긍정적이고 활기찬 사람이 되어 세상이 무너졌다는 것을 믿지도 않을 테세입니다. 언젠가는 라디오방송에서 떠들듯이 정부가 백신 개발에 성공해 가족들을, 이웃들을 구해줄테니까요. 그때까진 절망도 NO! 눈물도 NO! 강원도 오지에서 6.25가 터진 줄도 몰랐던 웰컴투 동막골의 사람들처럼 오늘도 원기충만하게 두순리 마을을 지키고 있는 원나. 그런 원나의 앞에 등장한 살결이 곱고 뽀얀 서울 머스매 영균과의 첫사랑은 더욱 배꼽을 잡습니다. 원나는 옥수수가 알알이 여물기 전까지 영균을 두순리 마을회관에 발을 묶어놓을 수 있었을까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한 스페인 침략자들과도 같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정화를 위해 두순리를 방문했다는 기독교 집단으로부터 엄마와 마을 어른들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화마로 아버지를 잃고 얼굴과 목에 남은 화상 자욱의 상처로 세상과 등진 채 살아가는 원나, 그런 원나를 어떻게든 세상에 끓어내려는 모친 미라와 의로운 외팔이 펜싱 감독 철종, 열살이 넘는 나이 차와 필리핀이라는 국적 때문에 자주 오해도 사지만 밤마다 벽을 타고 오르며 사랑을 나눴다는 뜨거운 연애사를 안고 철종과 결혼한 원나보다 더 주인공 같던 용감한 철종의 아내 마리아, 데뷔를 앞두고 터져버린 좀비 바이러스로 멤버를 잃고 떠도는 영균이 만들어가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따뜻하고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간질간질한 고운 좀비물을 만나보세요. 절정에 다달아 등장하는 개독의 개소리는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두순리의 풍경 속에서 자체 정화 가능한 대한민국식 무공해 청정 좀비물!! 그 기적의 일상을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