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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S. L. 그레이 지음, 배지은 옮김 / 검은숲 / 2018년 2월
평점 :
남아공의 한 주택가, 마크와 스테프의 집에 무장강도가 침입한다. 마크는 완전히 겁에 질려 고분고분 그들에게 순종한다. 아내가 칼로 위협 당해 이층으로 끌려가는 동안에도 살려달라는 말 한 마디 못한 채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 스테프를 끌고 간 강도들은, 강도의 인간적임을 논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딸과 자신의 안전을 놓고 사정하는 스테프에게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은 채 값비싼 물건들만 훔쳐 달아난다. 그렇게 무사무탈하게 사건이 끝났으니 이걸로 끝, 해피엔딩이면 참 좋았겠지만 강도가 집안에 남겨놓고 간 후유증은 너무나 거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불면증에 시달렸고 낡은 집의 삐걱대는 마루소리, 창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에조차 벌떡벌떡 일어나 온 집안의 불을 키고 문을 점검할만큼의 강박증에 걸렸다. 무엇보다 마크와 스테프 사이의 신뢰가 무너졌다. 마크는 가장답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을 애써 합리화한다. 얌전한 제 행동이 가정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노라. 그러나 불쑥불쑥 치미는 수치심과 죄스러움이 그를 좀 먹는다. 이미 실패한 첫번째 결혼 생활 후 찾아온 두 번째 기회이기에 그의 트라우마는 한층 거셌는지도 모른다. 마크보다 족히 스무살은 어린 스테프 또한 머리로는 남편의 행위를 이해한다. 강도를 자극하지 않는 마크의 태도는 현명했으며 모두가 무사하니 괜찮은 거라고. 그러나 전처와 죽은 첫딸의 그림자에 지나치게 압도되어 있는 스테프의 마음 속 의심은 이 사건으로 하여 더욱 커질 수 밖에 없다. 마크에게는 우리가, 자신과 딸 헤이든이 그저 실패한 첫 결혼을 대체할 부속물 정도이지 않은가. 거기다 안그래도 문제가 많은 두 사람 사이에 이물질처럼 마크의 여사친 칼라까지 끼이고 보면 이건 볼 것도 없이 사랑과 전쟁 막장 한판이다!!
예상 밖으로 장르가 일변하는 것은 그들의 무대가 프랑스로 옮겨지면서부터였다. 온라인 숙박 공유 사이트로 집을 바꾸어 값싼 휴가를 보내려는 부부의 계획은 피터 스완슨의 <아낌없이 뺏는 사랑> 같던 치정 막장극을 황희의 <부유하는 혼> 같은 심령 공포 스릴러로 변신시켜 놓는다. 정말이지 완벽하게!! 사이트에 올라왔던 사진과 달리 텅텅 빈 건물, 독자인 나조차 페이지 너머로 느낄 수 있었던 숨막히는 곰팡이 냄새, 두 양동이 가득한 머리칼, 마녀 같은 외양으로 헛소리를 지껄이다 마크와 스테프의 눈앞에서 자살한 늙은 파리의 여인, 자신들의 집을 비워주고서 정작 남아공 마크의 집으로는 가지 않은 채 사라져버린 프랑스의 프티 부부. 모든 것이 이상하고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프랑스에서의 그 소름끼치는 휴가조차도 그들의 인생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잠깐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으니. 남아공의 집에서 벌어지는 또다른 반전들은 그야말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도시 공포 스릴러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적극추천한다. 책을 읽는데 너무 무서워서 다른 책 한 권을 더 끼고 읽어야만 했다. 분위기에 압도 당해 어깨가 으슬으슬 떨릴 정도가 되면 로랑 비네의 <언어의 7번째 기능>을 펼쳐 읽는 방법으로 긴장감을 누그러뜨렸고 그 방법으로도 안정이 안되면 평화 가득한 휴대폰 게임을 하기도 했다. 피가 튀고 육체가 난도질 당하는 모습이 적나라한 류의 가학적 스릴러물도 아니고 유령의 형태나 행위가 눈 뜨고 못 볼 만큼 해괴하지도 않지만 미스터리한 긴박감에 심장이 쪼였다 풀렸다 압박감이 장난 아니다. 추적추적 봄비 오던 밤 책과 함께 시작된 공포가 화창한 오늘까지 내 머리에 붙어있다. 아파트먼트, 이불 밖이 위험하다는 걸 다시 한번 증명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