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민망하고 창피했던 모든 사건들,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전혀 일어나지 않은 일로 만들 수 있다면? 만약 그런 모든 일을 우리의 인생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수 있다면? 마치 전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말이죠." (p122)
누군가가 이런 제안을 해온다면, 만약 그런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 실수의 순간들을 모조리 삭제하고 완벽한 인생의 어느 한 페이지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나는 행복할까? 그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책을 만났습니다.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제목이 곧 내용, 아주 직설적입니다.
주인공 찰리는 어젯밤 이름도 모를 남자와 원나잇을 합니다. 알콜과 음악에 취해 꽤 그럴싸해보였던 남자가 맨정신에 보니 옥떨매였고 후회와 자책이 후유증처럼 찾아오더라의 패턴은 너무 잦아 이제는 습관이 된 것 같습니다. 만성 우울감을 헤픈여자 로고의 티셔츠를 입는 것으로 표출하며 술집으로 출근할만큼 뻔뻔하고 낯부끄러운 게 없는 아가씨지만 실은 매일매일이 불안의 연속이에요. 적성에 안맞는 대학에서 중퇴해 부모님은 그 사실을 몰라 일은 하고 있지만 알바생인데다 남보기에 떳떳하지 않고 첫사랑에 실패한 후로는 제대로 된 남자도 만나본 적이 없죠. 쌍둥이 애아빠랑 불륜을 저지르기도 했고 소꿉친구 줄리의 남자와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 바람에 친구관계까지 아작이 나버렸으니 청춘의 방황이라고 하기에도 좀 남사스럽긴 해요. 본인도 인생이 시궁창인 건 아는데 도무지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를 모르겠고 변화에의 의지도 없고 자기 전엔 죽도록 후회하는데 아마 죽는 게 더 쉬울 것 같고 이대로 사는게 제일 편한 뭐 그런 갈팡질팡한 마음, 어떤 건지 아시려나요? 하여튼 죽다 살아나는 정도의 사건이라도 생기지 않는 한 그냥 이러고 살다 인생 쫑나겠거니 하는 때에 아니나다를까, 누가 뭐래도 소설이니까요!!, 그 남자 모리츠가 찰리를 찾아옵니다. 찰리의 첫사랑, 찰리의 첫남자, 찰리 인생의 최대 실수, 절대로 삭제하고 싶은 16세 어느 밤의 주인공!! 문득 네 생각이 나서 물어물어 찾아왔다는 누가 봐도 의심스런 초대에 두근대는 가슴으로 방문한 동창회에서 찰리는 뒤통수 제대로 맞으며 이용 당하고 흑역사의 또 한 페이지를 번쩍번쩍하게 장식합니다. 그러고는 그녀, 뉴라이프 헤드헌팅 회사의 직원, 사탄인지 요정인지 알 수 없는 이를 찾아가 인생 리셋을 의뢰하지요. 왼손의 결혼반지, 화려한 웨딩드레스, 남편이 된 모리츠, 거대한 저택, 한도 빵빵 신용카드, 밤이 새도록 흑역사를 지워가며 맞이한 새로운 아침. 찰리는 예전 인생의 때를 시원하게 벗어버리고 행복한 나날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요? 과연?????
"나는 왜 꿈도 없고 목표도 없고 계획도 없을까?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마치 우주 속을 떠도는 느낌이다. 출발선에 서서 제대로 된 인생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 이래로 나는 줄곧 인생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가사들처럼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내 인생이 완벽하게 제대로 돌아가며 '바로 이거야'라는 생각이 들기를. 그리고 지금과 같은 순간에는 내가 언젠가 깨어나서 '그런 순간은 절대로 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까 봐 두렵다. 나는 헛되이 기다렸고 그사이 인생은 나를 스쳐 지나갔다는 것을 깨달을까 봐." (p35)
비프케 로렌츠 작가가 보여주는 로맨스는 황홀하지 않아요. 전작 당신의 완벽한 1년 때도 그랬지만 할리퀸 로맨스 같은 느낌의 자극적이고 야하고 적나라하며 곧 죽어도 사랑이다 하는 느낌의 이야기는 아니거든요. 사랑은 곁다리일 뿐 그보단 주인공들의 성장소설 같은 느낌이랄까요. 빨간머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모조리 통합시킨 듯한 찰리가 과거의 실수에서 완벽히 벗어난 현재를 두고 다시금 후회하는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되어 인생을 살아보려고 하지만 성격이 곧 운명임을 증명하듯 벌어지는 일들도 예상 가능하지만 흥미진진하구요. 어떤 인생이든 완벽한 만족이란 없음을 29살이 되어서라도 찰리가 깨닫게 되어 다행입니다. 코앞의 그이를 얼른 알아본 행운까지도요. 콩그레츄레이션 찰리!